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 짓 말: 좋은 글을 되새기며
왕이 한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니, 절망감에 사로잡힌 죄수는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못된 왕아!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영원히 허우적거려라."
이때 한 감옥으로 호송하던 신하 중 한 사람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보시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죄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소?"
신하들이 돌아오자 왕이 물었습니다.
"그래, 죄인이 잘못을 뉘우치던가?"
그때 죄수의 말을 가로막던 착한 심성의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예!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폐하를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했습니다."
신하의 말에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죄수를 살려주라고 명령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다른 신하가 말했습니다.
"폐하! 아닙니다. 그 죄수는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폐하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신하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하는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안다. 그런데 나는 저 사람의 말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폐하, 어째서 진실을 마다하고 거짓말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십니까?"
왕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네 말에는 사람을 미워하는 악의가 있구나.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분란을 일으키는 진실보다 더 나은 법이니라."
왕은 결국, 착한 신하의 말에 탄복하여 죄수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영국 속담에 거짓말에도 새빨간 거짓말과 하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새빨간 거짓말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속이려는 나쁜 의도가 숨어 있고, 하얀 거짓말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좋은 의도로 사람을 살리는 선한 거짓말입니다. 둘 다 분명히 거짓말이지만, 마음은 선과 악이 갈리는 극과 극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은 악의에 찬 진실보다도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깃든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이 깃든 말, 아름다운 말은 말하는 사람도, 말을 듣는 사람도 행복하게 합니다. 비록 자신이 거짓말장이가 되더라도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순간에 거짓말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닙니다. 선한 중심에서 나오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열매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세상을 빛으로 변화시킵니다...
기쁘고 행복한 오늘입니다!
샬롬?
***맥아더장군과 고(故)신동수(辛東秀)일등병
"6월은 호국보훈의 달"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유공자와 유족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보훈가족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슴깊이 간직 하시기를 바랍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이라 나라를 구한 용사 이야기 하나 소개 하겠습니다.
6.25 전쟁의 승리는 별을 단 내로라는 유명한 어느 별을 단 모 장군들의 훈장이 아니라, 벙커(bunke)를 "목숨을 걸고 사수했던 말단의 한 일등병 병사였어야 한다"라는 실제 이야기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전황 파악차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벙커를 지키고 있는 어느 한국말단 병사를 우연히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 맥아더, 전세가 이렇게 밀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도망 안가느냐?
○> 한국병사, 후퇴하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 감동한 맥아더, 지금 내가 들어줄수 있는 소원을 하나 말하라. 들어 주겠다.
○> 한국병사, 충분한 실탄과 총을 지원해 주십시오.
○> 맥아더, 자신을 이 벙커에서 빼달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맥아더에게 이 한국군 병 사의 뜻밖의 말은 충격적이고 감동이었습니다.
❤ 이 말단 병사의 말 한마디에 감동한 맥아더는 막사로 돌아와 즉시 이렇게 지시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이 나라(대한한국)를 지켜주어야 한다." ❤
그래서 이 말 한마디에 인천상륙작전은 재빠르게 속도전으로 바꿔 진행되었고, 수만명의 미국병사가 한국을 위해 전사해야만 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다른 나라가 한 나라를 위해 수만명이 죽었다는건, 미국 역사의 기록은 물론 한국 역사상에도 전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은 혈맹 보다 더 진한 우정으로 맺어준 인연이 되게한게 바로 6.25전쟁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 일화는 사실일까요? 사실입니다.
2006년 취재 기자 허영한이 취재한 내용입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서 상처를 입어 다리까지 절단된 "고(故)신동수(辛東秀) 일등병" 이야기 입니다.
○> 맥아더,
“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는가?”
○> 병사,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게 군인 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1950년 6월 29일,
당시 스무 살의 한 일등병은 서울 영등포에 있던 진지(陣地)에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전쟁이 터진지 나흘째, 이미 한강 이북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그곳은 남한의 부대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강 방어선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날아와 전황을 돌아보던 참이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 주겠다.” 이 군인에게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대로 맥아더장군은, 곧 바로 한국전 참전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맥아더 장군이 당시 한국군 병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참전 장성 회고록 등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째 묻혀져 있던 이 일등병의 존재가 최근 밝혀졌습니다.
신동수(辛東秀·77, 2006년 취재당시 나이)옹입니다. 그를 찾아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오게 해서 어쩌나. 다리가 이래서….”
