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과 귀화성씨인 광동진씨의 유래
옮긴글( 불멸의 이순신 장군 )
명나라의 진린 장군은 "임진왜란'당시 明의 3차 원군 파병 때의 어왜도총관 전군도독부의 도독으로 조선에 참전한 인물입니다. 진린은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였습니다. 명랑해전을 앞두고 조선수군은 칠량해전에서 원균이 참패한 후에 재건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요. 당시 진린 도독의 함선은 500척, 수군 5,000명, 보병 등 1만 3,900명의 대규모였고, 이순신 장군은 범선 약간과 전선 3척, 그리고 수군은 5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임란시 병조판서(국방부장관)이었던 백사 이항복도 진린을 "명장입니다"라고 말했고, 또한 영의정 서해 유성룡도 진린을 명장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진린 제독은 이순신 장군과 만나기 전에 능력이 뛰어났지만 탐욕을 일삼는 장수였다고 합니다, 조선을 구원하기위한 지원군이라는 자만심은 진린이 거느린 명나라의 수군들이 조선군과 백성들에게 몹쓸짖을 서슴없이 행하게 되었답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명 해군의 행패를 핑계"로 본진에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겠다고 선언을 하자 뜨악해진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에게 明 해군의 지휘권까지 넘겨주게 되었답니다. 대신에 진린에게 자신이 세운 공로를 전부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시켜 진심으로 존경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진린제독은 이순신 장군을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는 경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선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0.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모신 황조별묘
노량해전에서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작전 수행 중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에 전투 중에 진린은 위기에 처하였는데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그를 구원해주게 되는데, 진린은 이를 이순신이 직접 자신을 구원하러 온 줄 알고 이순신에게 사례하고자 하였는데, 이 때 이순신의 죽음을 알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라며 피를 토하며 통곡했고,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해군 장군과 사병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진린 제독은 왜란이 끝난 후에는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력제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들을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해집니다. 명에 돌아가서는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으며, 1년 전인 1597년에 양응룡이 파주반란과 피림을 토벌했다. 1607년에 세상을 뜨기 전에 묘족을 평정한 공으로 태자소보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강(忠康)을 받았습니다.
*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가 지난 14일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에 있는 ‘황조별묘’(皇朝別廟)를 방문했다.
조선 구원에 함께 종군했던 진린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은 애산에서 청군(후금)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진구영의 아들 진영소(진린의 손자)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로서 일하다가 명나라의 북경이 함락되고 왕이 자결하자, 명나라가 멸망 후 '원수와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조선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제독의 손자가 도착한 곳은 할아버지 진린 제독의 진지가 있던 전남 완도군 고금도 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모와 고향'을 그리는 칠언시를 남겼습니다.
“부모님은 북월(북광동성)에 계시는데
나 홀로 동쪽(조선)으로 와 외롭구나.
서남쪽을 응시하며 긴 한숨 쉬니
흰 구름 날아가는 곳(고향) 옹산이어라"
그는 경주이씨 성원의 딸과 결혼해 고금도 구석리에서 살다가 해남 해리로 살았습니다. 이후 14세인 석문을 남기고 망명 16년 되던 해인 1659년 사망했습니다. 석문은 20여 년간 가세를 확장해 해남 산이 반도의 끝 조상산 밑 에 터를 잡고 마을 이름을 황조라고 했습니다. 이는 명나라 황제의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한 충신의 후예가 산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진린 제독은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알고 있지요!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로 알고있는 '노량해전'에서 진린 제독은 이순신장군과 함께 왜국의 수군을 협공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을 받아 이순신에게 퇴로를 열어줄 것을 건의 했으나 이순신이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도 왜군함을 협공을 하게 되었다는~ (황조별묘와 이낙연 총리 : 사진 생략)
진린제독에 대한 후대평가!
광동진씨 측에서는 진린 장군이 상당히 왜곡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왜곡된 진린 장군에 대한 평가 때문에 가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중국 출신 가문인 여양 진씨로 집안을 합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다.
* 대표적인 왜곡은?
첫째, 춘원 이광수가 1930년대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에서 진린 장군은 이순신 혼자서도 적을 소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진린이 1만 명에 가까운 수군을 데리고 내려와 순신의 행동을 방해해 적을 놓아 보내 마침내는 순신을 죽게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고 했고,
둘째,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와 셋째,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은 진린 장군이 이순신의 공을 가로채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회유에 휘둘려 왜적의 퇴로를 열어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넷째,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와 다섯째,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진린 장군이 공적에 욕심을 부리고 정유재란 말기 퇴각하는 왜군을 쫓는데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조선군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 조금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정유왜란시 진린제독의 작전회의도 / 명나라 수군 화가가 그렸을 것이다......생략
좌.우에는 진린의 선봉장인 조선의 이순신과 명의 등자룡의 모습이 보인다)
왜곡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반론의 근거?
첫째, 조선왕 선조의 선물을 거부하였다. 1598년 진린제독이 조선구원을 위한 출병을 준비중일 때 선조가 선물을 보내왔으나 진린제독은
"아직 전공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선물을 받겠느냐’며 돌려보냈습니다,
왜란이 종결된 후에 한양을 떠났던 진린 제독에게 한 달 후 선조가 선물을 보냈는데, 돗자리와 종이만 받고 많은 예물을 돌려보냈다.
- 증거: 선조실록에는 진린이 선조에게 보낸 계첩에는, “보내주신 돗자리와 종이 두 가지는 배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둘째, 임진왜란이 끝나가는 시기에 왜장 소서행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싸우지 않은 명나라의 '유정' 육군제독을 찾아가 그의 장군기를 찢어버리고 "육군과 해군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 따로 있다" 라면서 적의 퇴로를 막았습니다, 또한, 노량해전이 끝난 후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의 공로를 평가하면서
‘찢어진 하늘을 꾀매고 해를 목욕시킨 공이 있다’고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점 등 여러 역사적 정황들을 보면 공적에 욕심을 부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 합니다. 그는 노량해전이 끝나고 난뒤에도 왜구 소탕작전을 계속 밀어 붙여서 남해도에 숨은 적 2,000여 명을 토벌한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조에게 건의하여 대마도를 정벌할 것과 이순신장군의 후임으로 수군 통제사의 조속한 임명, 왜구의 재침입을 염려하며 조선 수군의 보강을 건의했습니다. 아울러 부산성과 한양의 성을 보강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진린이 “부산성은 성곽이 불완전해 적을 막을 수 없으나 만약 20~30만량의 은자로 무기를 보강하고 용사를 모집한다면 적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은 대마도와 가까워 순풍을 만나면 하루에 오갈 수 있어 적이 오는 길목이니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자, 선조는 “대인께서 이 나라를 깊이 생각하시니 감격스럽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수습한 진린 제독
진린 제독은 노량해전을 마무리 시킨 후에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명나라의 수군 사령부가 있던 완도군 고금도로 옮긴 후에 중국식 장례 절차에 따라서 사당을 짖고 100일 간의 장례를 치루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처가가 있던 충남 아산으로 옮겨진 것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진린 제독은 통영의 충렬사에 이순신 조문을 썼으며 한편 남해의 왜구 잔당을 소탕하기에 바쁜 일정을 보냈다.
광동 진씨는
진린의 손자인 진조가 청나라를 탈출, 해남에 정착한 이후 약 2,000여명이 넘는 씨족들이 전국에 퍼져 살고 있으며, 황조 마을에는 약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