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배롱나무에 관한 시모음 12)
백일홍 나무에게 물어보렴 /김희경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거든
백일홍 나무에게 물어보렴
한겨울
노승의 지팡이처럼 서 있다가
봄 오는 길보다 먼저 길을 여는 나무
가지 하나하나,
이파리 하나하나에
온 마음 기울여 걸어주며
혼신 다해 생을 던져내는 나무
화무십일홍
그런 건 그의 사전엔 없어
십일이면 어떻고 백일이면 어때
백 년이면 어떻고 천년이면 어때
그를 살리고 내가 죽는다 해도 어때
살갗 다 헤지도록 해 가는 줄 모르다
꽃지고 이파리 모두 떠난 후
온전히 내어주고도 죄인인 듯이
빈 몸 홀로 속울음 삼키는 나무
관절 마디마디 바람의 얼굴
자신만 모르는 맑디 고운 빛
그 깨끗한 영혼의 침묵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거든
백일홍 나무에게 물어보렴
배롱나무, 백일의 언약도 /淸草배창호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내는 것이란 걸,
잊은 것 같다가도 문득 예리한 통증으로
되살아난다는 걸 몰랐습니다
잊히기만 기다렸던 것은 아닌지 몰라도
바람 잔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메마른 가지의
통곡을 뒤집는 밤낮인 걸 몰랐습니다
시절을 넘나든 산화한 나날의 연속이
초하에서 시작한 입추의 그늘까지
처서에 들면서 조금은 빛바랜 꽃잎에
괜스레 눈시울을 적시게 만듭니다
마디마다 늘어놓는 서리 낀 애증은
갈래갈래 엉킨 내 안에 떨림의 뿌리로
빗금을 마구 그어 놓았으니 잘라내고 싶어도
아니 되는 고통의 슬픈 언약이 되었습니다
먹물을 가득 묻힌 겨울이 오기 전까지
허우적거리다 끝내 허공에 박힐지라도
끝없이 끝을 향해가는 그해 여름,
네 오늘처럼 선연히 피울 것입니다
늙은 배롱나무 주지 /안은숙
한나절 무릎 꿇는 소리가
개심사 명부전을 드나듭니다
딱딱, 졸음을 치는 죽비소리
합장과 소리가 몸을 포갭니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물기를 다 말릴 수 있을까요
댓돌 위 검정 고무신 뒤축이 다 닳았습니다
명부전 옆
바리케이드에 갇혀 구불구불 뼈를 굴리고 있는 나무들
절을 따라 무릎뼈도 굵어졌다지요
아무리 바깥으로 팔을 뻗어도
만져지지 않는 세상
지난해 대처승이 다녀가고
배롱나무에 새순이 돋았습니다
연분홍 입술로 새들을 불러 모으고
한 번쯤은 저 바리케이드를 넘고 싶었겠지요
개심하고 싶은 나무들
아무 일 없어 절은 또 적적합니다
절 마당을 붙들고 사는
귀신같은 귀명창들, 귀를 세워 소리를 읽고 있습니다
눈은 점점 침침해져 가는데
귀만 터서 바람마저 다 읽어냅니다
저 늙은 배롱나무 주지
평생 이 자리에서 늙어갑니다
백일홍의 추억 /안용기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 아래
울긋불긋 피어오른 백일홍 꽃송이들
방학의 코앞
교정의 꽃밭에서 보아온
울긋불긋 백일홍 꽃밭
여름방학 시작종을 울리며
맹렬히 피어난 백일홍 꽃송이들
오십년 세월이 흘러서도
백일홍 꽃밭 앞에 서기만하면
내가슴은 설레임으로 바람이 분다.
가슴속은 간지러움으로 가득해 진다.
배롱나무꽃 /심선애
가을을 알리는 비가 추적이는 거리
습기 머금은 나무 사이로
연분홍 배롱나무꽃이 함초롬히 피었다
푸른 잎이 발그레하게
이별을 준비하는 계절
소담한 꽃송아리가
젖은 하늘을 밝게 비춘다
분홍 손 흔드는 고운 얼굴이
따뜻한 마음 건네주는
멋진 친구 명옥이를 만난 듯
바라만 봐도 미소가 어린다
가을이 깊어지고
소슬바람에 꽃잎이 시들해도
빛나는 명옥(明玉)처럼 밝고 따뜻한 마음
소중히 접어 간직하련다
배롱나무 꽃 /박인걸
저녁노을 질 때 붉게 피어나
하늘을 물들이는 화려한 꽃이여
그 작은 꽃송이 어우러지니
형언 못 할 풍경에 마음 뺏긴다.
바람 한 점 없는 눅눅한 저녁
꽃향기 짙어 마음 흔들고
가로등보다 더 붉게 비추니
지친 하루가 되레 고맙다.