그는 왼쪽다리를 절었습니다. 양말에 가려졌지만, 한눈에도 의족(義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쁨인지, 고통인지 모를 옛 전투 이야기를 시작하자, 신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습니다.
그가 속한 부대는 백골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였습니다. 6월29일 이들은 영등포구 양화동의 인공폭포공원 인근에 진지를 편성해 놓고 있었습니다. 다른 대대는 물론 같은 대대 다른 중대도 후퇴 해버린 외로운 싸움 이었습니다.사흘째 굶고 있던그때였습니다
“4명이 지프에서 내리더라고. 처음에는 소련군인줄 알고 쏘아 죽이려고 방커에서 쫓아나갔어요. 하지만 정모의 마크가 소련군 것과 다른데.......
통역이 그분이 사령관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사령관이 뭐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대화가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연막탄 2개와 대공 표지판을 선물로 줬습니다.
그리곤 곧 그는 잊어 버렸다고 합니다.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진격한 인민군의 총포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는 오로지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요.”라고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사흘을 더 버텼습니다.
“결국 후퇴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며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죠. 갑자기 다리가 오그라들더니 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고도 150m를 뛰었어요. 살기 위해 아무 집이나 찾아가 부뚜막 아궁이에 숨었는데, 착한 주인이 온몸을 닦아주고 빨간 헝겊을 찢어서 군 치료소에 데리고 가주더군요.”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총탄에 맞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무릎에선 구더기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다리를 절며 절며 찾아간 강원도 춘천. 하지만 남동생은 형을 찾으러 가겠다며 인민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못 만난 세월이 무려 56년이 됐습니다.
당시 10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7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7일 동안의 처절한 혈전 덕분에 인민군의 서울 함락은 늦어졌고, 지연전을 위한 재편성, 유엔군의 조기 전선투입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의 잘린 다리가 나라를 구한 것 입니다.
“6월 25일만 가까워오면 내가 묻어준 동료들, 내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요. 군번도 없이 죽어간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그걸 알고 있나요?”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가 있는 세상에 살라고 산화하신 미군, 다른 나라의 외국군인들, 한국 순국 장병 용사님들이시여.......!
대신 이렇게 삼가 호국 영령님들의 천국 왕생을 빌며 큰절 드립니다.
***찐다. 덥다. 이 아침.
퇴계 이황과 쌍취헌 권철의 만남이 그립다.
퇴계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양성한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일찌기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지낸 바 있는 쌍취헌 권철(雙翠軒 權轍)이 한양에서 퇴계를 만나고자 도산서당을 찾아 내려오게 되었다.
권철은 그 자신이 영의정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인 데다가 그는 후일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만고명장(萬古名將)의 이름을 떨친 권률(權慄) 장군의 아버님이기도 하다. 권률(權慄) 장군은 선조 때의 명재상(名宰相)이었던 백사 이항복(白沙李恒福)의 장인이기도 했다.
서울서 예안까지는 5백50리의 머나먼 길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이 머나먼 길에 일개 사숙(私塾)의 훈장을 몸소 찾아 온다는 것은, 그 당시의 관습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철은 관계(官階)를 초월하여 大學者인 퇴계를 친히 방문하기로 했던 것이다.
권철은 초헌(軺軒,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을 타고 국도를 따라 안동까지 내려오는 데는 별로 고생을 하지 않았다.
권철 일행이 도산서당에 도착하자 퇴계는 동구 밖까지 예의를 갖추어 영접하였다. 그리하여 두 學者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식사 때가 큰 문제였다.
끼니 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은 보리밥에 반찬은 콩나물국과 가지잎 무친 것과 산채 뿐으로 고기붙이라고는 북어 무친 것 하나가 있을 뿐이 아닌가.
퇴계는 평소에도 제자들과 꼭 같이 草食생활만 해 왔었는데 이 날은 귀한 손님이 오셨기 때문에 山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북어를 특별히 구해다가 무쳐 올렸던 것이다. 평소에 산해진미만 먹어오던 권철 대감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 밥을 도저히 먹어낼 수가 없어서 몇 숟갈 뜨는 척 하다가 상을 물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는 다음 날 아침에도 그와 똑같은 음식을 내놓았다.
