제108장 굿이나 보고 떡만 잡수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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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하며 일본과 싸웠던 대부분 항일 운동 투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고 근식이 말했다.
그러나 자신은 장영팔을 죽이면서 살고 싶었다.
지금은 비록 18세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고 싶었었고 대한민국 최고 통치자가 되고 싶었다.
이승만 정부하에 도탄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야망도 있었다.
그리고 여순사건의 진실을 만천하에 사람들이 바로 알게 해주고 싶었고 죄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고 싶었다.
일찍이 근식이 다녔던 중학교와 지금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가 외국선교사가
세웠던 미션스쿨이라 성경 읽기 숙제하면서 일찍이 깨달은 것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생명의 애착심 때문에 어린 나이에 죽고 싶진 않았던
것이라 해야 맞다. 이 때문에 완전범죄를 연구해 실행에 옮겼었다.
마태복음 16장 26절 말씀인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했고
누가복음 9장 25절에서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라고 했던 말씀처럼 근식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오래 유지하고 싶었었다.
그래서 자신은 다치지 않기 위한 심기력 타법을 적용했었고 완전범죄에 성공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던 자신에게는 단 한 번 찾아 왔던 일생일대 좋은 기회였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희끄무레한 구름 사이로 반달을 간신히 면한 달이 서쪽 하늘을 달려가는 하늘 아래
여름밤, 납작 바위에 누워 영산댁과 본동댁이 사심 없는 얘기를 나누고 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정담이 끝날 줄을 모른다.
반딧불이 공중불꽃놀이를 벌이고 강가 풀숲에선 베짱이와 여치를 비롯한 풀벌레의
노래 공연은 밤이 깊은 줄을 모르는지 계속되고 있었다.
청개구리도 이들의 노래경연에 초청을 받았는지 초저녁부터 지금까지 목청의
높낮이는 달라지지 않고 있다.
“저 아래 연당쏘에는 시방까지 사람들이 앉아 있능가 보구먼요.”
“아까 막 근식이가 연당소에 더위 식히러 간다고 안 헙디어?”
연당소에서 두 사람이 누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납작 바위까지는 200m가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얘기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근식 친구들이 피우는 담뱃불 빛이 비치고 있어 두 사람이 맘은 든든했다.
“그러니까 연당소에는 어런들은 누가 나올 사람도 없는 거고 근식이 또래 아그덜만 있을 거그만요.”
“전에는 명곤이 명수, 정하, 종억이, 해남이, 순철이랑 이런 청년들이 맨날 연당쏘에서 살다시피
했었는디 인자는 근식이 또래들이 물려받았다니까요.”
연당소에서 간간이 담뱃불 빛이 몇 개씩 빛을 내다 꺼지고 또 켜지기를 반복하고
있으므로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밤이 이슥해가도 두 사람은 맘이
든든했는지 일어설 줄을 몰랐다.
“저 아래 연당쏘에 아메도 사내애들이 예닐곱은 있을 거그만요. 전부 다 사람으로는 못 당할
일을 다 당해 뿌렀그마라. 안수 즈그 형인 명곤이 명수가 죽어뿌러 가꼬 곡성떡이 가슴에
피 병을 얻어서 욕을 보고 산다고 안 헙디어? 봉성떡은 또 어찌하겠소?
딸 영님이가 끌려간 디가 미쓰비시 전투기군납공장이라고 헙디다.
근로정신대에 끌려가서 다시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오등만 시방은 집에 연락도 없다고 합디다.
큰아들 해식이랑 둘째 남식이 인공기 사건으로 죽어 뿔고 자식이 넷이었다가 하나 남은 막내
봉식이만 쳐다보고 산다고 헙디다.
어디 그것뿐인가요, 정호 즈그 어무니 신촌떡도 큰딸 정실이가 영님이허고 일본에 끌려갔다가
오등만은 집 나가서 연락이 없고 그 집도 큰아들 정하가 여순사건 때 죽어 뿌렀응게 말이요,
시방 가슴에 피 병을 얻은 사람들을 봐 보씨요, 세상에 이런 꼬락서니가 어디가 있다요?”
본동댁이 세상에 이런 불행한 일이 있느냐고 하면서 발산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얘기하는
중에 영산댁이 가로막았다.
“본동떡요, 여순사건에 관련된 이약은 하지 말고 다른 이약이나 헙시다.
