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오라
(마 11:25-30)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선의의 친절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아이들에게조차 ‘아무도 믿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불신의 시대를 사는 것만큼 불행한 삶은 없습니다. 불신은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희망을 앗아가 버립니다.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각자가 고립된 채 살아갑니다. 불안과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을 느낄 때 감정은 ‘화’가 많아집니다. 작은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다툼이 되곤 합니다. 뉴스를 보거나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사람들이 화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성격 때문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때 크게 화를 내게 됩니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하기도 합니다. 나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 안정을 방해받을 때, 그리고 존중 받지 못하거나 권위에 도전한다고 느낄 때 화를 냅니다. 놀라게 하거나, 방해 받거나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화를 내지요.
요즘 국회에서는 한 사람의 격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고 있는 사건을 두고 여당과 야당이 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병대원 순직 사건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이 크게 화를 내는 바람에 수사가 이상하게 흘러가면서 특검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시끄럽습니다. 유난히 이번 대통령은 격노할 일이 많은가 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화를 내면 일이 꼬이게 됩니다. 대책도 없이 화를 내기 때문에 정치가 마비되고 국민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화를 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국민이 화를 내면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걸핏하면 ‘격노’했다고 하니까 국민들이 비웃습니다. 화를 내지 않고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신뢰의 사회 관계를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부터 서로 믿고, 지지하고, 공감하면서 평화로운 관계를 만들어갑시다. 불신은 삶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도 ‘관계’이기 때문에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사회관계의 불신이 때로는 신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온전히 믿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의심하면서 믿는 척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불신자 청년이 산길을 걷다가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떨어집니다.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달려 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시면 열심히 교회 다니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믿고 따르겠느냐?’ ‘예, 살려주시는데 무조건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러면 잡고 있는 손을 놓아라.’ 청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합니다. ‘미쳤어요? 떨어져 죽게.’ 믿는다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불신하고 내 생각대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축복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약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엄마 품에서 행복하고 두려움이 없고, 만족합니다. 어린아이의 조건은 불안, 두려움이 많을 것 같은데 어떻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엄마를 무한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신뢰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이성과 의지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신뢰합니다. 말소리, 손길, 심장 소리를 들으면 이미 신뢰가 생기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의 모습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 25절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어린이들이기도 하고, 세상의 약하고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보호,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에게 구원계획을 감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지혜로 구원을 얻을 줄로 착각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생각에 매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낭떠러지에 떨어진 청년 이야기를 합니다. 청년이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탁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나를 믿느냐고 물으시면서 ‘그 손을 놓아라’고 하십니다. 그 청년은 어떻게 했을까요? 처음에는 ‘미쳤어요. 이 손 놓으면 죽게요’라고 거부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거기 다른 분 안 계세요?’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할 줄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없습니다. 엄마를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맡깁니다. ‘절대 의지’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들인 사람은 가난한 사람, 세리와 죄인이라고 비난 받던 사회에서 억압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자신을 주님께 의지함으로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첫 번째 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앞에서 예수님은 아이들을 축복하시며 ‘천국은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막 10:14) 어린아이는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세상에서 궁핍하고, 병들고, 억압받고, 차별 받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이런 사람들이 차지한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밖에 도움을 청할 데가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절대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들며 순종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합니다. 아마 ‘내 생각에는 이런 것이 아니다’라며 거부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아멘’하지 못하고, 이해하고 따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은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믿고 아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천국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주님은 찬양하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가지만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은 ‘어떻게?’라며 의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십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다’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우리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 계명이기도 하고 삶의 짐이기도 합니다. 어떤 짐이든 우리가 고통을 느낀다면 주님 안에서 쉼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쉼은 안식, 평안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물론 주님의 멍에와 짐은 쉽고 가볍다(30절)고 합니다. 주님의 멍에, 주님의 짐은 주님이 말씀하신 계명입니다. 아마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헤쳐나가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함께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청취하라’(갈 6:2)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짐을 지는 것입니다. 배려하고, 지지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나누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불신사회에서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아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도 엄마 품에서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엄마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절대신뢰와 절대 의지를 통해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