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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향기 스크랩 광주이씨 시조묘와 연아총
보일러 추천 0 조회 1,033 12.01.31 15:50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애초에는 제비의 무덤(연아총)에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얼마 전 모방송사에서

서프라이즈 프로에 고려 말 이집과 최원도의 우정을 그린 내용이 방송되었기에

호기심이 발동하여천 북안으로 향하게 되었다.

 

광릉이라 불리웠던 명당터의 묘소. 위쪽에는 최원도의 모부인 이씨묘소이고,

아래쪽이 광주 이씨 시조 이당의 묘소이다.

 

내용인 즉, 고려 말 공민왕 시대에 이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시기는 신돈이란 승려가 국정을 전횡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집은 어느 날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게 된다.

이 말이 신돈의 귀에 들어가 포살령이 떨어지자 그는 화를 피해 늙으신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천리 길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천리 밖 영천 땅엔 과거 동기생인 최원도(崔元道)란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신돈의 전횡을 못 마땅히 여긴 나머지 낙향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친구집에 도착한 이집, 하지만 그는 친구에게서 문전박대를 당한다.

잔칫날 집 주인은 반기기는커녕 되레 호통을 치고 내쫓았으며,

심지어 사랑채에 불을 놓아 사랑방을 태워버렸다.

 

그러나 친구를 믿었던 그는 집 근처 구석진 곳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이윽고 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 주인은 아무도 몰래

등불을 들고 그를 찾아 나선다.

그의 예상대로 친구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박대를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은 최원도의 집에서 몇 년간 힘든 은신생활을 하게 된다.

최원도는 가족들도 모르게 이집 부자의 은신생활을 돌본다.

식사를 할 때도 세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밥도 그득하게,

반찬도 넉넉하게끔 하인들에게 주문을 한다.

그렇게 가져온 밥상은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낮이면 다락에 숨어 지내다 밤이 되면 한 이불을 덮고 세 사람이 자는,

계속되는 이런 생활에 그 집의 식솔들이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최원도의 집에 제비라는 예쁜 이름의 19살 계집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몰래 이 광경을 문틈으로 엿보게 된다.

 

고려숙부인영천이씨지묘

 

최원도의 어머니 묘소

 

제비는 결국 안방마님에게 이 사실을 고하게 됐고,

그 말은 다시 최원도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그는 엄하게 함구령을 내리게 되는데,

최원도의 부인은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문지방에 혀를 얹고 문을 닫아

반벙어리가 되고 그 일을 겪은 제비는 또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결국 헛간 대들보에 목을 매 자결을 한 것은 바로 그 며칠 후였다.

그 후 영천지역에도 이집의 수색령이 내리게 되나,

잔칫날 거짓 행동으로 그들은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는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소.

 

이당은 최원도의 집에 숨아 있다가 다음해인 己酉 1369년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서 돌아가시게 된다.

 

피신하는 신세라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고 장사도 은밀히 치러야 했다.

하지만 친구는 자기 수의까지 내주며 빈영범절(장례 치르는 예절)을 갖추어

친상과 다름없이 하여 자기 모부인 이씨 묘소 아래 옆쪽에 안장하게 하니

경북영천군 북안면 도유2동 남라현 낫고개 자좌원이다.

이게 이당 묘 위쪽에 영천이씨의 묘가 있게 된 연유다.

 

 

묘소 옆에는 천막을 치는 고정용 고리가 박혀있다. 
 

이당이 광주 향리로 있을 때 광주의 태수가 낮에 꿈을 꾸니 뜰 안 나무에

황용이 걸쳐있음을 보고 길몽으로 여기고 사람을 시켜 주위를 살펴보게 하니

“이당이 나무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다.”하니

이당을 불러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한쪽을 쓰지 못하며, 귀로 듣지

못하는 내 딸을 아내로 삼아 라”하고 길일을 잡아 혼례를 치르기로 하였다.

일하는 사람들이 옷감을 끊으려고 가위를 찾고 있을 때 신부가 말하기를

“가위가 창문 안에 있더라.”하였으며

혼례를 치른 후에는 눈도 잘 보이고 걸음도 잘 걷고 모든 병이 완쾌하니

하늘이 정한 배필이라 하였다.

고려말엽에 와서 이당이 국자생원과 그 아드님 오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랐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의 둔촌동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도 이곳이

광주이씨의 선조이며 고려 말의 지조 높은 은사인 이집선생이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으므로 그의 호를 따랐으며

그와 관련된 옛 지명들이 아직 남아있단다.

 

조선 8대 명당에 속하는 이당 묘는 야자형(也字形)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자문 끝 글자인 也자는 마지막 획순이 백호가 된다.

백호가 길게 뻗어 청룡의 아래턱까지 감싸고 있어 수구가 꽉 조인 형태란다.

