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N]부처님의 무량한 경지를 느낄 수 있는 곳,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천년의 여행 23회
부석사 여행가이드_ 부석사에서 놓치치 말아야 할 다섯 가지 포인트!
① 안양루에서 바라본 소백산의 풍경 ② 극락의 세계를 들어가기 위한 과정 ③ 무량수전 아미타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이유 ④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그리고 건축 이야기 ⑤ ‘부석’ 떠 있는 돌에 담긴 부석사 창건 당시 상황
부석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등재된 사찰입니다. 의상스님을 흠모한 여인 선묘가 부석사에 절을 짓게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답고 고즈넉한 부석사에 함께 떠나보실까요? 즐겁게 보시고,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김유식의 펜화로 찾아가는 사찰기행] <9> 영주 부석사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사연이 깃든 곳
태백산 자락 천년숨결 넘치는 고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과 범종각 목어에
눈길 빼앗겨 펜화로 담아 내
부석사 안양루와 무량수전. Pen & ink on korean paper, 45x38cm.
백두대간 태백산 자락의 봉황산 중턱에 자리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어느 계절에 가도 느낌이 다르며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감흥을 준다. 가을이면 황금빛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인상적이며 단풍 속에 묻힌 부석사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여름이면 일주문을 지나 탱자나무 가로수와 사과나무 과수원의 싱그러운 내음이 맞아 주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일반적으로 아늑한 산속에 자리 잡게 마련인데, 이 도량은 언덕에 지어졌으되 산 중턱에 길쭉하게 배치된 형태라서 어느 각도에서건 사찰 전체가 조망되지 않는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다. 이 절을 답사하기 전에 약간의 사전 조사를 해보니 부석사는 산지 가람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하늘에서 보면 '화(華)'자를 형상화한 가람 배치가 특이했다.
매표소를 지나면 오르막길이 나타나지만 쉽게 오를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다. 108계단이라고 하지만 실제 갯수는 108개가 넘는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깊은 번뇌들을 끊어보려고 방하착(放下着)을 발원해 본다.
금강문을 지날 즈음 신라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채 우뚝 서 있는 당간지주를 만났다. 당간지주는 큰 법회나 행사를 할 때 괘불을 걸기 위해 사용했던 석물로, 절 마당을 대웅전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꽤 커다란 당간지주 만으로 이 절의 위상을 짐작케 해준다.
계단을 올라 보제루를 들어서면 좌우에 인근 사찰에서 가져와 옮겨놓은 동탑과 서탑의 엄호를 받는 범종각이 보인다. 이 사찰에는 2층 누각이 두 개 있는데 범종각과 안양루다. 범종각은 다른 전각과 달리 옆으로 돌아 앉아 있는데 여기에서는 소백산 산맥 전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고 느껴질만큼, 탁 트인 조망이 한폭의 거대한 무릉도원을 옮겨놓은 듯하다.
누각의 규모가 매우 커서 사찰의 조망을 혹여 가리지 않을까 해서 전면의 방향을 틀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다. 범종각에는 종이 없고 2층에는 특이한 모습의 목어와 법고가 자리하고 있다. 수중생물을 제도하기 위한 목어가 내려다보는 저 하늘과 부드러운 곡선의 안개 낀 산맥들이 흡사 바다 물결 같은 느낌을 준다. 부석사 목어는 지느러미가 상당히 크고 길어 마치 가다랑어의 그것 같았다. 눈을 부릅뜨고 속은 비운 채 여의주를 물고 용맹정진하는 수행자의 모습 같은 범상치 않은 모습에 매료돼 공력을 담아 펜화에 담았다.
범종각을 지나면 저 멀리 안양루와 뒷편의 무량수전이 살짝 보인다. 여기서 바라본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모습은 이 절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마당에서 물을 한잔 마시며 바로 여기에서 바라본 풍광을 펜으로 담겠다고 생각했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에 놓인 누각으로 아래에서 보면 2층 누각이고 무량수전에서 보면 마당과 동일 선상에 있는 1층 건물처럼 보이는데 누각과 문의 이중기능을 한다. 안양(安養)이 극락을 뜻하므로 극락세계의 출입문임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이 문을 지나면 극락세계인 무량수전이 있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불(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을 모시는 법당이다.
