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배롱나무에 관한 시모음 11)
목백일홍 /신순말
슬픔도 지극하면 꽃이 핀다대
고된 세월 살아낸 말씀 되뇌면
세상살이꽃 슬픔 아닌 게 없다는 뜻
견디는 일은 석 달 열흘이라고
꽃 아닌 일 없는 세상이더라고
피우기 전에도 석 달 열흘
피우면서도 석 달 열흘
세상에 꽃 아닌 것 없다시니
꽃 지우고 나서도 살아가는 석 달 열흘
배롱나무꽃이 피면 /정찬열
무더위에 몸살 나게 피어서일까?
줄기 등 굴피를 벗어버렸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더워서일까?
벌거벗은 기둥이 맨살로 옷을 벗는다.
눈 앞에 펼쳐지는 붉은 꽃 무리
오는 사람 가버린 벗을 그리워 필까?
긴 세월 머물러 피어있는 꽃의 무성음
길가에 백일홍 나무 붉은 꽃 토해내고 있다
유별나게 붉은 핏빛 구토한 듯 토하고
또다시 수줍은 듯
여름을 불태우던 붉은 배롱나무꽃
오는 사람 보는 눈을 눈이 시리게 붙잡는다
작열한 태양이 타오르게 하느냐
난. 어릴 적
매끈한 나무 등을 긁으면
잎이 떨려 움직여 간지럼 나무로 알았지
붉은빛 세 번을 피고 질 때면
간밤에 내린 비에
하품하며 벼가 익는다.
“부귀”로 벼 익는 황금물결 일렁인다.
그렇게 백일 간을 달아날 출구도 없어
피고 지며 지고 피는 배롱나무 붉은 자태
떠난 벗이 그리워서 붉게 애태우는
벼 이삭은 배롱나무 붉은 꽃을 염탐하고
이 가을! 네가 있어 탈곡기를 손질한다.
백일홍 /杜宇 원영애
뜰 안이 온통 붉어
흐르는 바람 안고 꽃 피고 있는데요
백일홍이라나요
백년도 못사는 것이
백날을 노래하며
자랑을요
벌 나비 불러 모아
찬치가 한창 이래요
정작 꿀맛을 모르는
당신은요
나비 몸짓에만 눈 팔려 있구요
기다리는 것은 멀구요
피는 것은 잠깐
지는 것은 어느새 라구요
그렇게 짧은 날은 가구요
뒤돌아 안달해도 소용 없다하데요.
배롱나무와 산죽 /사강 정윤칠
두어 그루 오래된 나무가 있다.
개심사에 가면...
돌계단에 작은 구름 마중나와 반긴다. 客影(손님
그림자)
배롱꽃 연못에
살포시 앉아 인연의 물결을 담고
흰 수련은 얼굴을 보였다.
개심사에 가면 귓볼 간지럽히는 세가지 소리가 있다.
청아한 염불소리
물 소리
솔바람 소리
넘보지 못할 이승의 꿈을 담고
배롱꽃은 연못위에 잠을 잔다.
물끄럼히 아름다운 구름과 맑은 향기 맑은소리
내눈에 들어왔다
산죽은 옆에서 배시시 웃고있다.
배롱꽃 /하은혜
칠월에서 구월 동안
백일을 핀다 하여
목 백일홍이라는 너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귀에 서서
백일동안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너
나는 네가 그 백일 동안에
세 번이나 피고 지는 줄 몰랐어
당연히 너는 한 번 피는
줄 알았지
누군가에게 주는
반가움의 아름다움 뒤에
이런 피고지는 수고가
숨어 있는 고마운 너
배롱꽃
백일홍(百日紅) /소산 문재학
염천(炎天)의 모진 시련을 극복한
열정의 화신인가.
유혹의 고운자태에
풍성한 가을향기가 녹아있네.
한 잎 한 잎 쌓아올린
심오(深奧)한 색상의 사랑 탑
단심(丹心)으로 태우는
그리움이 애달파라.
이토록 꿈으로 영글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무색케 하는
그 이름도 당당한
석 달 열흘. 백일홍
순결한 사랑 붉게 붉게
빨려드는 현란한 색상은
삶에 찌든 영혼(靈魂)을
열락(悅樂)으로 물들이네.
배롱나무꽃 /반기룡
개화공원에
배롱나무 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네
화무는 십일홍이라 했거늘
무더위 속에서 석달 열흘 꽃피우는 절절함이여
처녀의 한이 서린
요염한 자태로 꽃 피우며
황홀경에 빠지게 하니
옛 혼령 뚜벅뚜벅 걸어와
한동안 유희의 시간을 내려놓을 것도 같은데
하마 후두득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세월은 어찌할 수 없나 보구려
백 일간 치성으로 만발한 꽃이여
어느덧 꽃 숭어리
툭! 떨어지며 발등을 가로지르네
*개화공원:충남 보령시에 있는 공원
백일홍 /최숙경
마을 어귀
논 모퉁이 늙은 백일홍 나무
연둣빛 여린 모가
알알이 익어갈 때까지
수호신처럼 서 있다.
