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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사진첩.
-고인이된 큰처남 박영수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사진 : 13매(12~3)
아래 글은
집안에 드물게 보는 좋지 않은 얘기라고 할 수 있지만
큰 처남이 이승을 떠난지 20여년이 가까워 오고,
훗날 누가 어떻게 해서 그 많은 돈을 다 썻나 ?
그때 그시절 있었던 일부를 밝혀 둘만한 일이기에 한점 거짓없이 기록에 남겨 둔다.
남여노소 불문하고 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들 한다.
오래전부터 항간에 회자되는 얘기 가운데
"돈 준다고 하면 뱃 속에 있는 아기도 나온다" 라는 말이 있듯이
처남이 어린나이에 친부모님을 여의고 위로 누님들도 출가하고
눈에 들어 오는것이 온통 돈이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부모님이 피땀 흘려 벌어논 재산을
본인이 돈을 벌어 보지 못하였더라도,
가까운 주위에서
바른길로 선도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본인도 어쩔수 없는지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며
낭비만하는 길로 빠져 들어 가고 있는 자가파산 행태의 일면들이다.
이글을 쓰면서
큰처남의 1남 2녀와 전화를 걸어 지금 하고 있는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칭찬과
열심히 살아줄 것을 격려 했다.
□. 그 사건사고들을 생각나는대로 몇가지만 열거해 보면
어릴때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누구나 한번쯤 겪거나 당해 본 경험이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처남은 초등학교 시절은 착하고 순진하였다.
매사에 무덤덤하고 큰 말썽없이 학교와 가정생활을 잘했다.
단, 아버지(장인)로부터 가끔 용돈을 받아 쓰는것을 보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 처남이 중학교 시절
처남은 운동을 좋아했다.
운동 감각도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또래나 그 이상의 선배들 보다 주먹이 남보다 세었다.
그 시절 놀이터나 길에서 좋은 옷, 마음에 드는 새 신발을 신고 가는 학생을 보면
골목길이나 외진곳으로 불러 내 위협하여 빼앗아 입었거나 신고 다녔는데,
이후,
바로 뉘 집 아들(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돌려 주거나 배상해 주는 일이 여러번 있었다.
또한 친구나 선배들과 싸우게 되는 경우도 여러차례
있었는데
처남에게 맞아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이 한달에 두건 정도 있었는데,
나는 퇴근 후, 입원한 환자를 찾아
이 병원(유외과) 저 병원(선호영 병원)에 과일 또는 음료수를 사 들고 가서 위문(로)하며
그 부모에게 사과를 구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 형사들의 수첩에 기록된 "요주의 학생"
처남이 대전 선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충남중학생 시절로 기억한다.
나는 한국조폐공사에
입사(1974년)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입사동기 중 대전지방검찰청 지검장 아들인 민병우 친구에게 처남에 관한 상의를 한적이 있었다.
그는 며칠후,
평소에 알고 지내는 대전경찰서(지금은 중부경찰서) 경찰관(형사) 몇사람에게
처남의 이름을 대고 물어 본즉,
형사들의 수첩에
대전시내에서 문제학생(요 주의)으로 랭킹 5위 내에 체크되어 있다는 것이다.
-. 한번은
대전. 충남 유도 대표선수(1년 선배. K.D.W)를
선화동 뒷골목(구 중앙교회 옆 시장)에서 두둘겨 패 머리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 학생의 아버지가 대전.
충남 체육회 권투협회 부회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매일 오후 17 : 00 ~ 18 :00시 쯤이면
어깨가 딱 벌어져 체격이 좋고 가슴과 등에 문신을 거창하게 하고
인상이 부드럽지 않은 젊은이들 3 ~ 5명이
선화동 처가의
사무실 또는 안채 마루에 걸터 앉아서 치료비 외에 위로 보상금을 듬뿍 내놓으라고 떼를 썻다.
그때마다 장인은 자리를 피했는데
처가에 처남처제가 모두 어린터라 그들을 담당하는 이는 큰 사위인 나를 내 세웠다.
체격이 그들에 비하면 빈약하기 그지없는 나는
등치가 큰 그들과 대면하여 입씨름을 되풀이 할 수 뿐이 없는 처지에
금시라도 주먹이 날아 올것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여러차례 감내한적도 있었다.