내 기분이 어찌 좀 머시기 허그만요.”
발산마을에 근식 또래의 친구들이 예닐곱 중에 대부분이 이번 여순사건으로 형님을 둘,
아니면 하나씩은 다 잃었다.
그중에 정호 누나 김정실, 봉식 누나 황영님, 김정원과 입산한 박순철의 누나인 박영심,
이런 딸들은 일본에 무기 군납 업체인 미쓰비시 회사의 전투기 만드는 공장에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가 후에 군 위안부로 다시 끌려가기도 했었다.
그런가 하면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고 상심한 나머지 발산 사람들이 일컫는 가슴에 피라는
병으로 학술적인 이름으로는 급성위경련을 앓는 사람을 얘기했다.
여순사건으로 비극을 당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장영팔과 관계되는 얘기 인지라
영산댁은 듣기가 편치 않았는지 다른 얘기를 하자고 말했다.
아래 연당소에 놀고 있는 근식이 동갑 친구들이 모두 이번 여순사건으로 가슴 쓰라린
몹쓸 일을 당했다. 이런 비극을 당한 아이들의 얘기를 다 하지 못했는데 영산댁은
본동댁의 얘기를 가로막았다.
여순사건에 관련된 얘기는 모두 고인이 된 장영팔이 포함된 것이라 영산댁은 맘이 편칠 않았다.
몹쓸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듣고 있기가 거북해 본동댁의 얘기를
가로막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애들이 집에 들어가려고 생각 안 하고 있고만요. 우리는 여그 납작 바구에 붙어 있는
고동이나 훑어서 갑시다.”
영산댁의 기분을 알아차린 본동댁이 여순사건으로 인한 근식 친구들의 가슴 아픈 사연
얘기를 더 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이 낫다 싶었다.
비가 오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다슬기가 납작 바위에 빙 둘러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오늘 종일 날씨를 삶아대등만 비가 올까 싶고만요. 고동이 아까보다 더 새까맣게 나와 있고망요.”
“마침 잘 됐고만요, 아메도 우리 정자 즈그 아부지랑 영산짐샌이랑 둘이서 술을 겁나게
묵었을 것이그만요. 낼 아침에 틀림없이 속이 쓰리다고 헐 거당게요.”
발산마을 앞으로 흐르는 황전천에는 은어와 피리를 비롯한 물고기도 많을뿐더러 다슬기도 많다.
나이 열 살을 갓 넘은 여자아이들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아낙들이 날마다 다슬기를 잡아내지만,
다음 날 같은 장소에 신기할 정도로 다시 다슬기들이 나타난다.
술 마신 다음 날 주당들에게는 다슬기를 삶아 우려낸 푸르스름한 다슬기 해장국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듯싶다며 두 사람은 다슬기를 쓸어 담다시피 해 집으로 돌아왔다.
영산댁이 집으로 돌아오자 마당에 모깃불은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었지만, 마당에 펴진
덕석은 말려져 헛간에 들여져 있었다.
“근식이 어무이 본동댁이랑 무신 야그를 많이 했능가 보네.”
“본동짐샌은 언제 갔소?”
“그 친구 간 지가 쪼끔 됐다니까.”
영규가 모기를 쫓는 건지 아니면 더위를 쫓기 위해선지 웃통을 벗은 채 팬티만 입고 마루에
누워 부채질을 살랑살랑하고 있었다.
영규가 아내가 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정만이 얘기하다 조금 전에 갔다고 말했다.
“근식이 즈그 아부지요, 본동짐샌허고 오랜만에 둘이 만나서 술 많이 묵었지라.”라고
영산댁이 묻고 있는 것은 남편이 과음해 술에 취해 힘들어하는 걸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정만에게 들었던 얘기 반응을 알고 싶어 두 사람이 술을 많이 마셨느냐고 물어본 소리였다.
“정만이허고 술도 많이 묵기는 했는데, 좋은 이야그를 들어 뿌럿네.”
“무신 좋은 이약을 들었는데요?”
“이 사람아! 그런 거는 말을 해야 알지? 자네가 말을 안 헝게 내가 모를 수밖에 없지 않응가?”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나눈 얘기 내용은 본동댁에게 들어 알고 있으면서 영산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술자리를 했으니 많이 마셨느냐고 했고 남편은 친구 정만에게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