짙은 그늘은 만들지 못해도
피었다 지기를 세 번
그 향기
그 그리움
백옥의 결실을 지켜본다
노쇠한 가지
쇠막대기에 기대어 서 있어도
당산나무
은행나무에 지지 않는
도도한 자태
굵어져 버린 손마디를 닮은
껍질을 벗은 나무
겹겹이 쌓인 인고의 시간
붉은 꽃으로 피어진다
배롱나무 /이면우
배롱나무 붉은꽃 피었다 옛날 배롱나무 아래 볼 발갛게 앉았던 여자가 생각났다.
시골 여관 뒷마당이었을 게다 나는 눈 속에 들어앉은 여자와 평생 솥단지 걸어놓고 뜨건 밥 함께 먹으며 살고 싶었다
배롱나무 아래 여자는 간밤의 정염을 양 볼에 되살려내는 중이던가 배롱나무 꽃주머니 지칠줄 모르고 매달 듯 그토록 간절한 십년 십년 또 오년이 하룻밤처럼 후딱 지나갔다
꽃 피기 전 배롱나무 거기 선 줄 모르는 청년에게 말한다 열정의 밤 보낸 뒤 배롱나무 아래 함께 있어봐라 그게 정오 무렵이면 더 좋다 여자 두 뺨이 배롱나무 꽃불 켜고 쳐다보는 이 눈 속으로 그 꽃불 넌지시 건너온다면
빨리 솥단지 앉히고 함께 뜨건 점심 해 자시게!
백일홍 /김인숙
그대 내게 꽃으로 오시니
하루가 너무나 짧아
아쉬움 가득 고인
행복한 눈물이 납니다
흠뻑 내려주신 사랑을
가슴 터지도록 안으면
시간이 이대로
멈추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대가 심어준
처음 백일의 사랑
마지막 사랑이 되어
백 년을 품고
이 땅에 살아갈 이유가 된
나의 임이여!
그립고 그리운 눈물
꽃잎 되어 무수히 쏟아지니
뜨거운 꽃물결 가슴속 강물 되어
흐르고 또 흐릅니다
배롱나무 그늘에 앉아 /정민기
립스틱 바르고 서 있는 배롱나무
그늘에 앉아 더위의 눈길을 피한다
한참을 째려보고 있었던 터라
아직도 쨍쨍 떠서 햇볕을 내리고 있다
틈만 나면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는
저 해를 피하는 것도 잠시뿐!
눈치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자리를 바꾼다
시인들이 사랑한 선비의 꽃을 가지마다
꽃등처럼 환하게 달고 있는 배롱나무
누구라도 떵떵거리는 부귀영화 다 버리고
고백하는 한 구절의 문장 속에
나풀나풀 기다렸다는 듯 나비가 날아든다
쪽빛 편지지를 펼친 하늘은 또 구름을
끄적거리며 한 장의 연애편지 쓰고 있다
없던 마음도 솜사탕처럼 살살 녹게 할 것 같다
산봉우리에 걸터앉아 노을 가득 담긴
풍선을 터뜨렸는지 물들어 오르는 마음
배롱나무 곁을 쉬 떠나지 못하고 소금쟁이
한 마리처럼 빙글빙글 맴돌고 있다
百日紅 /김명수
인순이와 저는요
친구였어요
난리통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리통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둘이서 고아원에 같이 살았어요
인순이와 저는요
형제였어요
파주땅 기지촌에 함께 오던 날
먹물로 점을 찍어
형제 맺었지요
월남에서 전속 온 흑인병사 따라
인순이가 미국으로 떠나던 아침
기지촌 뒷마당에 꽃이 피었지요
대마초 피우고 함께 울던 날
독한 술 퍼마시고 쓰러지던 날
포주엄마 눈을 피해 뒷마당에 가면
언제나 백일홍이 피어 있었지요
월요일 아침 죠가 가면
등치 큰 미군이 잠자고 가면
구역질나는 속 가라앉히려
뒷마당 꽃밭으로 찾아갔지요
그 아이 내 동무 나를 못잊어
미국땅 어디선가 울고 있을 때
꽃잎은 빨갛게 피어 있겠지요
우리 뺨 아직 붉어 서러울 때도
꽃잎은 빨갛게 피어 있겠지요
백일홍 /김연순
내 뺨이 점점 붉어져요
가슴도 붉어져요
오전 10시에 이마도 붉어져요
손끝에서 바람이 빠져나가요
자꾸만 자꾸만 몽롱해져요
꽃받침도 물관도 놓쳐버렸나 봐요
한낮에도 꿈속인 듯 붉게
당신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요
그때마다 내 몸에선 열꽃이 피어요
때로는 깊은 절, 새벽, 기도처럼 차가워져요
오월은 짧지도 길지도 않아서 시간이
꽃잎처럼 호르르호르르 자꾸만 날아다녀요
동박새도 날아다니고 무당벌레도 날아다녀요
멀리 유채밭에선 한 눈도 팔지 않고 나비들이 집을 짓고
낮은 언덕에선 날지도 못하고 나는 발목만 부은 채 속을 태워요
5월, 눈부신 햇빛 속에서
꽃잎마다 바람은 까닭도 없이 붉어져 두근거리고
나도 부은 발등을 어루만지며
접었던 꽃잎의 매듭을 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