-. 남대전고등학교에서 유성농업고등학교로
충남중학교를 졸업후,
그 당시 입학하기 힘들다는 남대전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입학 후, 약 10여일 정도 되었을까 ?
동기생 친구를 두들겨 패 퇴학할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아내가 학교를 찾아가 담임선생님과 협의를 했더니
다른 학교로 전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퇴학 처분을 받을 수 있다라고 하여
유성농업고등학교(지금은 유성생명과학고등학교)로 전학을 할 수뿐이 없었다.
-. 평소에 착하기 그지 없었는데
처남은 술을 먹지 않고 있을 때는 말수도 없고
무엇이든 남에 말이라면 긍정적이며 불쌍하고 딱한 사정에 의리와 인정이 많았으며
착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술만 먹으면
평소 본인에게 감정이 상한했던 사람을 대하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고 겁없이 헤까닥했다.
-. 취미가 낚시와 사냥 그리고 골프와 술마시기
낚시나 사냥을 가려면 몇날 며칠 동안 20대 초반의 후배(똘마니)들과
낚시터에 가건물을 짖고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
술을 마셔가며 혼미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를 말한다.
만나는 이들은 손 아래 또는 손위를 막론하고
술 한잔이라도 얻어 먹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니 고분고분하고 새로운 화제로
귀가 솔깃하게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 도박으로 유인하는 마수(魔手)
상대는 이웃간임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나이도 한참 위인데
몇개월 전부터 처남에게 접근하여 도박(놀음판)으로 유인하는 마수에 걸린적이 있다.
첫날밤은 처남이 돈을 딸수있는 기회주고,
두쨋날밤은 잃었다 땃다하는 일진일퇴로 더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겠금 유혹하여,
셋째날 밤은 자정이 지나면서 가지고 있는 처남의 판돈은 물론 더 많은 돈까지 끌어 내
엄청나게 큰 돈까지 싹 쓸어 가버리니 하룻밤 사이 몇억원씩 일은적이 몇번있었다.
돈을 잃고 나니 본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상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면서도
잃어버리기 위해 몇날 며칠씩 술로 지나는 경우를 본적도 있다.
-. 망하려고 드니 소 귀에 경 읽기(牛耳讀經)
정상적인 좋은 말은 들리지 않고 망하는 말만 들었으니
술을 먹지 않고 대화를 하면
본인도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술 먹고 어울리다 보면 사건사고가 발생했으니
어찌 스스로 하는 일이지만 무엇에 씌었는지 임의(任意 : 자기 의사대로 하는일)로 할 수 있었겠나 ?
처음에는 창피한 일이라고 남들이 알까바 쉬쉬했지만
참으로 안탑깝기 그지 없는 일들을 들으면서 수없는 노력을 해 보았어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입장이 되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이 되는 것이 가족이며 일가친척이었다.
-. 빌려준 돈 받아 달라고
남에게 인정과 의리로 돈을 빌려 주고
받기가 어려운 사건에 대하여 내가 나서서 받아 준것이 3건이나 된다.
처음은 (주)영진건설로부터 받아 낸 돈이 그 당시 금액으로 2억원,
두번째는충남도 경찰국 경제담당 근무자로부터 받아 낸돈 4억원,
세번째는 처남의 절친인 건설업자(사장 강동완)에게 빌려 주고 못받은 돈 받아 내기 ..등등이 있었다.
처남은 내가 받은 돈을 금방 찾아 가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일단 매형(내가)이 가지고 있으라고 하고는 며칠내에 다시 전액을 찾아갔다.
