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계 공포 소설과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전설적인 흡혈귀 소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1954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핵전쟁 이후 변이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가 모두 흡혈귀가 되고 유일하게 인간으로 남은 주인공이 홀로 그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지난 50년 동안 공포 소설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온 이 작품은 고고한 귀족 흡혈귀나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좀비 대신 서로 전염시키는 대규모의 흡혈귀 병이라는 섬뜩한 아이디어를 최초로 선보였다. 이러한 설정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새벽의 저주> 등 공포 영화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비롯하여, 최근 인기를 끈 <28일 후>, <레지던트 이블>, <블레이드>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화에 사용되었으며,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좀비 돌풍을 일으킨 <바이오 해자드>, <하우스 오브 더 데드> 등 인기 게임들의 주요 설정이 되기도 했다.
지구에 핵전쟁과 세균 전쟁이라는 대재앙이 지나간 후, 전 인류가 낮을 싫어하고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돌연변이 흡혈귀로 변한다. 주인공 네빌은 운좋게 살아남았지만 아내와 딸, 주변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 흡혈귀가 된 암울한 상황에 처한다. 인류가 멸망하고 흡혈귀가 날뛰는 세상임에도 네빌의 하루 일상은 평온하던 시절과 다르지 않게 반복적이며, 죽을때까지 지속될 지긋지긋한 일상은 차라리 죽거나 흡혈귀가 되는 것보다 더 괴롭고 암울하다. 리처드 매드슨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 1950년대 미국의 중산층 남성이 전쟁 후 겪은 일상의 공포를 패러디하며, 흡혈귀들의 세상에 혼자 남은 인간으로서 네빌이 보여주는 마지막 선택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관념들이 뒤집히는 미래상을 암시한다.
저자 리처드 매드슨 소설가
공포 소설, SF, 판타지 소설에서부터 범죄 소설, 서부극, 서스펜스, 로맨스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1926년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이혼을 했지만, 그 시기에도 산문과 시 등을 브루클린의 지역 신문에 실을 정도로 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44년 보병으로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미주리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중 환상 소설에 심취하여 「판타지 & SF」에 '남자와 여자의 탄생'이라는 첫 작품을 싣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직접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일반 소설을 많이 집필하였다. 대본 작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해, 자신의 작품 외에도 에드거 앨런 포, 쥘 베른, 레이 브래드버리, 브람 스토커 등의 작품을 영상으로 옮겼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비롯해서 서른 개 이상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특히 알코올 중독을 다룬 <살의의 아침(The Morning After)>은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또한 세 차례나 영화화되었으며, 가장 최근작인 윌 스미스 주연의 2007년 판은 한국에서 개봉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마르키 드 사드와 《오즈의 마법사》저자인 L. 프랭크 바움의 삶을 영화로 옮기기도 했으며, <환상특급>에 주요 각본가로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왔다. 수상경력 또한 화려해 《시간 여행자의 사랑》을 통해 세계판타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 외에도 미국작가협회상, 휴고상, 에드거상, 크리스토퍼상, 공포소설작가협회상, 리더콘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84년에 출간된 《리처드 매드슨, 그가 바로 전설이다》는 리처드 매드슨과 그의 작품 세계를 다루고 있다.
핵전쟁 이후 모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가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이자 ‘흡혈귀’인 상태로 변하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 네빌이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인다. 몇 년째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지 못한 채, 밤마다 몰려와서 그의 집 앞에서 울부짖으며 신선한 피를 갈구하는 ‘언데드’들에 맞서 십자가와 마늘, 거울 등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낮에는 햇빛을 피해 쉬고 있는 언데드들을 찾아 말뚝을 박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네빌에게는 시간이 많다. 지나치게 많다. 절대적인 공포와 고독에 침잠되어가는 그는 애써 이 언데드들의 정체와 기원에 대한 정보들을 취합하려 노력한다.
“그건 착각이어야 했고, 헛소문이어야 했다. 결코 실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과학이 전설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전설이 과학을 통째로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네빌은 언데드에게서 추출한 혈액 견본을 통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병원균을 관찰한다. 불가해한 전염병의 정체가 신의 저주인지 의아해하면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고작 ‘흡혈’ 박테리아에게 잡아먹힌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허무함을 느낀 네빌 앞에, 뜻밖에도 절뚝거리는 개 한 마리와 젊은 여성 루스가 등장한다.
『나는 전설이다』의 언데드는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에 등장하는 부두교의 희생자로서의 좀비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신선한 피를 갈망하고 햇빛과 십자가 등을 두려워하는 등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로부터 익숙해진 흡혈귀(뱀파이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박쥐나 늑대 등)로 모습을 바꿀 수 있고 불멸의 창백한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는 뱀파이어의 특징은 간데없다. 대신 시체와 다를 바 없이 피부가 썩어들어가고 악취를 풍긴다. ‘살아 있던 시절’의 기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지만(그들이 햇빛과 십자가 등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네빌은 이렇게 추측한다. “신에게 버림받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까다로운 신체적 요구를 견뎌내야 하는 위태로운 존재들”이 “전설과 미신의 오역”이라는 익숙한 옛이야기를 떠올리며 자동적으로 그것에 반응하게 된 심리적 요인일 뿐이라고), 그것을 되살리거나 기억하면서 다시금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오려 노력하는 대신 인간적인 특성을 무엇이든 파괴하고자 하는 야만스러운 포식자의 특성을 보인다. 무기력한 골렘이 아닌, 나름의 지능을 갖추고 있는 생생한 적. 이 설정은 이후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68년 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부터 시작하는 현대적 좀비의 기나긴 목록을 통해 점점 완성도를 높여간다.
리처드 매드슨이 새롭게 그려낸 좀비의 특징은, 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50년대의 미국을 사로잡았던 전쟁(특히 핵전쟁)에 대한 몸서리쳐지는 공포심과 ‘빨갱이 콤플렉스’라는 히스테리가 온갖 SF/판타지/호러 소설 속 다양한 형태와 증상으로 등장했던 것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라든가 리처드 매드슨의 또 다른 걸작 『줄어드는 남자』 등이 포착했던, 위험한 ‘외부’가 어느새 ‘우리 중 하나’로 스며들거나 혹은 다른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자신만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이되어가며 전혀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50년대-미국-남성’의 불안과 신경증 말이다.
『나는 전설이다』의 중후반부로 접어들면, 네빌은 불현듯 자신이 언데드와 더이상 구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두려워한다. “희망보다는 살인이 훨씬 더 쉬운 세계”라는 걸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되면서(밤에는 그들이 네빌을 사냥하려 시도하고, 낮에는 네빌이 그들을 사냥한다)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정상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의혹으로 바뀌는 것이다. ‘정상인 나’는 실패하고 ‘비정상인 그들’이 성공한 걸까? 결국 그는 완전히 전도된 상황을 맞닥뜨린다. 언데드가 정상이고, 그는 반대의 존재인 것으로. “경외,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그렇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벌이고 천형이었다.” 지금까지 ‘정상’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순간, 살아 있는 인간을 숙주로 삼는 ‘기생충’이 아니라 그 자신들이 스스로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돌연변이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 그들이 결정한 그 새로운 존재의 기준 앞에서 ‘최후의 인간’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나는 전설이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당신 역시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거나 혹은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