백일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라네.
어머니 마음보다 더 끈질기게
이억이억 홍역 발진에도
한여름 딛고 일어서는 모심이여
지난해 퍼붓던 여름 장맛비에도
수줍은 입술 꽉 깨문 채
처연한 꽃잎 수줍던 모양에
내 혼을 너에게 내주었다.
뒤뜰에 핀 꽃 나만 볼 수 없어
고운 사연 적어 너에게도 보낸다.
배롱나무 /권복례
붉은색 배롱나무 한 가득이다
봄이 지나고
나무들이 초록으로 가던 날
배롱나무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나무들 속에서 피어난
배롱나무 꽃 앞에서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백일홍 /김현서
나는 노란 꽃 자주 꽃 하얀 꽃
지기 위해 태어난 꽃, 아니아니
햇살을 받으면 아름다운 겹꽃으로 피어나
햇살보다 먼저 도착한 환삼덩굴이 내 발목을 잡아도
나는 노란 꽃 자주 꽃 하얀 꽃
초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는 꽃
꽃밭에 모여든 햇빛이 모두 돌아가고
저녁이 어두운 노래를 부르며 꿈을 접어도
나는 백 일 동안 피는 꽃
백 일이 지나면 열매로 남는 꽃
배롱나무 연가 /德松 홍성기
아파트 정원 한 모퉁이
간지럼쟁이 배롱나무들
무리지어 분홍 꽃망울
몽실몽실 피워내
벌나비를 부른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
하루가 길더구나
화려하게 피어나
백일동안 날마다 피고 지고
진해져 가는 너의 몸단장이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부른다
허기진 꿀벌과 호박벌들
이꽃 저꽃 옮겨가며
꿀모으기 분주하고
지나는 길손들 서로 질세라
'찰칵 찰칵'
널 담느라 숨가쁘다
날마다 새롭게 변해가는 너
두고 가기 아쉬워
보고 또 보고.
백일홍 편지 /이해인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모든 만남은 생각보다 짧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 부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부터 백 일만 산다고 생각하면
삶이 조금은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처음 보아도 낯설지 않은 고향친구처럼
편하게 다가오는 백일홍
날마다 무지개빛 편지를
족두리에 얹어 나에게 배달하네
살아 있는 동안은 많이 웃고
행복해지라는 말도 늘 잊지 않으면서...
배롱나무 /이향이
긴긴 여름 그 뜨거운 볕을
온몸으로 견디는 배롱나무
부러질 듯 휘어진 가지에 진분홍 꽃들이 피어있다
너의 가슴에 안겨 흐드러진 꽃 무더기로
피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그랬을 뿐인데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
바람 세차게 불어와
차라리
꽃잎 우수수 떨어져 내려
너, 가벼이 숨 쉴 수 있다면
너로 인해 빛날 수 있었던
나 기꺼이 낙화하리
온 힘 다해 안아 준
아름다운 너를 보리
배롱나무 /이향이
긴긴 여름 그 뜨거운 볕을
온몸으로 견디는 배롱나무
부러질 듯 휘어진 가지에 진분홍 꽃들이 피어있다
너의 가슴에 안겨 흐드러진 꽃 무더기로
피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그랬을 뿐인데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
바람 세차게 불어와
차라리
꽃잎 우수수 떨어져 내려
너, 가벼이 숨 쉴 수 있다면
너로 인해 빛날 수 있었던
나 기꺼이 낙화하리
온 힘 다해 안아준
아름다운 너를 보리
백일홍 필 무렵 /서정주
주춧돌이 하나 녹아서
환장한 구름이 되어서
동구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지.
칠월이어서 보름남아 굶어서
백일홍이 피어서
밥상 받은 아이같이 너무 좋아서
비석 옆에 잠시 서서 웃고 있었지.
다듬잇돌도
또 하나 녹아서
동구도 떠나오는 구름이 되어서
배롱나무꽃(1) /김태백
임 오시나 보다
수다스러운 내임
무더운 뙤약볕 속에도
우리 사랑의 인연 맺어준
자줏빛 고운 햇살 품고
임은 오시나 보다
무거운 바람 짊어지고 오는
우리임은
백일 동안
내 영혼 속에 아름다운 꽃 심어놓고
잠시 쉬었다 가겠구나
임이 오시나 보다
수다스럽고 폭염 기승부리는 날에는
우리 고운 임은
아롱 아롱 예쁜 미소 지으며
내 곁에
백일 동안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저녁노을 따라
져버린다 해도
우리임은 오시나 보다
하늘이 맺어준
운명 같은 우리 인연 백일 동안
내 곁에 쉬었다 가고 싶어
우리임은 오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