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이 질문에 대해 조주 선사는 엉뚱하게 '옷 한벌을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라는 대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조주의 이 말이야말로 그 수좌에게 주는 간절한 해답이다.
조주의 해답은 옷을 새롭게 만들었든,
그 옷의 무게를 달아보았든, 또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든,
물 긷고 장작을 나르든, 일체의 모든 동작이
절대의 '하나'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현상인 만법 위에 나타난다는 뜻이다.
만약 조주가 '무게가 일곱 근 나가는 옷'이라는 대답대신
그 하나는 다시 만법으로 돌아간다'는 상식적인 대답을 했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말려들게 되므로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 못된다.
이처럼 상식을 벗어나 묻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데서
선 수행자로서의 조주의 면목이 있다.
선문에서의 문답은 이처럼 상식을 초월한 데서
해답아닌 해답을 보여준다.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언어도단의 해답이다.
일상적이며 상대적인 인식을 초월한 절대적 인식에서
선의 경지는 체득되는 것이다.
조주는 이 절대의 심경에 서 있는 것이다.
대립을 단절한 절대로서의 '하나'를
도교에서는 '무(無)'나 '도(道)'로 표현하며,
성리학에서는 '이(理)'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성리학의 시조 주염계(周염溪)는
'무극이면서 태극(無極而太極)'으로,
왕양명(王陽明)은 '양지(良知)'로써
각각 절대성을 표현하고 있다.
현상인 만법과 실체인 '하나'의 관계는
송대의 정이천(程伊川)이 말한
'이일분수(理一分殊; 이치는 하나임녀서 나뉜다)'와 비슷하다.
즉 정이천은 절대적 존재인 '이(理)'는 유일하면서도,
현상적으로는 갖가지 차별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절대적 존재(理)와 현상(氣)은 같은 것도
분리된 것도 아닌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 이것은 절대의 '하나'와 현상인 만법이
서로 관련을 갖고 있는 상즉적(相卽的)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즉 만법이 그대로 '하나'이며, '하나'가 곧 만법이다.
또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一卽一切 一切卽)'이며,
'만법이 곧 한마음이며 한마음이 곧 만법'이며,
'평등이 곧 차별이요 차별이 곧 평등'인 것이다.
만법이 절대인 '하나'로 돌아간다 해도,
그 '하나'로부터 만사에 순응하고 만사에 작용해야 한다.
조주는 바로 이 점을 구체적으로 해명한 것이니,
우리는 조주 선사의 말에서 상대적 인식을 버리고
절대적 인식에 서 있는 그의 경지를
시대의 차이와 시간의 차이를 초월하여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벽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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