-. 직장 정문 앞에서 내게 찾아와
재직중이었던 한국조폐공사 옥천조폐창 정문 밖에서
본인이 저질른 잘못된 점을 사죄하러 왔다면서 나를 만나려고
승용차 안에서 밤을 지새운적도 있었고,
-. 대전 ↔ 옥천간 경찰초소 바리케이트도 안하무인격
또 한번은 통행 중인 모든 차량들이
충북 옥천시내 입구 경찰 초소의 바리케이트 앞에서
일시 정지하여 검문을 받고 가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일시정지 없이 그 비싸고 좋은 대형승용차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달리니,
옥천초소에 근무자들이 황급히 다음 세천 경찰초소에 연락을 취하여
바리케이트를 치고 달아난 차량을 잡으라고 하여
세천 초소에서는 근무자들이 바짝 긴장을 하고 대기중인데
역시 안하무인격으로 바리케이트를 차량으로 치고 내 뺏던 사고,
-. 차량 7중 추돌
지금은 MBC 대전방송국이 연구단지 내로 이전하였지만,
1980년대 당시 대전시 중구 선화동에 소재했던 MBC 방송국 앞 도로상에서
술에 취한 처남이 운전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며
좌우 운행중인 차량들을 따닥, 따닥..따닥.. 따닥...7중 추돌 사고를 낸 사건,
-. 이웃과 감정이 상하여 저지른 사고
밤 자정이 넘은 시간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아 감정이 좋지 않은 이웃 여관 주인를 찾아가
모임에서 술 한잔 걸치고
그 여관 앞을 지나다가 들어가 주인을 몇차례 찾았으나
종업원이 없다고 하자
현관에 있는 대형거울을 맨주먹으로 박살 내고 본인의 주먹은 피로 낭자된 사건.
-. 한 밤중 사냥총으로 모 신문사 기자를 향해 발사
어느날 밤 모임에서 술을 먹고 집 가까이에 도착했는데,
언제인가 시비가 붙어 말다툼을 한적이 있는 대전 모 일간지 기자를 우연히 만났다.
갑자기 본인 차량으로 가서
뒤 트렁크에 있는 사냥총을 꺼내 기자가 서 있는 위치에 가까이 오면서
사냥총을 발사해 대니 그 기자는 빨리 몸을 피하면서 경찰서에 신고하였고,
그 밤중에 총소리가 들려 신고를 받고 온
대전시내 4대의 패트롤 카(patrol car : 순찰차량)가 비상 소집된 사건,
-. 논산시 부적초등학교 앞 도로상 차량사건
처남은 며칠동안 동료들과 낚시놀이를 하고 돌아오던 중
논산시내 다방에서 일행과 함께 차 한잔씩을 나누고 난 다음,
그 동안 본인의 차량 운전하던 후배를 제끼고
본인이 대전까지 운전을 하겠다고 운전대를 잡아 운행하던 중
논산에서 대전 방향으로 약 5 ~ 10Km 내에 있는 부적면 파출소를 지나
부적초등학교 정문을 지나면서
S코스 노선상에서 서행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커브길을 과속하다가
승용차 뒷부분이 노변 보행자를 치며 길 언덕 아래로 떨어져
죽음으로 몰아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불의에 변고를 당하여
운명하신 분은 당시 부적초등학교 윤 ? 교장 선생님이셨다.
나는 이후, 사건 중재 및 마무리를 위하여
사고난 장소 인근 마을에 살고 계셨던 선생님의 삼오제가 끝난 후,
직장 운전주임 이우갑(당시 옥천조폐창 서무부 소속)님과
고인이되신 윤 교장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가
망인의 일가친척들이 내가 타고 온 차량 앞에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
"못 간다. 살려내라 !" ...,고 고함치고,
노변의 코스모스를 뭉치로 뽑아
나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등등, 태어나 처음으로 큰 봉변을 당했던 일들.
-. 탄원서 제출
처남은 말년에 허가없이 건물증축으로 구속된 일이 있었다.
면회를 가본적도 있지만 판사에게 탄원서 제출한 일과 보낸 편지.
참고 : 다음 페이지
-. 아내의 고통
위와 같은 십년 감수한다는 사건이 발생 될 때 마다
누가 앞에 나서서 이를 본심으로 해결하려고 한 사람이 없었다.
출가 외인라 하지만
친정 친부모님이 안 계시는 입장에 열 한살 아래 남동생이 주는 고통을
맏딸로 외면 할래야 외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나의 아내는
그때마다 함께하는 남편이라 미안도 하겠지만
어디에 진정으로 상의 할만한데도 없어
나인들 평범한 공기업의 직장인으로
위법된 사건에 대하여 법 질서가 체계화되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사건마다 부주의로 인하여 정상 참작할 만한 점이 도를 넘었으니,
협의를 해 보아도
해결의 요체는 우선 돈이요. 경찰서요, 검찰청이요, 나아가 변호사이니,
그것도 제대로 알아 주거나
앞장서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 찾기가 쉬운일은 아니었다.