하지만 누구든 이곳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들어서면 일반적인 아미타법당이 아니기에 의아할 수 밖에 없다. 이곳 부처님께서는 정면이 아니라 긴 건물의 서쪽 끝에서 동쪽을 향해 모로 앉아계신다는 사실이다. 실로 굉장한 파격이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건축의 특징인 소박함에 단청도 거의 없어 화려하지 않고 간결한 멋이 돋보인다.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 양식의 공포에 배흘림 기둥의 비례적인 곡선미가 돋보인다. 배흘림 기둥은 지붕을 떠받드는 공포와 기둥의 하중 분산을 위한 건축학적인 고려가 돋보이는 양식이다. 서양 건축의 착시현상 방지 목적과는 조금 다르다.
독특한 귀공포도 눈길을 끄는데 건물에 비해 찰주까지 더해가며 유달리 길게 뺀 처마의 아름다운 곡선이 무릎을 치게 만드는 최고의 사찰 건축이 아닐 수 없었다. 건물 자체가 국보인 경우는 드문 일인데 무량수전은 최순우 선생의 말처럼 "최고로 빼어난 고대 목조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지정되지 않았을까 한다.
부석사는 1300여년의 역사를 지녔는데 통일신라시대 676년에 의상대사가 당나라의 신라 침공 야망을 눈치채고 귀국하여 호국의 일념으로 절터를 찾아 수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죽령을 방어하는 지점인 영주 땅에 세운 절이다. 그 터를 오랜 시간 굳건히 지켜온 가람이 지금까지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창건주인 의상대사를 받드는 선묘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도 한몫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량수전 뒤편에는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시절, 당나라 여인이었던 선묘가 의상대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배를 타고 이미 떠나버린 의상대사를 못잊어 용이 되어서라도 의상대사를 지켜주겠다고 서원을 세우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 뒤 진짜 용이 된 선묘낭자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짓는데 방해한 토속신앙 수구집단 무리들을 물리치는데 썼다고 하는 바위가 있다. 약 100여톤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부석(浮石, 공중에 뜬 돌)이다. 이리 저리 살펴봐도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영험함을 느끼게 해준다.
범종루 누각 2층 목어와 법고. pen drawing on paper, 38x28cm.
무량수전에서 석등으로 이어지는 마당에서 실제로 용의 몸통을 상징하는 석룡이 발견되었다 하는데 용으로 변한 선묘가 묻힌 것이라 한다. 이 설화를 뒷받침해 주듯 '선묘정'이라는 우물도 있고 무량수전에서 북서쪽 모서리의 오솔길을 오르면 자그마한 사방 한 칸의 전각이 보인다. 바로 화려한 모습을 한 선묘의 진영을 모신 선묘각이다. 외부의 벽화에는 부석사 창건설화를 담은 벽화들이 있어 이해를 돕는다. 의상대사를 비롯해 선대 조사들을 모시는 조사당에도 한쪽 벽을 지키고 있는 선묘의 진영이 있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인의 진영을 따로 모시는 전례를 아직 한번도 접하지 못하였기에 선묘라는 여인이 부석사와 얼마나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부석부터 시작하여 전각, 우물 등 곳곳에 선묘의 전설들이 스며들어 있다.
조사당 처마 밑에는 의상대사가 꽂은 주장자에서 자라났다고 하는 '선비화(골담초의 별명)'라고 불리는 나무가 있다. 이 사찰에서 부디 부디 해마다 꽃을 피워냈으면 하는 발원을 끝으로 부석사 여행을 마무리했다.
비록 전설 속의 이야기일지라도 불국 화엄 정토를 만들겠다는 의상대사의 큰 뜻에 보탬이 되려 호법 용이 되어 이적을 일으킨 놀라운 사랑이야기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마음속에서 고요히 영감을 주었다. 이 땅의 여인도 아닌, 당나라의 여인이었던 이 경이로운 여인을 우리는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상대사는 입적할 때까지 당신이 창건했던 그 수많은 사찰들 중 바로 이곳 부석사에서 가사와 주장자 하나를 놓아두고 그 흔한 부도탑도 하나 없이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그만큼 부석사에 대한 의상대사의 애정이 담긴 게 아닐까 싶다. usikim@naver.com
[불교신문 3718호/2022년5월31일자]
김유식 usikim@naver.com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