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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역사
이슬람은 유대교, 기독교와 함께 하나의 신을 섬기는 유일신교이다. 역사 속에서 그것은 또한 유대교, 기독교와 같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하는 공통의 믿음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슬람교도인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이슬람의 세계 역사 속에서의 형성과 발전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자. 1. 이슬람의 출현1) 이슬람 출현 전의 아라비아 반도이슬람 발생 이전의 시대를 무슬림들은 자힐리야라 부른다. 이 명칭은 아랍사람들이 이슬람에 개종한 이후에 붙인 것으로 무지라는 뜻 외에도 신앙의 암흑시대라는 뜻도 숨어 있다. 또 이 시대를 아랍 알 야움(그날의 아랍인)으로도 부른다. 즉 철부지 시절의 아랍사람이란 뜻이다. 이 두 명칭은 은연중 이슬람을 광명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는 이슬람 발생 이전 200-300년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이슬람의 수임 기간이라 볼 수 있다. 이슬람이 발생한 직사각형의 아라비아반도는 그 넓이가 약 300만 평방km로서 인도아대륙에 버금갈 정도로 크다. 그러나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예멘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강우량이 적어서 대부분 사막과 같은 건조지역이다. 중앙지역에 높은 산들이 있기는 하나 만년설이 쌓일 정도로 높지는 않아 하천에 물을 일년 내내 흘러 보내지 못한다. 간혹 비나 눈이 내릴 때에만 하천 역할을 하는 물길을 아랍인들은 와디라 부른다. 반도의 내륙에는 광대한 사막이 펼쳐 있고 그 주변에는 넓은 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반도 곳곳에는 오아시스가 흩어져 있다. 이런 반도에는 베두윈(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둘 다 부족 단위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다. 베두윈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꾸려 나갔으며, 오아시스의 정착민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 반도의 부족들은 늘 서로 싸웠으며, 부족의 구성원들은 자기 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을 명예로 알았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신앙형태는 다신교였고, 애니미즘적 성격이 강한 원시적인 것이었다. 기원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유대교의 아라비아 반도의 침입은 시작되었다. 홍해 연안을 따라서 남하한 유대교도는 야스리브(메디나)와 예멘에 정착하게 되었다. 반도 북부 변경에는 기독교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파가 들어왔다. 중부의 히자즈 지방이나 남부의 나즈란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2) 무함마드의 등장6세기 후반에 들어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사산조 간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다른 지역보다 아라비아 반도를 더욱 안전한 통행로로 선호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몇몇 도시들은 성장하여 이와 같은 교역의 신장을 주도하고 이익을 취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도시는 메카였다. 570년경 이 도시의 지배 부족이며,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쿠라이쉬족으로부터 무함마드가 출생한다. 그는 쿠라이쉬족의 하심가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는 삼촌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성인이 되어 부유한 카디자에게 봉사하다가 그녀와 결혼하여 경제적 안정을 얻게 되면서부터 중년에 이르도록 부유한 상인으로서의 생활을 계속한다. 610년경 그는 신들인 상태의 종교적 체험을 겪게 되는데, 이 체험은 그 자신의 생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전 세계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 대다수는 다신교를 믿고 있었으며, 기껏해야 아랍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알라’라고 불리는 한층 강력한 신의 우월성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는 유일신 사상을 갖게되며, 신이 그에게 계속 보내 오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유일신 사상을 주변에 전파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은 쿠라이쉬 부족 지도자들이 그들의 이해에 반한다는 생각 때문에 배척되었고,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622년에 수백명의 추종자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다. 