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도중에 가까스로 작은 나무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득한 낭떠러지를 바라보면서 소리를 했습니다. `하나님 만약 살아 계시다면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믿겠사오며 당신이 살아 계신 것을 증거하며 살겠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인간이란 위기에 처하면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아닙니다. 정말 저를 구해 주시면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간증하겠습니다.`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의 결심이 대단하구나, 정말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네 저는 정말 당신만을 믿겠습니다.` `좋다! 너를 구해 주마. 이제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아라.` 이 말을 들은 사나이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거기 다른 분 안 계셔요?`
신앙이라는 개념은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의 약속과 그 분의 인격을, 그 분과의 관계를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어느 날 한 사람이 폭포에 줄을 매달고 곡예를 하고 있었습니다. 긴 장대를 들고 출렁거리는 줄 위로 걸어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장대를 들지 않고 맨 몸으로 걸어갔습니다. 군중들이 우뢰 와 같은 박수로 격려를 했습니다. 그때 곡예를 하던 분이 `내가 이 줄 위로 사람을 업고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다들 박수로 화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제 등에 업혀서 이 줄을 건널 사람 한 분만 나오십시오.`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린아이가 아저씨의 등에 업혔습니다. 아이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듯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 참 희한한 일이다` 하면서 꼬마 아이가 가까이 왔을 때에 물었습니다. `얘! 너 무섭지 않던?`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너 참 용하구나. 그 높은 낭떠러지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두렵지 않니?` 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이 분이 제 아빠거든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위기는 절망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기회도 됩니다.
위기를 대처하는 반응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절망하거나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노숙자가 되는 것이 그렇습니다. 집에 안 가려고 합니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위기를 쉽게 넘기면 평생 낙오자가 된다. 위기가 올 때 정신 차려야 한다.
아랍 속담에 `해만 밝게 비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가 오듯이 슬픈 날이 있고 외로움과 아픔의 시간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황폐화 되지 않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게 하십니까?
첫째로,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양들은 배가 부르거나 기회만 주어지면 바위나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위태로운 곳인데도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노는 것을 그들은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양에게는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기본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 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합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성도는 천국을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처럼 살기를 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 원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성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서 높은 정상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높은 산으로 등정하기를 원하십니다.
미국 격언에 `NO cross, no crown -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높은 곳에 올라가게 됩니다.
둘째로, 골짜기는 물의 공급처이기 때문에 통과하게 하십니다.
낮은 곳에는 항상 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등산을 할 때 물을 아래서 가지고 가야 합니다.
골짜기는 근원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골짜기는 좋은 목초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기 위해서 골짜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골짜기는 눈사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물이 범람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그리스도인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골짜기에 있다면 바로 그곳이 감사할 수 있는 장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깊은 암흑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요 16: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 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 `믿음을 갖고 살면 절대로 환란을 당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도 세상에서는 어려움을 당했다. 너희도 세상을 살아갈 때 환난을 당 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좋으니까 위기가 없다는 말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좌절과 실패와 피곤한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삶의 일부입니다.
위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면제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건 악한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위기가 옵니다.
마 5:45절 말씀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 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가 내리는 것처럼 믿는 자들에게도 위기가 있다는 사실을 꼭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왜 하필 내게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항변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 어떤 유익을 위해서, 무엇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고난을 주셨습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고난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의 밤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마치 터널을 지나가는 것처럼,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나오는 출구가 있습니다. 예)노르웨이에 30분 동안 자동차로 25키로를 달리는 터널이 있습니다.
벧전 1:6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시련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잠깐 시험을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잠깐 고난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 니다.
두 번째로, 역경은 언제 다가올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생각지 않을 때에 옵니다. 최악의 시간에 위기가 오는 것이 상례입니다. 카센타 앞을 지나갈 때 차가 고장이 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대개의 경우 밤 열 두 시를 넘어서 고속도로를 주행할 때나 전혀 예상치 못했을 때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또 급하고 바쁜 시간에 사고가 납니다. 어려운 일이란 예상할 때가 아니라 뜻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고난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벧전 1:7절 말씀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불 속에 집어넣는 금도 제련소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정결케 됩니다. 순도 99.9%의 금을 순금이라고 말합니다. 이 순금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불 속에 들어가서 제련되는 과정을 통해서 점점 순금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땅에서 신앙인 들이 당하는 시련은 불로 연단시키는 금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성숙되어 갑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정상적일 때는 마치 자기 공로로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예배, 헌금,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금주에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얼마를 드려야 할까요?
적어도 1년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힘들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1년안에 받는 월급의 반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병원에다가는 얼마든지 드립니다. 그러나 건강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이것이 건강한 두려움입니다.
골짜기에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바랍니다.
골짜기를 지날 때 주시는 약속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세 가지 있습니다.
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환경은 우리를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환경은 다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 내가 기준입니다. 나보다 더 배 나온 분들이 살이 찐 것입니다.
누가 제일 부자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내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환경이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십시다.
2.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 이라`고 말씀합니다.
사 43:2절말씀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아 계시면서 `아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고 있는 나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구약으로 말하면 `성막`을 말합니다.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에 오셔서 성막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왕국에 살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내 속에 거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는 양을 인도할 때 쓰는 도구인데 지팡이 끝은 오목하게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양이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나오지 못할 때나 낭떠러지에 떨어져 있을 때, 그 굽어진 지팡이의 윗부분으로 양의 다리나 목을 걸어서 건져냅니다. 막대기는 맹수 의 습격이 왔을 때, 맹수를 처리하기 위해서 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방어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보고 힘껏 싸우라고 하시지 만 우리가 힘에 부쳐서 힘들어 할 때에는 주님이 직접 나서서 우리의 영적 전쟁을 도와주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이신 주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친구나 어느 누구나 주님이 주시는 위롤 를 주지 못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 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 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안식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