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운동
필자: 조선전쟁을 끝내고 귀국하니 중국 국내사정은 어땠습니까?
팽덕회: 나라가 조금 안정을 되찾는가 싶었는데 1958년부터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농촌에서는 지주를 타도하고 토지개혁을 완수했고, 도시에서는
공장과 기업체를 국영화하는데 성공한 당 지도부에서 야심찬 계획을 시행했습니다.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하여 7년만에 영국을, 10년만에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큰 슬로건을 내세워
모든 산업분야에서 빨리, 많이, 크게 성과를 내자고 독려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철강생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선전했습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용광로가
세워지고 온갖 고철과 집에서 쓰는 숟가락까지 수거하여 철강을 생산했지요.
생산량은 세계1위를 기록했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강이 만들어졌습니다.
벼농사에 관한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간부가 말했습니다.
“벼를 심으면서 왜 칸을 넓게 심는가? 벼와 벼 사이를 촘촘히 심으면 한 줄을 더 심을 수
있고 수확이 배로 늘게 아닌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이 국가정책으로 채택되어
시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벼와 벼 사이에 통풍이 되지 않아 벼들이 썩게 되었고
강한 바람이 불자 모두 쓰려져 버려 벼농사를 전국적으로 망치게 되었습니다.
4대 해충(쥐, 참새, 파리, 모기)을 박멸하자는 전국적인 운동이 일어나 참새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잡아 없앴습니다. 참새잡이로 천적이 없어진 논에는 해충이
들끓어 농사는 돌이킬 수 없는 흉작을 기록했습니다.
농촌에서는 집단화가 장려되어 인민공사가 만들어지고 일도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소득도 똑같이 나누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개인의 욕구와 차이를
무시한 이런 정책으로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게을러져 생산활동이 크게 위축된데다
급격한 공업화로 농촌인구가 대량으로 도시로 빠져나가 농촌경제의 파탄을 초래했습니다.
정책의 큰 오류에다 1960년부터 대기근까지 겹쳐 몇년사이에 3천만명이나 굶어죽는
대재난이 덮쳤습니다.
필자: 사, 삼천만명이나 굶어죽었다니..그런 대재난을 보고만 있었단 말입니까?
팽덕회: 누구라도 주의해서 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택동과 중앙당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 세상을 만든다며 사상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추진하다보니 그 누구도 이런 힘든 상황을 지도부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1959년 봄 고향 호남성에 가서 대약진운동
실태조사를 했는데 아사자가 너무 많고 상황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한 노인이 건네준 편지를 읽고는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곡식은 거덜나고 고구마 잎도 말라 비틀어졌다. 청년들은 공장과 철공소에 일하러 가고,
애들과 늙은이들이 논밭에서 헉헉거린다. 살길이 막막하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제발 인민을 위해 지도부에 말 좀 해주기를 빈다.“
이런 재난을 누군가 지도층 주변에 있는 사람이 당지도부에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산회의
팽덕회: 1959년 7월에 여산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모택동 주석이
참석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향기로워도 방귀고, 냄새도 고약해도 방귀다.
장(腸)안에 쌓아두면 병만 생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자.“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에 관한 토론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두패로 갈렸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총대를 메고 모택동에게 직언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밤이 되어 모택동의 숙소를 찾았는데 이미 잠들어 만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이의 개선을 요망하는 건의문을 작성하여
두고 돌아왔습니다. 30년동안 친형처럼 모셔온 모주석에게 내가 말을 하면
받아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아침에 나의 편지를 본 모주석은 불같이 화를 내며
건의문을 간부들에게 회람을 시키고 나를 비판하게 했습니다. 전날까지 서로
모택동에게 직소하겠다고 나선 간부들까지 나를 맹비난했고 나는 반당분자로
몰려 당에서 쫓겨나 파면되고 말았습니다.
필자: 1960년부터 대기근이 발생하여
아사자가 수천명이나 발생하자 결국 모택동은 책임을 지고 2선으로 물러나게 되었지요.
당신이 입을 닫고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당에서 추방되진 않았을텐데요.
팽덕회: 당의 간부는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나는 모택동 한사람보다 전체 인민을
위해 사명을 다하다 파면되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실용주의자인 유소기가 모택동의 뒤를 이어 사태를 수습하고 나도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모택동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몇 년뒤 또다시 엄청난 재난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문화대혁명(1966~1976년)’이라는 정치사회적인 재난이었습니다.
당,정,군에서 아무도 모택동의 말을 듣지 않자 그는 홍위병(紅衛兵)이란 이름하에 10대
청소년을 동원하여 혁명원로들을 타도하게 했습니다. 문화혁명기에 나는 사천성 성도에서
홍위병들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와 군중들 앞에서 비판받고 구타를 당했습니다.
( 아니 이게 누구시요? 한국전쟁의 영웅 팽덕회 장군이 아니십니까?
어쩌다가 이런 고초를...문화혁명기에 군중앞에 끌려나와 폭행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팽덕회)
제일 참을 수 없는 치욕은 수만명의 중국군인 앞에 끌려나와 후배인 임표로부터 비난받고
매도당한 사실입니다. 수년간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8년이나 죄수생활을 했고, 1974년
구타의 후유증인 폐렴과 혈전증으로 감옥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필자: 당신이 죽은후 2년후에 모택동도 죽었지요. 1976년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무리들을
내쫓고 등소평이 집권하여 당신은 복권되었지요. 당신의 시신은 고향 호남성의 잘 단장된 묘역에
잠들어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당신의 운명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끝났습니까?
팽덕회: 조선에서의 나의 혁혁한 전공을 모택동과 임표는 크게 시기했고 결국 나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습니다.
필자: 세상사람들은 말합니다. 송나라에 충신 악비(岳飛)가 있고, 중공(중화인민공화국)엔
충신 팽덕회가 있다고요. (악비는 남송의 장군으로 금나라군대와 싸워 이겼는데 간신들의
모함으로 죽었다)
팽덕회: 장수(將帥)의 운명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죽도록 싸우다 죽으면 영웅이 되고
살아 돌아오면 모반죄를 뒤집어 쓰고 숙청되는 것이 장수의 운명 아니겠습니까?
첫댓글 조선 사람들이 팽 때문에 무더기로 죽었으니, 팽은 맞아죽어도 싸겠다.
김창현 선배님.
이등박문이 우리에겐 원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고
팽덕회도 우리에겐 원수지만 중국에서는 충신으로 칭송을
받는다고 합니다. 조현두.
팽덕회가 토사구팽 당했군요
1954년 부총리겸 국방부장(국방장관)이 되었으니
6년이나 군부의 최고위자리에 앉아 있었네요.
눈치 많이 받았을 겁니다. 조현두.
우리의 조현두 원장의 글이 이 여름을 시원하게 나게하는 쳥량제가
되어 더위를 잊고 읽게하고 있습니다 / 성종화
성종화선배님. 건강하시지요.
큰 전공을 세운 장수들의 말로가 대개 비슷해서 놀랍니다. 조현두.
장군들 거의가
싸우다가 죽으면 영웅이 되고
살아서 돌아오면
잠깐 대대적인 대접을 받으나
결국 모반죄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요
70프로는 그렇습니다
그들도 그걸 압니다
그러나 우국충정이 깊은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지요
안병남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죽지않고 살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일설에는 이순신이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조용히 도망쳐
깊은 산속에 숨어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조현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