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카톨릭관동대 장석정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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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와 산파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지혜(출 1장)
연재를 시작하며
“출애굽기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출애굽기 본문에 대한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 글들은 출애굽기의 주요 인물과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각각의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지를 정리한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의 여러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어떤 뜻을 펼치고자 하신 것일까? 그리고 출애굽기라는 책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실까?
글 속에는 필자가 지난 30여 년 동안 출애굽기를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출애굽기의 행간에서 새롭게 느꼈던 감동들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출애굽기 본문을 통해서 필자가 체험한 축복의 순간들이 이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며, 필자가 예상하거나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독자들이 넘치도록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지혜롭다는 것
무엇이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는가? 지혜를 어디서 얻으며, 누구에게서 배울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고대로부터 모든 인간이 던졌던 궁극적인 질문이자 갈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 1장에 나오는 이집트 왕 바로를 통해 이러한 지혜에 관해서 분별해보도록 하자.
1장에 따르면 야곱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왔고, 이후에 그의 자손들은 이집트 안에서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7절) 이후 상황이 급변하게 되는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 이집트 왕(바로)은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으로 인해 근심하게 된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출 1:9-10, 두꺼운 글자는 필자의 강조임)
이집트 왕은 수가 많아지고 힘도 강해진 이스라엘 자손을 두려워했다. 특히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이집트를 배신하고 적의 편에 서서 싸우게 될 것을 걱정했다. 또한 궁극적으로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떠나가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런 모든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바로는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1장 후반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로의 조치는 전혀 지혜롭지 못했다.
바로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것이었다.(11절) 도대체 이런 조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효과를 노리고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살펴보자. 우선 중노동으로 심신을 지치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증가율이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바로가 걱정하는 바를 상세히 보면, 그러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많아지면 전쟁에서 적의 편이 되어 이집트를 칠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는데(10절), 사실 적군의 편에 서서 이집트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15세 이상의 청년들이다. 즉 출산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이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5년 이상 걸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중노동을 시켜 출산율을 떨어뜨려도 전쟁 위협을 억제하는 데는 효과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로의 중노동 조치는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 증가율을 낮추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노동 조치가 노리는 효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장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적군 편에 서서 이집트와 싸울 수 있는 청장년 남성의 수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중노동을 시켜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한 점에서 이런 해석은 더욱 힘을 얻는다.1 이집트 자료를 보면 수로(水路) 하나를 건설하면서 공사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의 수가 무려 12만 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2 이런 대규모 공사에 동원함으로써 실제로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수를 현저하게 줄이는 것이 바로의 중노동 조치의 본 목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인구 증가세가 빠른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 왕에게는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노예 신분인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자체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전쟁 비용을 들여 힘들게 포로로 노예의 수를 늘리는 것에 비하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그 수를 늘리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게 되면 바로가 입을 경제적 손실이 막대해질 것이기에, 그런 걱정을 했던 것이다.
