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의 기준은 역사, 퀄리티, 마케팅이다. 한 브랜드의 역사가 3세대를 거치지 않고 명품이 될 순 없다.
브랜드의 시작과 시간의 흐름, 해당연도마다의 출시 제품들에 관한 실록들을 보존하는 동안, 그 세월을 지켜온 역사성은 클래식이 되고, 클래식은 높은 값으로 환산되는 독특한 부가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퀄리티는 명품의 절대적 조건이다. 퀄리티는 제품을 만드는 기법과 소재로부터 오는데, 그것은 '패셔너블하다'는 명제보다 우선된다.
소수의 숙련된 장인들이 그 가문만 공유하는 독특한 공법으로 만드는 테스토니 구두와, 최고의 가죽을 가공하는 특별한 노하우로 가치를 발언하는 에르메스처럼.
명품의 역사와 퀄리티를 포장하는 마케팅은 현대적 측면에서의 명품의 조건이다. 민트빛 패키지를 통한 티파니의 일관된 마케팅은 시간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는 명품의 우아함을 보여주며, 501을 밑그림으로 다채로운 라인을 개발하는 리바이스의 마케팅은 기존 제품을 변주해 현대화시킨 다음 마케팅에 반영하는 유연성을 보여준다.
트렌드를 보여주기 위한 지속적 혁신은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명품 브랜드의 고뇌를 말해준다.
루이뷔통의 전통적 모노그램 위에 새로운 이미지를 보태는 또 다른 라인들처럼. (그러나 유동성이 당연시된 시대에 대량생산 체제는 장인 정신의 측면에서 보면 양날을 가진 검이다. 결국 전통적인 가족 단위 전문 숍들의 문을 닫게 만들었으니까)
보석 중의 왕이요,왕가의 보석’이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브랜드 ‘카르티에’(Cartier).
손목에 찬 반짝이는 결혼 예물시계가 카르티에임을 알았을 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이유다.
치밀한 구조와 화려한 장식성을 자랑하는 보석의 명품 카르티에는 1847년 설립자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부터 시작됐다.
파리의 한 보석상의 숙련공이던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는 자신의 이니셜을 딴 L과 C로 된 마름모꼴 디자인을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영국왕실의 보석을 다루면서 명성을 얻게 됐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된 웨일스의 왕자는 카르티에의 정교한 솜씨에 반해 ‘왕의 보석상,보석상의 왕’이라고 칭송했을 정도. 에드워드 7세는 1902년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27개의 보석이 박힌 티아라(tiara·왕관처럼 머리에 쓰는 장식품)를 만들게 했고 2년 후에는 카르티에를 최초로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929년 월가 붕괴로 세계적인 대공황이 찾아왔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 카르티에는 ‘잔 투상’이라는 걸출한 디자이너를 영입해 불황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았다.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친구였으며 ‘판다’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는 에나멜로 보석에 색을 입히고 보석원석을 조각해 탁상시계를 만들어내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예술적 깊이를 더했다. 그녀의 별명을 딴 표범모양의 판다 장신구 시리즈는 카르티에의 명품 컬렉션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제2차세계대전은 패션산업의 획기적 전환기. 상류층은 더욱 호화롭게,일반대중은 한층 실용적으로 갈라섰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서양인들은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카르티에는 이런 조류를 읽어냈다. 중국 일본 인도 이집트 등 동양과 아프리카의 모티브를 살린 작품들을 다수 선보였다.
문화적·대중적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지금도 ‘보석’ 하면 ‘카르티에’로 통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