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택하려 하느냐며 그리고는 쪽지에다 뉘약은 아직 학생이고 한자로 "無經月" 이라고 썼다. 월남말은 우리와는 틀리다는걸 알고있기에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오山을 "아오누이(산)"이라 하지않고 "누이아오"라 한다. 우리식으로 캘리포니아 호텔이라하지않고 Hotel California ("Eagles" 의 노래곡목)로 미국식으로 하듯이---
아하! 없을 無, 經月=月經이 없다니 아직 어리다란 뜻으로 해석되었다. 난 둘째 Anh 과 함께 가고
싶다고하니 다소 의외라는 듯, 그러나 잠시후 결심한듯 바로 "오케이"라 하는데--- 마침 그때 "앙"
이 나왔음으로 더 이상 말을 끊고 그날은 그것으로 일단락지었다.
어차피 난 남을 위해 봉사하기로 맹세한 몸이 아니던가? 이왕이면 이국의 불쌍한 처녀나 구해주자. 우리도 빈곤하지만 더 비참한 생활을 하는 그들이 너무 안타깝고 측은했고 불쌍히 보였다. 연극한번 볼수있나 그렇다고 영화를 마음껏 구경할수있나 문화생활이라곤 티끌만큼의 혜택도 못받고 해만 떨어지면 이웃도 못 간다. 그러니 주렁주렁 애들만 연년생으로 늘어나지!
홍하사 "리유"(가슴의 검은표식은 부인이 며칠전 부비추렙에 공중분해)씨댁에서 1소대장 중위 신영호님과~
처음 알게된 언니 An(앙)의 당시 나이는 17세.
약혼했던 둘째 안(Anh)과 막내 얀과 언니 앙(An)
내가 Natrang 에 있는 美 Recondo School 에서 교육수료후 받은 그 수당($152)과 함께 쿠폰 152불을 합하여 $304불을 전 중대원에게 희사한다며(물론 박재란과 악수한것 때문만은 아니다) 중대장님께 뜻을 밝히니 윙을 단(공수부대출신)우리중대장은 쬐그만 홍하사가 그 힘든 교육을 무사히 치루고 원대복귀해서 고맙다구하며(사실 난 2중대에 배치되어 중대장께 신고도 못하고-당시 작전지역(맹호70-1작전)에 계셨으므로-부관에게 신고하고 바로 교육 받으러 간 월남신참하사)중대장님은 더욱 대견해 하셨다.
U.S Recondo School 에서 "레펠" 하강후 미교관으로 부터 결과를~
처음엔 그많은(?) 돈을 희사한다니 이상해했지만 홍하사의 의지가 단호하니 그렇게하라고 하면서 부관(중위)을 시켜 전액 맥주를 사게한바 연병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언제던지 마시고 싶은사람 싫컷 마시게했으니---정작 홍하사는 한깡도 축 내질못했다. 왜냐하면 난 맥주도 한깡 못하니까.
다만 내게 스스로 당번병을 자처 해주던 임병장이 주선해서 중대에 수시로 들어와 짬밥 가져가는 소녀("마이" 란 소녀였는데 나중들으니 2중첩자? 혹은 V.C앞잡이? 란 말도 있었다.)에게 코크(콜라)로 바꿔 먹은것이 고작이었다.
당시 하사 봉급이 57불이었고 45불 정도는 고국에 송금하고 나머지를 용돈으로 우린 한달 생활했다. 난 운좋게 양키들이 부러워하는 마크를 단 레콘도 교육도 받고 타지역 구경(?)도 맘껏했으므로 공짜로 생긴 수당, 몽땅 전우들에게 쓴다고해서 조금도 후회될게 없었다.
동료 60여명의 주월연합군중에 1/3은 훈련중에 탈락(퇴교)되고 40여명만 졸업하게 되었는데 거의가 특수부대 소속였지만 한국군은 나처럼 일반병사였으나 그들보다 더 강했다.(나중 따로 글을 쓸 예정)맹호지역을 벗어나 백마지역인 "냐짱"(나트랑)을 간다는것 자체가 특별케이스의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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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맹호 70-1 호랑이 작전후 위문공연중 가수 박재란.