이해는 후에 이슬람역의 원년이 된다. 3)이슬람의 형성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최초로 생성된 이념 공동체이다. 무함마드는 이 공동체를 세우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단위 부족의 요직인 부족장, 점술사, 중재자 및 전시 지도자의 기능을 자신의 한 몸에 집중시킨다. 즉, 그의 신의 사도로서, 중재자로서, 군사령관으로서 제정 일치의 모든 권한을 쥔, 여느 부족장들과는 다른 강력한 종교적 , 정치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메디나의 유대교도를 몰아내고, 메카와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무슬림군을 이끌고 63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이슬람 깃발 아래에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한다. 이리하여 무함마드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세상에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 공동체를 실질적 정치 세력으로 아라비아 반도 내에 형성시켜 놓는다. 2.이슬람의 교리1)여섯 가지 믿음이슬람이란 말은 유일신 알라에게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다. 이슬람 교리 가운데 첫 번째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알라 이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라고 한 것으로, 이 구절은 신자의 이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 즉 아기가 태어날 때 부모의 첫 마디가 바로 이 구절이며, 삶을 이어가는 동안이나 무덤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되풀이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이 첫째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두 번째 교리로서 즉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이다. 이 두 구절은 이슬람의 핵심 신조로서 '샤하다'(증언)라고 세 번째는, 꾸란은 신의 최종적이고 가장 완벽한 말씀을 수록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모든 계시, 즉 태초의 말씀이 빠짐없이 이 경전 속에 복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가 최후의 예언자이며, 꾸란은 최종의 계시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 다른 신의 사도보다 그를 더욱 높이는 것이다. 네 번째는, 천사에 대한 믿음이다. 천사는 계시를 전해 주는 가브리엘 대천사를 수장으로 위계층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다섯째와 여섯째가 각각 내세와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정명(定命)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이 정명에 대해서는 각 종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세계 무슬림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순니파를 비롯하여 여러 종파가 따르고 있다. 이것을 흔히 육신(六信)이라 한다. 2) 다섯 가지 실천그러나 이슬람은 믿음의 실행을 중요시하여 육신에 추가하여 오행(五行)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앙의 고백', '예배', '단식', '종교세', '순례'이다. ‘신앙의 고백’은 신의 유일성과 무함마드가 사도임을 즉 ‘샤하다’를 공언하는 것이다. 누구나 이것을 공언하면 이론상으로는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하루 다섯 번의 예배시간을 알릴 때에도 이슬람 사원에서는 이 ‘샤하다’를 크게 낭송하는 것이다. ‘예배’는 단독으로 올릴 수도 있으나, 사원에서 올리는 것을 장려하고 있으며, 금요일에는 사원에서 집단 예배를 본다. ‘단식’은 음력인 이슬람력 9월(라마단) 한 달 동안 매일 해가 떠서부터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피우지도 못하는 일체의 금욕 생활을 의미한다. ‘종교세’(자카트)는 꾸란에서는 예배와 함께 독실성의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무슬림들로부터 그들의 소득의 2.5%에 해당하는 액수를 정부 관리들이 징수하여 성전의 건축, 가난한 사람의 구제, 공공 사업의 추진 등에 사용할 수가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에서 이 종교세는 강제성을 띄지 않고 자발적으로 양심에 따라 사원에 바치게 되어 있다. ‘순례’(핫지)는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랍 관습 중에서 가장 많이 수용된 것으로, 이 때문에 일신론적 측면에서 자매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즉 ‘카바’(예배의 방향을 정하는 직사각형의 검은 돌을 모신 이슬람 신전)을 일곱 번 돈다든가, 검은 돌에의 입맞춤, ‘잠잠’이란 샘물을 마시고 악마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 양이나 염소 등의 제물을 바치는 것 등은 그대로 답습되어 이슬람화하였다. 