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름 무더기에서
시편 113:1~9
오늘 읽은 시편 113편도 “할렐루야”라는 말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입으로 찬양하는 뜻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1-3절 말씀을 읽어보십시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 할 지로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자연히 우리 마음에서 찬양이 나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누구에게나 남편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자랑하면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자랑이 나옵니다.
교인이 목사를 사랑하면 누구에게나 목사 자랑을 합니다. 목사가 교인을 사랑하면 어디가나 교인 칭찬하기에 바쁩니다. 사랑이 없으면 칭찬과 자랑 대신에 비난하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도 상통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차고 사랑으로 넘쳐서 자연히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감사와 찬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찬양은 우리의 삶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한국교회가 많이 부흥이 되었는데 외국인들이 한국교회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찬양을 잘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열심히 찬양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외국인들이 하는 찬양을 들어보면 같은 수의 사람이 모여서 찬양할 때 한국교회의 찬양하고는 비교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배 시간에 회중이 부르는 찬송의 분위기를 통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예배 시간 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 말씀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 보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의 생활에서 찬양을 제해 버리면 입술의 열매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입술에서 찬양의 열매를 맺게 되면 다른 방면에서도 많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 입술에서는 찬양의 열매만 맺게 해달라고 하십시다. 성도의 입술에서 원망의 열매, 시비의 열매, 비난의 열매, 욕설의 열매, 분노의 열매를 맺으면 엄격히 말해서 성도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는데” 성도들도 마땅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동안 우리 입에서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까? 만일에 찬양의 열매를 맺지 못했으면 우리의 입술의 부정함을 회개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 입술의 정결함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있으면 여러 가지 방면으로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슬프던 마음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약하던 사람이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일에 능률이 오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찬양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그러므로 적극적인 성도의 생활의 발로입니다.
누가 찬양해야 합니까?
그 범위는 아주 넓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그 주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종들은 주인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세요.
2절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지금만이 아니라 영원까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우리 생의 끝까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당대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도 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세대가 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3절에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모든 데서부터 해야 할 일입니다. ‘해 돋는 데’라는 말을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빛을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빛의 아버지에게 빛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계에서 찬양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동에서 서에 이르기까지, 해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인자하심의 증거와 결실이 명백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서 빨리 이 복음이 세계 만방에 전파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복음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과제입니다. 왜 우리가 많은 비용을 들여서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합니까?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아직도 세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할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인류가 하나님께 찬양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물건에게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러므로 온 세상에 복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다 이르게 될 때 문자 그대로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게 되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본문 4, 5절을 보십시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우리는 찬양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높으시며 그 영광 또한 높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십니다.” 세상의 왕들이 아무리 굉장하다고 해도 하나님보다 높을 수 있습니까? 저희 백성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다 모은다 해도 하나님은 그 위에 계십니다.
이사야 40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에게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다”고 하였습니다.
17절에는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 앞에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 광활한 우주를 보세요. 수십, 수백, 수천 억의 뭇별을 바라보세요. 이 지구는 그 중의 하나입니다. 문자 그대로 물통 속의 한 방울의 물이라고 해서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이나 인도가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저울의 티끌 같아 그것 때문에 저울의 무게에 관여할 정도가 아닌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이렇게 위대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 위에 초월하여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감탄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입니까? 세상의 열 왕과 모든 지배자 중에 누가 그와 같습니까? 세상에서 영리하고 축복 받은 영혼 가운데 누가 하나님보다 높습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동등시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비교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며, 비교될 수 없으시며, 너무 위대하신 분이므로 찬양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며 올바르게 찬양하도록 이끄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이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천지에서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늘에 높이 거하시며 땅을 살피시려고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스스로 높이시고 스스로 낮추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나라 위에 모든 하늘 위에” 있으시지만 아무 것도 그에 의해 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합니다. 욥기 36장 5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사람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이 좀 있는 것 같으면 교만해서 없는 사람을 멸시하기 쉽습니다.
돈이 좀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공부 좀 해서 지식 얻으면 공부할 기회가 없는 사람을 천대하고, 권력이 있으면 권력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재간이 좀 있으면 교만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고, 심지어 얼굴이 좀 잘 생기면 교만해서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을 비웃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면서도 낮고 천한 우리 인간을 멸시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늘에서 만물을 살피시며 생명을 보존하시며 동작을 지휘하시며 천사들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겸비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은혜를 입지 않으셔도 되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만물을 살피시며, 인자를 찾으시며, 그들을 보호하고, 저희의 문제를 지배하며 다스리시고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을 감찰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겸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심으로 땅을 충만케 하며 인내로서 선을 행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비천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살피시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보살피시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겸비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는 “잃은 자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신 사실 또한 겸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 말씀한 대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하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큰 것들을 보실 뿐 아니라 가장 비천한 것과 또 불쌍한 사람들을 굽어보시고,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이 자연의 과정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기대하지 못한 일까지 행하기를 기뻐하십니다.