여자의 몸으로 사건 해결을 위해 알만한 이의 줄을 찾아 동분서주하며
신경 쓰는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인 나도
일을 당할 때마다 아내가 밤잠을 설치며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일들을
함께할 수뿐이 없는 처지였다.
-. 정신병원입원 17일 동안 매일 면회를 간 아내
대전시 중구 목동에 소재한 을지병원 담당의사와 상의하여
경기도 용인시 근교 산속에 위치한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고 난후,
아내는 퇴원하는날까지 17일 동안
대전에서 용인 정신병원으로 매일 면회를 다녔다.
처남을 병원 남자 간호사의 입회하에 면회실에서 만나면
누나의 손을 잡고 다시는 술을 먹지 않고 그 동안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고,
본인의 지병(간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전념하겠다. 라고 통사정을 하였다고 한다.
결국 매일 받아 보는 참회의 편지와 면회에서 마주쳐 받는 마음은
아내의 마음을 약하게 할 수 뿐이 없었다.
-. 또 들은바에 의하면
돈에 욕심이 부풀어 오른 큰처남은 형제들과 선화동집 대청마루에서
재산(돈)에 관한 얘기가 오고갈 때 웃통을 벗어제치고
대형유리문을 맨주먹으로 때려 부수고 선혈이 주먹에서 주르르 흐르면서
조각난 큰 유리조각을 맨몸에 대고 배를 긋겠다고 눈을 부릎 떠 공격적인 엄포를 막무가내로 해 대도
이를 당한 형제들은
가정에 평화를 우선 생각하니 참고 참을 수 밖에 없는 일도 있었다 한다.
-. 내 집에 피신해 몇개월씩
큰처제 박정숙, 막내처제 박정애는 앞으로 살아 가는데 도움이 되겠끔
본인에 해당되는 상속재산 중 다소라도 큰처남으로부터 받기 위해
큰언니에게 의지할 수 뿐이 없어
내 집(당시 산성동 주택)에서 몇개월씩 지난적이 있었다.
장모님은 선화동 이웃에서 방을 얻어 한동안 지내신적도 있었다.
이후, 장모님, 큰처제, 작은처남, 막내처제 등은 각 1억원 정도의 돈을 받은걸로 알고 있다.
-. 아 ! ~
그 어찌 지난 일들을 일일이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을
지금 이글을 쓰는 시간에 생각나는 사건 사고만 기록하지만,
한편의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리석은 짓에 대한
철부지의 행위에 대하여 그때마다 바로 세우기 위해 진력을 다한 사실을
지금도 대전시내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다.
글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벌써 잃어 버렸을까 ?
□. 처남이 내게 베푼 승용차 "르망"
1987년 경 사회적으로나 직장에서 자가용 구입이 시작되던 때로 알고 있다.
처남은 내게 여러가지로 미안한 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마지못해 누나를 통해
대우자동차 생산 소형 승용차 "르망"을 당시 돈 630만원에 구입하여 내게 주었다.
고맙게 받았으나
정상적이며 건전한 생활을 했으면 하는것이 형제자매나 이웃의 바람이었다.
□. 처남은 운명하기 며칠 전부터
그 당시 본인이 살던 대전시 서구 둔산동 한아름 아파트에서
술을 먹고 몸을 가누기 조차 어려운 행태로
내가 살고 있는
오류동 삼성아파트 앞 잔디밭에 누워 큰누나를 불러내 하소연도 하며
말없이 몇날며칠을 그렇게 흐느껴 울며 울며 고통스럼을 내뱉었다.
□. 이혼
-. 남편이 약 15년간 돈을 탕진해 살길이 망막하고 죽을 병까지 들었으니,
어린 자식 3남매를 둔 여자의 마음이 어찌 그렇게 돌아 설 수 있는지 ?
부부는 시작이 잘못되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처남의 인생 말미인
운명하기 약 6~ 8개월(?) 전에 매몰찬 오뉴월 찬서리 같이 고개를 돌려 이혼하였다.
-. 그동안 20 여년 가까운 지금까지
처남댁은 모성애가 없는 여성인지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전화 한통화도 없이 부지거처로 갔으니 향후에도 만나 볼 수 없는 처남댁이지만,
남편은 죽고 없지만 내가 난 자식 한번보고 싶지도 않은지 ?