꾸란에는 신체 건강한 남녀 성인 신자 모두에게 적어도 일생에 한 번 순례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순례는 이슬람력 12월 10일을 전후로 메카를 방문하여 행하게 되어 있다. 3. 이슬람 제국의 확장1)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무함마드는 신도들에게 꾸란과 이슬람 공동체의식, 무슬림으로서의 모범적인 생활방법을 제시하고 죽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부족들의 이반에 따라 한때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의 후계자로서 칼리파로 뽑힌 아부 바크르의 노력으로 재통일되었다. 제 2대 칼리파 오마르 때에는 대정복이 개시되었고, 한 순간에 이슬람 국가의 판도는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 동서로 확대되면서 제국으로 변모하였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아랍 부족들로 이루어진 이슬람 전사단이었다. 그 후 칼리파의 자리는 오스만에서 알리로 계승되었고, 이슬람 공동체는 다시 내란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것은 알리와 우마이야가의 무아위야와의 지도권 다툼이였으며, 이것에 깊이 관련되어 있던 것이 하와리즈파이다. 그들은 이슬람 공동체가 지닌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과격파로 공동체가 급속한 확산에 의하여 세속화되는 것에 종교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무아위야 및 그와 타협한 알리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규탄하고 그들 양자와 싸웠다. 결국 661년 알리가 그들에 의하여 암살당하고 정통 칼리프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그 후 90년 동안 공동체의 지도권은 우마이야 조가 독점하게 되었다. 이런 기존 이슬람 체제(이를 인정하는 다수파를 순니파라고 부른다.)에 대하여 공동체의 지도권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피를 받은 알리의 후예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이 시아파이며, 이들도 우마이야조를 비(非)이슬람적이라고 비난하며 하와리즈파와 같이 우마이야조에 대해서 무력저항을 계속했다. 2.우마이야조 시대(661-750)반 우마이야조의 움직임에 대하여 우마이야조는 신앙은 행위와 관계가 없다는 무르지아파의 주장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한 탄압으로 맞섰다. 우마이야조 하에서도 제국의 확장은 계속되었지만 영토의 확장이 곧 이슬람화로 연결 지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슬림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피정복민은 일정한 조건 아래 <이슬람의 평화>와 신앙의 자유를 향유했다. 따라서 이슬람의 지배영역은 우마이야조 말기까지 이미 서쪽은 아프리카의 전 비잔틴령과 스페인에까지 이르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더스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국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우마이야조하의 이슬람 공동체는 평온하지 못했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이나 아랍인 우위의 정책은 비(非)아랍 무슬림인 마왈리와 원리주의적인 신도의 불만과 반발을 유발시켰다. 이것은 시아파와 하와리즈파의 운동과 결부되었고, 나아가서는 아랍 부족대립과도 연결되어 활발한 반정부운동을 일으켰다. 우마이야조의 칼리파들은 이슬람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확대.유지.발전 시키는 데에 힘썼으나 이슬람적으로 다지는 데는 실패했고, 또 무엇이 이슬람적인가 하는 것에 관한 기준도 미처 확립하지 못했다. 결국 압바스가는 이와 같은 불안정요인을 최대한 결집시켜 가며 오랜 노력 결과 반란에 성공하여 750년 우마이야조를 쓰러뜨리고 압바스조를 세웠다. 3.압바스조 시대(750-1258)이슬람 제국의 우두머리가 우마이야조에서 압바스조로 바뀌어진 것은 혁명이였다. 그것은 궁전의 음모나 쿠데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혁명적 조직과 선전에 의하여 달성된 것이다. 이때부터 제국은 아랍계이건 비(非)아랍계이건 무슬림이면 누구나 똑같은 권한을 부여하여 주었다. 압바스조는 국가 통일의 원리가 이슬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때까지 민간학자들 사이에서 정비되어 가고 있던 이슬람법에서 국가통치의 기초를 찾았다. 그리하여 쿠라이쉬족 출신인 칼리파가 다민족적 공동체를 하나의 법 밑에서 단일국가로서 지배한다는 이상에 가까운 형태를 실현했다. 이렇게 해서 우마이야조 하에서 세속적 성격이 강하며, 아랍적인 제국은 압바스조 하에서 진짜 이슬람 제국으로 변모했다. 압바스조의 칼리파는 실질적인 권력의 바탕을 정규군에 두었고, 권력의 행사는 봉급 생활자인 관료 기구를 통하여 행사했던 전제군주였다. 따라서 그의 권위는 아랍 부족의 지지에 의지하던 우마이야 칼리파보다 훨씬 높았다. 압바스조하의 이슬람 제국은 다인종 국가로서 농업과 상업과 같은 평화시의 경제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제국의 경제 규모는 우마이야조 시대에 비해 훨씬 대형화되었으나, 정복 사업의 중지로 더 이상 크게 확장되지 않았다. 