7, 8절을 보세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시려고 하실 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장 비천한 것을 택하여 그 일에 사용하시며 저희들 스스로도 가장 비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기드온은 타작 마당에서 나왔습니다. 사울은 당나귀 찾는 일에서 불려 왔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들판의 양치는 목동에서 불려 세워졌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낚는 데서 사람 낚은 어부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D. L. 무디는 구두수선공의 자리에서 불려져 미국 역사상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바울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어리석은 자를 들어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때때로 빈곤과 수치의 무거운 짐 아래서 오랫동안 신음해 온 그의 사람의 뛰어난 경건과 인내에 보응 하십니다. 보세요. 청년 요셉의 덕망이 증명되었을 때 감옥의 진토에서 일어나 문자 그대로 “방백들과 함께”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의 지혜를 얻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응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름 무더기에서 우리를 높이 드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이렇게도 놀랍습니다. 높은 자가 낮아지게도 하시며 낮은 자가 높아지게 하십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게도 하십니다. 종들이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다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서 가문과 문벌을 조롱하시며 때로는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영예와 위엄을 망가뜨립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조롱하며 멸시하는 자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택하십니다. 거름 무더기에서 높이 들어 방백들과 함께 세우십니다. 이것은 우리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이나 무식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장애를 받아서도 안되고 주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이 어려운 자리에 있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령의 상태가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있다고 해도 상관할 것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주님께 오면 됩니다. 내 심령이 가난한 대로 주님께 오면 주님은 우리에게 넉넉하게, 만족하게 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심령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졌습니까? 더러운 그대로 주님께 오면 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고 계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쉬임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겨 주소서
4.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 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아멘
주님께로 나오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름 무더기에서 들어 세우십니다.
거름무더기는 무가치한 것들을 던지는 곳입니다.
물건이 쓸모 없게 되었을 때, 아무 가치가 없어졌을 때 거름무더기에 던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거름무더기에 던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이 미칠 때 가치 있는 존재로 바꾸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려 세상에서 버림받은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날 때 그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셔서 가치 있게 사용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세상에서 버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때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복음을 전하는 가치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에게는 가치 없는 존재란 없습니다. 그의 손에 들리기만 하면 마른 막대기라도 가치 있게 사용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다 무가치한 존재들이지만 이 시간 능력의 주님의 손에 잡혀서 가치 있게 사용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름무더기는 영멸의 장소입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은 소망 없는 우리에게 소망을 안겨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고 비웃는다고 해도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한 절대로 망하지 아니합니다. 6.25 전쟁 후에 어느 영국 신문 기자가 한국을 다녀가서 “한국에서 소망을 찾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고 해서 우리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든 상관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아니하고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장미꽃이 쓰레기통에서도 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 민족이 폐허 속에서 얼마나 발버둥쳤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세계 속에서 인정을 받게 되고 이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 것을 생각하면 감격스럽습니다. 세계 기능올림픽에서 연패를 했습니다. 체육 면에서도 한국이 무시할 수 없는 나라로 부상했고, 86년 아시안 게임, 88년 세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한국 교회는 세계가 바라보는 교회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 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한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거름무더기에 소망의 햇빛이 비쳐옵니다.
거름무더기는 유해한 물건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회를 좀먹고 파괴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버섯과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도 버려 두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의사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고자 오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고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온 머리가 병들고 온 마음이 상하여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처 자국과 종기 투성 이라고 해도 우리 주님은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이 자리에 남의 물건을 훔치며 사는 분이 오셨습니까? 남의 생명을 빼앗은 분이 오셨습니까? 술집에서 웃음을 팔고 몸을 팔며 사시는 분이 오셨습니까? 남의 남편을 빼앗아 가정을 파괴한 작은 부인이 오셨습니까? 남의 재산을 손해 입힌 사기 친 사람이 오셨습니까?
이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며 국가의 비밀을 이북에 전하기 위해 파송된 간첩이 오셨습니까? 예수님의 가슴에 넘쳐흐르는 그 거룩한 피는 어떤 참담한 죄라도 다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습니다.
거름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과 함께 세우십니다. 이것은 주 앞에 나아오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과거의 생활이 어떠했든 지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방백들과 함께 세우심’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칭의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이 높임을 받을 뿐 아니라 안전하고 영광스러운 보좌를 받게 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이 말씀은 세상의 어느 황제도 부를 수 없는 놀라운 음악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름 무더기에서 일으켜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의 확신을 즐깁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음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임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방백들과 함께 세워진 것을 말합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되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나은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약혼자입니다. 그의 아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한 몸입니다. 그가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멸망하지 않으며 누구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방백과 함께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주님을 닮아 성화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금슬 좋은 부부는 서로가 닮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 닮은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9절 말씀,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그 기쁨 때문에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잉태하지 못한 여자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 특별한 감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도 믿음의 열매를 맺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거름 무더기에서 우리를 건지셔서 비천한 데서, 무거운 짐에서, 멸시와 천대에서, 죄의 구렁에서, 건져 의롭다 하시고, 확신을 주시고, 동행의 축복을 주시고, 믿음의 열매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성육신의 비밀
(시 113:1-9)
찬송 348장
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는 제1할렐시 모음집이라 해서 유월절과 같은 이스라엘 절기에 애송되던 시편들입니다.
특히 본시는 다른 감사예배시와는 달리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기까지 하시면서 비천한 죄인을 진토에서 일으키시는 인자하신 분이심을 감격적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는 장차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 예언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사로잡은 주의 백성들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복음입니다.
이 구원과 영광과 승리의 복된 은혜를 예수 안에서 받았다는 확신에 서서 오늘도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마귀들과 싸워 온전히 그 복을 누리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