만났다 헤여지면 이렇게 두부(豆腐) 모 짜르듯 남보다 못한 남남이 되는것인지 ?
-. 졸지에 고아가 된 어린 3남매의
하나로부터 열까지 생활에 신경을 써야하는 이가
바로 아내일 수 뿐이 없었고,
가진것이 없는 입장에
이제까지 지나온 세월을 어찌 다 말 할 수 있을까 ?
큰딸 효정(孝庭)이 17세에,
작은딸 효준(孝俊)이 15세,
그리고 외아들 근휘(根輝) 9세에
큰처남이 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부잣집 손자, 손녀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지금 33세인 큰 딸은
시집 가서 쌍둥이 아들을 두고 넉넉치는 못하지만 재미있게 살고 있으며,
31세인 두째딸은
활발하고 똑똑한 1남1녀를 두고 작은 고모부가 하던 사업을 물려 받아
고종사촌 김도한(작은 고모부 장남)과 협조하여 대덕구 오정동에서 장사에 전념,
25세인 외 아들은
배재대학교 중퇴, 육군 만기전역 후,
한때 어려운 경영으로부터 "(주)쏠리트"에서 인수 받아
정상적인 경영 상태로 돌아간 (주)팬택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
-. 어찌되었건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고생은 하였지만
건강하고 노력하면 목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 는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
아직은 그냥 그냥 살아가고들 있다.
-. 처가는 부산
해운대
처남은 나의 기억으로 장인이 운명하신지 5년여 만인 22세에
두살 위인 부산 해운대 출생 이미숙(1957년생) 과 1981년에 결혼 한것으로 알고 있다.
내게 처남댁은 예쁘고 얌전했으며
처가의 형제들은 장인의 맏며느리라고 모든이가 매사를 이해하고
친정의 큰 올케라고 대접해 주었다.
결혼 생활 1981년부터 1998년까지
두 사람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한 많은 가정생활을 했었다.
한때는 처가가 대전으로 이사를 하여 약 3년간
처남이 마련해 준 사업을 고인이 된 사돈(처남의 장인)이 직접 참여 한적도 있었고,
처남의 작은 처남은
생존시 처남의 가까운 지인 건물의
대형 병원(둔산동 한화 갤러리 백화점 옆 소재) 사무장으로 근무하면서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번도 생질들을 찾은바가 없다...,
2015. 12. 23(수) 대전에서 이명종
위 사진 설명 :
-. 1992. 6월 어느날
처가 식구들과 함께 제주도 나들이에 갔을 때,
호텔 앞에서 찍은 큰처남 가족입니다.
-. 좌측으로부터 박효정. 큰처남 박영수. 박효준. 처남댁 이미숙(李美淑)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1992. 6월 어느날,
제주도 숙소인 호텔 앞에서
좌측에 사랑하는 조카딸과 아내 박정자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1992. 6월 어느날 제주도에서
좌측에 아내와 큰처남댁 이미숙이 다정한 모습의 사진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1992. 6월 어느날 제주도 제주시 호텔 발코니에서
좌측으로부터 이승수, 박효준, 박효정, 이장수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좌측으로부터
박효준. 새장모님 오연애(吳然愛). 박효정. 아내 박정자. 큰처남댁 이미숙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1970년 1. 10일 결혼한 나는
1970. 5월 따뜻한 어느날 처가 식구들과 동학사에 소풍을 갔었다.
-. 그 시절 장인 어른은 봄, 가을을 이용해 가족은 물론
공장 직원들과 자가용 트럭에 먹을거리를 준비해 놀이를 가곤했었다.
-. 앞줄 좌로부터
11세인 큰처남 박영수, 처삼촌댁 셋째 박충수, 10세인 작은처남 박태수,
막내처제 박정애, 큰처제 박정숙, ? ,
-. 뒷줄 좌측으로부터
처고모님, 썬그라스 낀 장인 박팔복 사장, 새장모님 오연애, 처숙모님(박유복 처),
아내 박정자, 그리고 공군 중위 이명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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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내용이 선생님 완전 가까운 친척? 아니 가족이라해야 더 맞을듯 싶은데 그런일을 보고 듣고 겪으시며 직접 해결까지 하고 다니셨군요~~내용 읽다보니 완전 생판 모르는 제가 다 속이 타고 속상하고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