그 많은 대대병력중에 하필이면 가운데 통로쪽에 있는 내게와서 맨먼저 악수를 청하니 이런 횡재가 어디있었겠는가? 난 며칠을 손을 씻지않을 정도였고 주위의 병사들도 간접으로 그녀의 체취을 맡으려 내게 악수를 청할정도였다. 그런 영광이 또 어디 있겠는가? 뒤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테지만 가수 박재란과 악수한번하고 기분파인 홍하산 $300:00 불을 썼다.유감스럽게 우리 소총중대엔 사진사도 없었고 사진찍기도 만만치 않았다.
홍진흠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 편지를 읽을 실 때 쯤이면, 한국에 도착을 하셨겠지요, 짧은 만남과 일정에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입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그리고 사이공에서 40년만에 만남에 대해서 교민신문에서 큰 관심을 보이며, 신문에 게재를 하고 싶어합니다.
제목은 "40년만에 지킨 아름다운 약속"을 소재로 두분이 처음 만남부터 사이공에서 40년만에 다시 재회한 내용들을 적어주시고, 두분의 옛날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보내주시면, 베트남안에 한국인의 긍지를 심고, 한국인의 약속은 언젠가 꼭 지킨다는 것을 베트남의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의 귀감으로 삼을까 합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
김도훈 배상
(한국정부 코트라에서 일하시는 김도훈박사)
'앙'과 '안'이 2년후 재파해서 다시오라는 글을 손수건에 수놓아 준 모습(위에는 Hong)
장민지: 지금시각 새벽 4시57분 밤 을 하얗게 지새며 "꽁가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독특하고 가슴아린 사랑이야기 입니다, 홍 진흠님 다음 모임에서 뵐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느낌 이 겠지요,제가 9편에서 아~이 이야기는 영화로 나와야겠구나 생각 했는데...10편에 넘어오니 씨나리오 얘기가 나오는군요,사람의 생각들은 비슷한가 봅니다, 머리에 그려집니다,뿌연도시, 릭샤...몇해전에 베트남 하노이 를 다녀 왔거든요,다음엔 사이공을 방문 하고싶습니다, 11~16편 까지 검색 해서 읽어야 겠습니다, < 아름다운고백 감사합니다 >
달동네회장님! 선배님앞에서 이런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이젠 몸이 예전만 같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 9시에 퇴근후 (어제 오후 6시 출근하니 15시간 근무)10시에 컴교실에서 교육 그리고 잠 불과 2시간자고 오후 2시에 하모니카 수업 하니 오후 4시넘어요. 다시 사우나 그리고 전우모임후 다시 교회예배 다녀오니 조금전 이글을 대충 마무리하니~ㅎㅎ
첫댓글 모르시는 전우님들을 위해 말씀드리면 3자매중 한사람을 택하라고해서 둘째를 택하고(엄마가 부비추렙에 폭파되어)
2년후 결혼하자는 7번째 사진의 약혼반지와 수놓아 새겨진 손수건에는 2년후에 월남을 다시와서 결혼하자는 내용이
었으나 적화통일이 되고~ 나중 이사실을 알은 정부의 김도훈박사님이 다리를~ 귀국후에 반지와 손수건 함께 찍은~
홍하사 봉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군요
많은것이 기감될 일들입니다.
앞으로도 좋은일 많이 하시기 바람니다.
달동네회장님! 선배님앞에서 이런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이젠 몸이 예전만 같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 9시에 퇴근후
(어제 오후 6시 출근하니 15시간 근무)10시에 컴교실에서 교육 그리고 잠 불과 2시간자고 오후 2시에 하모니카 수업
하니 오후 4시넘어요. 다시 사우나 그리고 전우모임후 다시 교회예배 다녀오니 조금전 이글을 대충 마무리하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