반면에 청룡은 짧고 낮게 묘를 감싸고 있다.

 

이 묘에서 보면 주위의 산세가 모두 이곳을 향해 둘러싸고 있다.

물도 왼쪽으로 튼 산에 대하여, 오른쪽에서 나와 묘 앞을 돌아나가니

귀한 물이 된다. 산과 물의 조화다.


이집의 아버지 이당 묘는 생사를 넘나든, 친구 간의 참되고 아름다운

우정의 결실이라 하겠다.

 

성현의 용재총화 권2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덤 주인공 광주 이씨 시조 이당의 고손 8명의 극자 항렬 후손들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다. 당대 조정을 8극 조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세종대왕의 왕릉인 영릉은 무덤 주인공 이당의 후손(이인손?) 무덤에

이장한 곳으로 문중에서 양보한 땅이다.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만 148명이고, 이준경, 한음 이덕형은 영의정이고

최근의 이수성 국무총리를 배출했다.

 

 

둔촌에게 드리다

강개하게 시국을 한탄하며 눈물로 옷깃을 적셨는데

유리(流離) 중에도 지극한 효성은 유음(幽陰)까지 달했노라

한산(漢山)은 멀고 멀어 운연(雲煙)만이 아득한데

나현(羅峴)은 굽이굽이 돌아 초수(草樹)도 그윽하구나

앞 뒤의 두 마렵(馬?)은 하늘이 가려준 것인데

그 누가 그대와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 것인가

바라건대 대대로 길이 이와 같이하여

모름지기 교정(交情)이 이단금(利斷金)토록 하자꾸나. 

 

천곡이 둔촌에게 우정 변치 말자고 하며 준 시.

추사가 제주 유배 갔을 때 제자 이상적은 끝까지 스승을 섬겼다.

추사가 선물로 그려 준 세한도 속의 솔과 잣이 생각난다.

논어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말, 날이 찬 뒤에라야 솔과 잣의 변치 않는

절개를 알 수 있다.

 

충비 연아총. 주인 가문과 주인의 친구 부자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자결을 한

계집종 제비.....죽어서도 문간에서 주인을 섬기고 있다.

지금도 음력 시월 묘사 때는 이당의 후손들이 천곡 최원도의 모친 묘소와

충비 제비의 혼령에 술잔을 올린다.

 

포항에는 충비를 기린 3기의 비석이 있으니 곧 충비단량지비, 충비갑련지비,

충비순절지연 3기이다.

그러나 영천에는 지금도 제를 이어가고 있는 충노억수와 제비의 무덤이 있다.

 

 

이집과 최원도의 이야기는 우리 역사상 기록될만한 우정이지만,

제비 또한 역사상 기록될만한 의비가 아닐 수 없다.

최원도는 정성껏 제비의 장례를 치러주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나현 입구에는 몇 그루의 노송 사이에 연아총(燕娥塚)이 보존되고 있다.

 

 

연아총 무덤 앞 두 그루의 소나무에 동태포가 매달아져 있다.

 

광주이씨 대종회에서도 설단하여 매년 음력 10월10일 시조고의 시제일 새벽에

산 수호인으로 하여금 주과포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주고 있으며,

또한 최원도 모부인 이씨묘에도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년 묘제 때

주찬을 별도로 마련하여 헌작 배례하고 최씨 후손들도 이당묘에 헌작 배례하여

형제와 같은 두터운 우의로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하국근의 풍수기행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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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1.31 19:28

    첫댓글 의미 있는 유적이네요. 가치관이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우정과 노비의 애틋함까지 더해지니 감동적입니다. 감사히 보았습니다.

  • 12.01.31 19:43

    잘 읽었습니다. 혹시 성주이씨와 광주이씨와의 관련된 이야기는 알고 계시는게 없으신가요?

  • 12.02.01 08:43

    광주 이씨 시조묘는 세종대왕이 잠든 영릉으로 알고 있었는데...

  • 12.02.01 18:24

    네.. 저도 손석우씨의 '터'를 읽고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성주이씨 역사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같은 이씨 인건지잘 몰라서요. 돌아가신 아버지께 들은 이야긴데 지관이 세종대왕 묘자리를 찾다가 비를 만났는데 산 위에서 보이던 명당자리를 찾으려고 하다가 비를 만나는데 비를 피하려고 돌다리를 건너 제실로 가게 되고 그 자리가 자신이 찾던 명당임을 알게 되었고.. 묘를 파보니 모년 모월 모시에 자신의 묘가 파헤쳐지는데 이곳에서 연을 띄워 떨어진 자리에 내 묘를 이장하라는 글이 있었답니다. 그때서야 자손들은 선친의 유언인 " 제실과 돌다리만 놓지말라" 는 말을 생각했답다.그래서 연하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들었거든요.

  • 12.02.01 11:38

    대단한 사람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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