급변한 바로의 조치
바로의 중노동 조치는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학대를 받을수록 이스라엘 백성이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갔기 때문이다.(12절) 그래서 바로는 더욱더 엄한 중노동, 즉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 등의 일을 시켰다.(14절) 이런 조치에 대한 결과가 어땠는지 성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가 계속 늘어났는지, 아니면 중노동 조치가 효과를 보았는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조치 또한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며 떠올린 바로의 ‘지혜’는 세상적인 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일 경우에 그 꾀는 ‘어리석음’이 된다. 이처럼 이 본문은 어리석은 바로의 잔꾀가 하나님의 역사하심 앞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런데 15절부터 바로는 앞선 중노동 조치와는 전혀 다른 조치를 내린다. 이 부분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대목인데,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에게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명령했던 것이다.(16절)
먼저 이 조치가 성인 남자의 수를 줄이고자 했던 앞선 조치와 전혀 다른 목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의아하다. 왜 모든 신생아가 아니라, 남자아이만 죽이라고 했을까?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줄일 목적이었다면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이라고 명령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왜 갑자기 바로는 신생아를 죽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로의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조치가 전혀 아니다. 전쟁에서 이집트를 배신하고 적군의 편에서 싸울 수 있는 장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신생 남아를 죽이는 것이 어떻게 왕의 걱정거리를 해소해 줄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바로의 신생 남아 살해 조치는 10절에 기록된 바로의 걱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성서는 바로의 신생아 살해 조치의 목적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타르굼3에 의하면 하루는 이집트 왕이 꿈을 꾸었다. 이집트 땅과 양 한 마리가 저울의 양쪽에 달려 있고, 어찌된 일인지 양 한 마리의 무게가 더 나가는 이상한 꿈이었다. 왕은 궁중 마법사 야네스(Jannes)와 얌브레스(Jamb-res)를 소환해서 해몽을 명하였는데,4 그들에 따르면 이 꿈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이집트를 멸망시킬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꿈이었다. 이에 이집트 왕이 그 남자아이의 출생을 막기 위해서 산파들에게 ‘신생 남아 살해’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타르굼은 히브리어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일종의 주석(註釋)처럼 덧붙인다. 타르굼과 같은 주석 없이 출애굽기 1장을 읽으면 ‘신생 남아 살해’ 명령의 목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를 바탕으로 바로의 명령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오히려 성서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 발견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산파들의 하나님 경외
그렇다면 왕이 내린 명령을 세밀하게 분석해 보자. 왕은 산파들이 히브리 여인들의 해산을 도울 때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주라고 명령한다.(16절) “그 자리를 살펴서”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슨 자리를 어떻게 살피라는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혹시 히브리어 본문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히브리어 본문인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 MT)을 살펴보면, 이 부분에 “두 개의 돌들”(오브나임, אבנים)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어 명사에는 단수와 복수, 그리고 양수라는 것이 있는데, 양수는 눈, 귀, 손 등의 두 개씩 있는 명사를 표현할 때나 그 밖의 두 개의 명사를 표기할 때 사용된다. 출애굽기 1장 16절에서는 “두 개의 돌들”이라는 양수형 명사를 통해 고대 사회에서 사용되었던 산모들을 위한 ‘분만대’를 나타낸다.5 이를 고려할 때 바로는 산파들에게 히브리 산모들이 분만대 위에서 해산할 때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즉 출산한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시간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 때나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산모가 분만대 위에서 출산할 때만 아들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는 ‘두 개의 돌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신생 남아 살해’ 명령이 은밀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산파들에게 강조한다. 산모가 분만대에 있을 때, 아직 가족 중 아무도 아이의 성별을 알지 못할 때, 그때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개의 돌들’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명사 ‘오브나임’(אבנים)을 ‘분만대’로 번역하지 않고, 개역개정 성서에서 “그 자리를 살펴서”라고 번역했기 때문에(새번역에서도 “잘 살펴서”), 바로의 명령의 필수 요소였던 ‘은밀성’이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오늘날 한글 성서를 읽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바로의 명령을 단순히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후 산파들이 현장에 늦게 도착해 사내아이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바로에게 대답하는 상황(19절) 또한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최초의 한글 성서인 『셩경젼셔』(1911년)에는 “그 낫ᄂᆞᆫ 거슬 보아”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출산 현장에서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의 의미가 어느 정도는 전달되었다.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 성서도 “see them on the birthstool”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들이 분만대에 있는 것을 보다’라는 뜻으로서 히브리어 본문의 의미를 잘 전하고 있다.