압바스조가 등장하고 우마이야조가 무너지는 과도기를 틈타 서쪽 변방 지역인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지역은 점차 분리 현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제국의 중심부인 중근동 지역은 그나마 통일을 지탱하여 9세기 중엽까지 제국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가 너무나 크고, 중앙 정부의 내분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제국은 급격히 아랍, 페르시아 및 터키인의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으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허약한 중앙 정부는 이 현상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945년 시아파인 부와이흐가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칼리파는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압바스 제국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름뿐인 칼리파와 압바스 제국은 1258년까지 유지되다가, 비(非)무슬림인 몽골의 홀라구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됨으로써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에도 이슬람 세계에 칼리파를 자칭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이름에 걸맞은 실체를 가지지 못하였고, 이슬람 법학자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국이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는 동안에 지방에 따라서는 유능한 통치자가 출현하여 경제적 문화적 활동을 장려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900년경부터 1250년경까지 이슬람 문명의 절정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제국이 사라진 후에도 이슬람은 확산을 거듭하여 18세기에 유럽이 이슬람 세계로 진출하여 올 때까지 서쪽으로는 대서양 연안 ,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비인 앞, 남쪽으로는 중부 아프리카, 동쪽으로는 필리핀까지 확산되었다. 4.이슬람 문명의 특징아랍 이슬람 제국이 중근동에 번영하고 있는 기간에, 일반적으로 사라센 문명으로 알려진 하나의 문명이 생겨났다. 이 문명은 아랍인이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가져온 기성품도 아니고, 정복을 완수한 후 개종한 여러 인종, 즉 아랍 족, 페르시아 족, 이집트 족, 시리아 족 등의 순수한 무슬림의 문명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기독교도, 유대교도 및 배화교도 등도 이 문명을 창조하는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명은 아랍어로 표현되었고, 이슬람 세계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문명의 알맹이는 곧 언어와 신앙 두 가지였다. 아랍인 주도로 이룩된 이슬람 문화의 현저한 특색은 특유한 융화력과 동시대의 주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상대적 관용성이다. 그러나 이슬람 공동체의 사회는 인생과 우주를 수직적으로는 밀접히 관련되나, 평면적으로는 느슨하게 얽어매어 놓을 정도여서, 각각 분리된 원자체의 구체적 집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는 구역, 조합, 씨족 및 집의 혼합체여서 개인은 이 소집단에 속하지만, 각 개체 또는 전체의 유기적인 조직체의 구성 분자로서 이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이 결핍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형성 시기에 발달하였던 아랍인의 개인주의적 태도는 오직 베두윈 가운데만 그대로 남아 있고, 문명의 중심지인 도시에서는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방관적인 태도로 바뀌어 갔다. 또 모두가 이론상 이상적인 이슬람적 인간과 사회 즉 무함마드와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모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자유로운 여러 활동을 추구하는 이슬람 발생기부터 10세기까지의 상업 시대는 정체적인 원리주의 대두와 함께 끝났고,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억눌리고 이슬람의 새로운 각본, 즉 완고한 교리가 확립되어 19세기 유럽 문명이 동방으로 진출할 때까지 중근동 세계를 지배해 왔다. 이슬람 문명은 탄생기부터 기독교 문명권과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십자군의 침입, 근세의 서구 열강의 식민 통치, 서구와 이스라엘의 협조적 관계로, 비록 발달된 서구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심정적으로 늘 거부적이다. 