권철 대감은 이날 아침에도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어서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몇 숟갈 떠먹고 나서 床을 물려버렸다. 주인이 퇴계가 아니라면 투정이라도 했겠지만, 상대가 워낙 스승처럼 존경해 오는 사람이고 보니 음식이 아무리 마땅치 않아도 감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권철 대감은 도산서당에 며칠 더 묵어가고 싶어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더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은 예정을 앞당겨 부랴부랴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권철 대감은 작별에 앞서 퇴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만나고 떠나게 되니 매우 반갑소이다. 우리가 만났던 기념으로 선생은 좋
은 말을 한 말씀만 남겨 주시지요"
"촌부가 대감 전에 무슨 여쭐 말씀이 있겠나이까, 그러나 대감께서 모처럼 말씀하
시니 제가 대감에게서 느낀 점을 한 말씀만 여쭙겠습니다"
퇴계는 그렇게 전제하고 옷깃을 바로 잡은 뒤에 다시 이렇게 말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지(陋地)를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식사대접을 못해드려
서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 前에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기면 더 할 나위 없는 성찬이었읍니다. 백성들이 먹는 음식은 깡보리밥
에 된장 하나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되옵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要諦)
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
느 백성이 관의 정치에 심열성복(心悅誠服)하겠나이까. 믿고 따르겠습니까? 대감
께서는 그 점에 각별히 유의하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그 말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충언이었다.
퇴계가 아니고서는 영의정에게 감히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직간(直諫)이었다.
권철 대감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다.
"참으로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서도 들어볼 수 없는 충고이십니다. 나는 이
번 행차에서 깨달은 바가 많아 집에 돌아가거든 선생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도
록 노력하겠습니다."
성인이 능지성인(能知聖人)이라고나 할까. 권철 대감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퇴계의 충고를 거듭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오자 가족들에게 퇴계의 말을 자상하게 전하는 동시에 그날부터 퇴계를 본받아 일상생활을 지극히 검소(儉素)하게 해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정치권 중에는 퇴계 선생처럼 직언을 하는 분도, 권 정승처럼 직언을 받아들일 줄 아는 분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시궁창에서 개싸움만을 하는 시레비 잡놈들뿐이니. 그래서 국민은 불안하다. 나라복이 지지리도 없다.
오늘 이 아침 옛 선현의 아름다운 행적이 더욱 그리운 것은 비단 푹푹 찌는 더위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 ]
^ ^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세계 속의 강국이 되었을까 ~ ~?
1.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귀족의
나라로 인정되는 나라다.
2. 독서 제1등 국이다. 이는 객관
적인 사실이다. 일본을 배척하기엔
배울게 너무 많은 나라다.
3. 일본인은 국제사회에서 1등 국민의
대접을 받고, 품질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는 책임 있는 국민이다.
4. 일본인들은 국가를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한다.
5. 일본인들은 자기가 몸담았던
조직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다.
6. 일본인들은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래서 원자탄을
만들어 일본국민을 학살한 미국에
무릎을 꿇고 미국을 배웠다.
7. 미국을 배워서 미국을 이겼다.
8. 우리는 미국을 배워서 미국을
이기는 일본인들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일본을 증오하고 무조건
미워만 했습니다. 미워했음이 우리
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1900년대 초만 해도 약육강식 철학이
유행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일본은 강자였고,
우리는 못난 약자였습니다.
지금처럼 당파 싸움만 하다가
망한 것입니다.
일본은 문호를 개방하고 과학을
수입하고 실용주의 철학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문을 닫고 우물안
자존심만 내세우며 관념주의
말싸움에 밤과 낮을 지샜습니다.
못나서 당해놓고 우리는 잘났던
일본을 지금까지도 원망하고
증오합니다.
왕건이라는 드라마를 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6.25를 상기해 보십시오.
지난 수천 년간 우리 민족이 동족
상호간에 저질렀던 만행 중에
일본인 이상으로 가혹했던 사례들이
과연 없었던가요?
일본이 우리보다 야만적이냐 아니냐
잘났느냐 못났느냐는 지금의 일본인과
지금의 한국인들을 보면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보다 몇 배나 잘났습니다.
증오로부터는 창의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일본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오죽 못났으면 약육강식시대에
일본에게 먹혔을까부터 참회해야
합니다.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잘난 것 딱 한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건강 약품
하나를 만들어도 동물을 상대로
실험을 합니다.
인명은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원자탄을 만들어 그
실험을 일본인들을 상대로 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방사능이
무엇입니까?
그 방사능을 자식에게 대물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당했다면 미국은
지금도 우리의 철천지원수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미움을 배움으로 승화 시켰습니다.