산모가 아직 분만대에 있을 때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상황에서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이들을 살려준다.(17절) 이 당시 바로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산파들은 이집트 왕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아이를 살려주었다. 이들이 이렇게 히브리인의 아들들을 살려주자, 이집트 왕은 산파들을 불러서 따져 묻게 된다. ‘왜 남자아이를 살려준 것이냐?’ 바로의 이 문책성 질문은 그 대답 여하에 따라서 산파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이런 순간마다 하나님은 역사해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지혜롭게” 대하자고 했던 바로는 산파들의 ‘지혜’로 인해서 자신의 꾀에 말려 한순간에 어리석은 왕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무장한 산파들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출 1:19)
건장한 히브리 여인들은 출산도 쉽게 하므로, 산파들이 해산을 도우려고 산모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를 낳아버린다는 것이다. 즉 산모가 분만대 위에 있을 때 도착해야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데, 도무지 그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로는 출산의 현장에서 ‘은밀하게’ 남자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미 늦게 도착하여 분만대가 빈 상황에서 그들은 그리할 수 없었다. 이렇게 명령을 실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답하는 산파들에게 왕은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서 본문은 왕의 반응에 대해서 어떤 기록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렇게 나타난다. 산파들이 바로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 바로 그때 지혜를 주신다. 바로가 내린 명령 속에 답이 있다고 지혜를 알려주시고, 오늘날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에게도 깨달음을 주신다.
산파들이 한 것은 단 한 가지이다. 17절과 21절에 기록된 것처럼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판단하시는 기준이다. 우리는 지금껏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았는가?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오늘도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 각오가 되어 있는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살려주었듯이, 우리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는가? 직장 상사도 두렵고, 다른 사람의 시선도 두렵지만,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다면 생각이 바뀌고 행동도 변하게 된다. 즉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는지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 생각대로 행동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물론 이런 행동으로 인해 불이익이 뒤따를 수 있지만, 산파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것들조차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출애굽기 1장 본문은 보여준다. 하나님은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 집을 흥왕하게 해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도 이런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준의 차이
출애굽기 1장 1절의 첫 두 단어가 히브리어 성서의 제목을 이루는데, 번역하면 “이것이 이름들이다”(ואלה שׁמות, 베엘레 쉐모트)가 된다. 2절부터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것처럼, 출애굽기는 이름을 중요하게 여겨 이름과 연관되는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이름이 한 번도 기록되지 않은 점, 반면 산파들의 이름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명확하게 기록된 점이 의미심장하다. 당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통치자가 바로였지만, 출애굽기에서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노예 신분이었던 히브리 산파들의 이름은 당당하게 기록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독자들에게 읽히고, 기억되고 있다.
결국 출애굽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의 메시지는 ‘기준의 차이’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내용이 기록될 것인지에 관한 기준이 다르다. 이른바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적용된다는 말이다. 왕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높은 자리로 인해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소지만 많아졌음을 잘 보여준다. 결국 권력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아는 자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으며, 만일 그렇게 행동했다면 출애굽기 1장의 바로도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을 것이다.
후대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정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곳은 하나님이 기록하시는 생명책이다. 세상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만 알고 계시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아니면 어디에 기록될 가능성이 높은가? 이 질문의 답은 오직 우리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지는 나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안다. 출애굽기 1장에 기록된 바로와 산파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주(註)
1 비돔은 이집트 신왕국 시대, 19왕조의 도시였고,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 때의 도시이다. 라암셋도 람세스 2세가 나일강 하류 델타 지역에 건축한 피-람세스(Pi-Rame-sses, 람세스의 집)이다. 비돔과 라암셋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때 건설된 도시들이기 때문에 이 내용을 통해서 출애굽 사건이 대략적으로 람세스 2세의 통치 때 발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2 Cornelis Houtman, Exodus. vol.1 (Kampen: Kok Publishing House, 1993), 245.
3 ‘차명 요나단 타르굼’(Targum Pseudo-Jonathan)을 말하며, 8세기경에 최종 편집된 아람어 번역 주석 성서이다. 주석의 분량이 많아서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약 두 배 분량이다.
4 이 전승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Lester Grabbe, “The Jannes/Jambres Tradition in Targum Pseudo-Jonathan and its Date,” JBL 98 (1979): 393-401.
5 히브리어 단수 ‘오벤’(אבן, 돌)의 양수형은 ‘오브나임’(אבנים, 두 개의 돌들)인데, 이 양수형이 16절에 사용되었다. ‘오브나임’의 다양한 의미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William Propp, Exodus 1-18 (New York: Doubleday, 1999), 139; Houtman, Exodus. vol.1, 253.
장석정|클레어몬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출애굽기의 출애굽』, 『하나님의 땅』, 『재앙의 신학』 등이 있다.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