이것은 우리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6세기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중심한 비잔틴왕국과 이라크를 중심한 페르시 왕국이 있었으며 이 두 왕국과 문화 사이에는 많은 무역교류가 있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예맨에 기독교를 전했으며, 그곳에 주교가 거주할 정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이 상인의 무리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특별히 Mecca는 상인들의 무리가 Syria(Gaza)로 가기 위해서 반듯이 거쳐야 되는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두 왕국 사이를 오가며 무역을 했으며 이것은 먼 여행 길로 많은 위험과 함께 엄청난 부를 상인들에게 안겨 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여러 종류의 다신과 함께 유목생활을 하면서 지냈고, 이러한 생활 풍습은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의 변화와 함께 당시의 사회적인 많은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당시의 전통으로는 씨족 안에 가난한 사람이나 노약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부익부 빈익빈 형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 570 - Muhammed는 당시 Hashim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 595 - Muhammed가 성장한 후 그는 삼촌 상선을 따라 Syria여행을 했고 그러던 중 부유한 상인의 미망인 "Jhadiha"를 만나 그를 위해 일하던 중 Muhammed의 나이 25세 그녀의 나이 50세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 당시 그녀는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2명의 아들이 죽고 4명의 딸이 있었다. 그후 Muhammed는 종종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특별히 그는 매년 Mecca 부근에 있는 "Hira"산의 동굴에 들어가 묵상에 잠기곤했었다. 그는 또한 그 당시의 사회적인 여러 가지 현상, 여러 신을 섬김, 심각한 빈부의 격차 등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 610 -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하늘로부터 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암송하라. 피덩어리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주님을 암송하라. 풍성하신 주님, 펜으로 가르치신 분, 사람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가르치신 분을 암송하라." 이것이 그가 코란을 기록하게된 동기가 되었고, 이슬람의 출발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들에 대해서 많은 날 동안 번민을 했으며 성경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아내의 친구로부터 조언을 듣기도 했었다. 그후 Muhammed는 자신에게 나타난 형상과 일들을 주시하는 가족들로부터 적극적인 동조를 얻으며 제일 먼저 그의 아내가 첫 번째 모슬렘이 되었고, 삼촌, 9-10명의 아이들, 아내의 몸종과 Muhammed의 절친한 친구가 모슬렘이 되어 그를 따랐다. 이로서 가족들을 통해 그의 가르침을 확산하던 중 613년부터는 공적인 장소에서의 가르침이 시작되었고 약3년 후 그는 다시 Allah(알라)의 음성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39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매일 같은 시간에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그의 가문으로 부터의 반대에 무딪혀 주변의 도시로 피신했었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반대를 받아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 Mecca로 되돌아 왔다. 621년에는 그를 만났던 5명이 다른 7명과 함께 최초의 회심자가 되었고, 620년에는 Medina에서 6명이 Muhammed를 찾아와 그와 합세했다. 그후 그는 그의 수종자와 12명을 Medina로 보내 750명의 개종자를 얻었 두 번째 회심자가 되었다. ▶ 622 - Muhammed는 Mecca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Medina로 이주했다. 그곳은 Mecca에서 북쪽으로 약400Km 떨어지 오아시스로 이슬람이 성장하는 중요한 환경적인 요소를 제공했다. Medina에는 아랍상인 그룹과 유대상인 그룹 사이의 싸움으로 사람들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으며 유목민들이 정착하면서 도시의 도덕적인 윤리가 흔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Medina 사람들이 Muhammed를 받아들이는 환경적인 배경이 되었다. Muhammed 역시 그곳에서 유대상인들과 싸움이 있었고 이것을 계기로 그의 가르침이 바뀌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같은 음식 습관과 풍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형제요 친구라고 했었으나 이후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했다. 또한 이전까지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었으나 이후에는 Mecca를 향해 기도하도록 했다. 그래서 아직도 Medina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기 위해 표시해두었던 것이 가려져 있고 다시 Mecca를 향해 표시되었있다. 