일본인은 잘난 미국인을 배우고,
배워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잿더미를 쓸어내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공장 문 밖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들보다 잘난 미국을 배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미국인들은 그런 일본인들을 멸시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죽었다 깨나도 미국을
따라올 수 없다. 문을 활짝 열고 다
보여줘라".
1957년 당시 덜레스 미 국무 장관이
수많은 일본 군중을 향해 미국의
우월감을 표현했습니다.
"친애하는 일본국민 여러분! 일본은
기술면에서 영원히 미국과 경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세계
최고의 손수건과 훌륭한 파자마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을 미국에 수출하려
하지 않습니까??"
감히 미국을 흉내 내겠다며 공장
문을 기웃거리는 꼴사나운 모습들을
멸시하는 연설문이었습니다.
1957년에 미국에 건너간 볼품없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비웃는
말이 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세계 GNP의 54%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생산 기지가 미국에 있었고, 세계의
신제품은 모두가
"MADE IN U.S.A."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의우월감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모든 제품을 쓰레기로
멸시했습니다.
이를 NIH 증후군
(Not Invented Here Syndrome)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모욕을 무릅쓰고 일본인들은
미국으로부터 줄줄이 선생님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1950년에는 그 유명한 데밍 박사를,
52년에는 쥬란 박사를, 54년에는
피겐바움 박사를 모셔다가 과학 경영,
시스템경영, 통계학적 품질관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데밍상(Deming prize)
을 만들었습니다.
일본이 오늘날의 품질 1등 국가로
우뚝 솟은 데에는 미국인 스승 데밍
박사가 있었다는 것을 세계에
기념했습니다.
우리를 뒤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외국을 배척하는 속 좁은 국수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우리라면 우리를
원자탄으로 죽인 원수의 나라사람,
미국인을 스승으로 기념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을 모방하자" (Copy the West),
"미국을 따라잡자" (Catch up with the West).
일본인들은 미국을 추월하려고
정열을 짜고 지혜를 짰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드디어
일본이 생산기술과 품질관리에서
미국을 앞섰습니다.
그때부터는 한동안은 미국이 일본을
배우러 갔습니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조롱 섞인 연설이 있은 이후25년,
1982년에 승용차에 대한 미국인의
고객 만족도 조사에서 일본 승용차가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습니다.
반면 미국 차는 겨우7위를 차지했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차는 미국
차가 아니라 일본차였던 것입니다.
일에 몰두 하고 따라잡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일본 놈들"이 한 일이면 이런 것도
보기 흉한 것입니까? 일본만 미워하는
게 아니라 최근에는 미국까지도
미워하는 사람 수가 늘고 있습니다.
잘난 사람을 못 봐주는 마음, 증오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습니까?
도대체 이 나라는 왜 이렇게 답답하고
따분합니까? 나보다 잘 난사람도
적이요, 우리보다 잘난 나라도 적이면
우리는 누구로부터 배우고 누구와
더불어 살아 가야 한다는 겁니까?
외세를 미워하고 국제사회 에서 생떼를
쓰면서 주민을 탄압하고 굶어 죽이는
북한과 손잡고 살아야 하나요?
증오심을 부추기면 단합은 시킬 수
있어도 발전은 할 수 없습니다.
못난 사람끼리 어울리면 모두가 못나
집니다. 정말로 무서운 사람은 증오심에
불타는 북한사람이 아니라 증오심을
배움으로 승화시켜 끝 내에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본 사람입니다.
마음에 있는 증오심을 버리십시오.
내가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어찌
감히 남의 것을 탐내십니까?
어째서 요사이 부쩍 이러한 몹쓸
풍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겁니까?
젊음은 당신의 미래를 위해 쓰라고
주어진 것이지, 증오심을 키우고
혈기를 부리라고 주어진 게 아닙니다.
혈기를 부리고 증오심을 키워 보십시오.
당신의 인생은 40 이전에 폐가로
변할 것입니다.
잘 나가는 일본인, 잘 나가는 미국
인들은 부모가 재산을 나눠준다 해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가 제게 재산을 주시면,
거기에 제가 무엇을 더 얹는다 해도
그건 제가 이룬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저는 무슨 프라이드로 세상을
삽니까? 저의 것은 제가 이루겠으니
아버지가 이루신 것은 사회발전을
위해 내놓으십시오.》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노후를
준비하십시오. 노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지금부터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다 같이 조국의 앞날을
위해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반성하고
다짐해 보기로 합시다.
2023.03.08.수.아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