또한 Muhammed는 Mecca를 떠나기 전 모슬렘 과부가 이교도에게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결혼했으며 그 후에도 Medina의 거상의 두딸들과 결혼했으며 다른 모슬렘과부들과도 결혼했다. Muhammed는 Medina에서 건축했던 집은 그와 그의 가족들이 Mecca로 옮긴 후 Central Mosco가 되었다. 그가 Medina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으나 그들중 대부분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피신해온 사람, 상인들 속에서 힘을 얻으려는 사람 등 다른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한 사람들이었다. ▶ 630 - Mehammed는 Mecca를 향한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Mecca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623년), 다시 300여명의 군사를 직접 지휘하여 Mecca를 정복했다.(그러나 한때 그는 그곳에서부터 산속으로 피신하기도 했었다.) 이로서 그는 Islam에 Pilgrim제도(성지순례)를 확립했다. ▶ 632 - Muhammed가 사망. ▶ 632-634 Alb-Bakr가 모슬렘의 수장으로 2년 동안 지내면서 모슬렘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제압해 나갔고 Muhammed의 가르침들을 모아 "Qur'an"을 만들었다. ▶ 634-644 Umar가 수장으로 있으면서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 644-656 Othman이 수장으로 북아프리카, 사이프러스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다수의 문건을 "Qur'an"으로 단일화시킴. ▶ 656-661 Ali가 수장으로 있으면서 Muhammed의 조카와 사위들 사이에 수장권의 계승에 대한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 "Shiites(시아파)"가 생김. 지금까지 선거로 선출하던 수장을 Muhammed의 자손으로 제한하여 계승해 나감. 그는 정복에 치중하지 않았으나 후반에는 북아프리카, Mosoko를 정복했다. ▶ 661-750 시리아의 Umayyid가 수장으로 스페인까지 세력을 확장함 ▶ 732 - 프랑스 중부 Tours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더 이상의 확장이 중단되었다(-759년 까지) ▶ 750-1258 바그다드의 Abbasid수장의 주장으로 의약(Alcohol을 발견)과 과학의 연구에 주력함. ▶ 850 - 모슬렘으로의 개종보다는 세금의 징수에 치중하는 평화적인 확장에 주력하며 상인들이 중국과의 Slik Road 무역이 시작됨. ▶ 873 - 12번째의 Imam이 5살 때 사라짐. 모슬렘은 그가 하늘로 승천했으며 심판 때에 다시 온다고 함. ▶ 975 - 이집트의 카이로에 최초의 이슬람 대학 "Azhar"를 건립. ▶ 970-1080 시리아의 Seljuk(터어키출신)이 팔레스틴, 이라크를 다스리면서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하며 세금을 징수하던 것에서 강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따라서 성지 순례가 불가능하게 됨. ▶ 1058-1111 Al Ghazzali이 이슬람을 철학적 논리적으로 체계화함. ▶ 1096-1099 비잔틴의 성지 순례자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팔레스틴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파견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을 점령함. ▶ 1171-1187 Saladin이 모슬렘 왕국을 제건하여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을 점령함. ▶ 1220 - 몽골의 징기스칸의 공격이 시작됨 ▶ 1300 - 수장의 아들이 다시 스페인으로 피신해 스페인을 이슬람 왕국으로 만들어 1031년까지 통치했고 그라나다는 1492년까지 통치했었다. 모슬렘이 대부분의 스페인을 빼앗김. ▶ 1280-1480 몽골이 이슬람을 받아 들였고 모슬렘들은 인도네시아에까지 무역과 Sufi이슬람 선교사는 벵갈과 카작키스탄에까지 갔다. ▶ 1453 - 오스만 터어키가 다시 점령하면서 터어키의 콘스탄티노플을 현 이스탐불로 개명했다. ▶ 1517 - 오스만의 제국이 시리아, 이집트, 터어키를 1914년까지 지배했었다. ▶ 1789 - 나폴레옹이 이집트와 인도까지 정복했다. ▶ 1817-1892 Baha'ullah가 "Ba'hai"(이슬람의 한 종파)를 만듬 ▶ 1840-1908 Mirza Ghulam Ahmad가 "Ahmadiyya"(그리스도인을 강하게 반대하는 항목)을 만듬. ▶ 1914-1918 오스만 왕국이 끝나면서 중동에서 종족, 부족들 간에 수 많은 전쟁들이 발생했고 영국, 포루투칼, 프랑스가 중동을 지배함. ▶ 1932 -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이 건립됨 ▶ 1948 - 이스라엘이 건립됨 ▶ 1979 - 이란의 종교혁명 발생(시아파의 호메이니옹) ▶ 1991 - 걸프전쟁(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
창골산 봉서방 |
첫댓글 가져 가실 때에는 꼬리글을 부탁 드립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소중한 자료 잘 쓰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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