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섭 시인>>
<<이홍섭 시인>>
* 1965년 강원 강릉 출생.
* 강릉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 1990년 <현대시세계>로 시 등단.
*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등단.
* 시집 :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 『검은 돌을 삼키다』.
* 산문집 : 『곱게 싼 인연』
*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시인시각 작품상,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작품상, 강원문화예술상, 박재삼문학상 등을 수상.
<<이홍섭 시인>>
수박/이홍섭
찌는 여름날
노스님과 유발상좌는 웃통을 벗고
수박을 먹었습니다
넌닝구 사이로
내설악 바람이 숭숭 들어왔습니다
수박씨를 절 마당에 툭툭 뱉으며
유발상좌는 두고 온 한 여인의 까만 눈동자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노스님은 자꾸만
흐르는 강물 쪽으로
수박씨를 톡톡 뱉는 것이었습니다
참매미 초록으로 울어쌓고
수박씨 지천으로 널린 여름날이었습니다.
터미널 1/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폭설/이홍섭
간밤부터 폭설이다
내 살과 뼈가 된
강원도 오지 마을들은 또 두절이다
이런 날, 젊은 어머니는 백설기를 찌시고
천장에서 싸리꿀을 내리셨다
토끼 같았던 내 눈과 귀는 이내 순해져갔다
시인 이솝 씨의 행방 1/이홍섭
나무들이 허공 속으로 양팔을 쭉 뻗어올리자
후두둑 단추들이 떨어진다. 겨울이 들켜버리는
순간이다. 갑자기 양파 속처럼 눈이 시려온다
몸이 무거워진 것일까. 한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보도블록 한 장씩이 달라붙는다. 오래 전에 버린 질문처럼
안간힘을 다해 척척 달라붙는다
어쩌면 내 기억은 잘못 익은 유산균 음료 같은
것인지도 몰라. 그 속에 가느다란 빨대나 처박고 사는
나는 병든 짐승인지도 몰라. 빨대를 냅다 던져버리고 달아나면?
날아가는 새들의 발이 보인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보도블록 한 장씩을 양발에 꿰차고 바람을
거슬러올라간다. 그들이 불끈불끈 솟아올랐음을
나는 안다. 그들은 어느 숲속에다 저들의 길을 내고 있는 \것일까
여기저기서 나무들이 양팔을 뻗어올린다. 저들의
뿌리는 너무 깊게 박혀 있다. 벌받는 아이처럼
손을 올릴 때마다 후두둑 단추들이 떨어진다. 단추들을
주워들고 걷기 시작한다. 버릴 데가 없다
가난한 시인/이홍섭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내 꿈은 가난한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가난이 뭔지 몰랐으나
그냥 가난한 시인이 되고 싶었다
가난이 바다를 부르고
가난이 달맞이꽃을 열어 보이고
가난이 솟대를 날아오르게 했다
가난이 산을 부르고
가난이 절을 부르고
가난이 당신을 부르고
가난이 하늘 높이 손을 들어 올렸다
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꿈은 가난한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가난한 시인으로 왔다가
가난한 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입술/이홍섭
수족관 유리벽에 제 입술을 빨판처럼 붙이고
간절히도 이쪽을 바라보는 놈이 있다
동해를 다 빨아들이고야 말겠다는 듯이
입술에다 무거운 자기 몸 전체를 걸고 있다
저러다 영원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리를 잘라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게, 사랑이라는 게
꼭 저 입술만 하지 않겠는가
별/이홍섭
밤하늘에 웬 짐승 한 마리가 떠 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쌔근쌔근 숨소리 들리는 어리디어린 짐승입니다
애비라고, 어둠에 묻힌 늙은 짐승 한 마리도
그 옆에서 별을 핥고 있습니다
달맞이꽃/이홍섭
한 아이가 돌을 던져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했다
우리 동네 나이트에서는요/이홍섭
우리 동네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이트클럽이 하나 있는데요. 뭐 서울처럼 물 좋은 나이트는 아니구요. 그냥 동네
아저씨들과 아줌씨들이 신나게 몸을 흔들다가 눈 맞으면 껴안고 돌다가, 뭐 그러다가 스리슬쩍 자리를 뜨기도 하는 곳인데
요…
며칠 전 후배 한 놈이 나이를 건사 못하고 이곳에 들렀다가 한 아줌씨한테 제대로 걸렸는데요. 그 아줌씨는 모처럼 총각
만났다며 구두 뒷굽이 나갈 정도로 신나게 놀았는데요. 문 닫을 때가 되자 잘 놀았다며 후배놈에게 지폐를 몇 장 찔러주고는
부러진 뒷굽을 들고 휘이휘이 사라지더라나요…
며칠 뒤 후배놈이 중앙시장 앞을 지나가는데 웬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그 아줌씨가 어물전에서 고기를
팔고 있더래요. 양손에 싱싱한 산 문어를 움켜쥐고는 시장통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나요…
후배놈은 그렇지 않아도 그 아줌씨가 찔러준 지폐에서 비린내가 났었다며 쪽팔려 죽겠다고 말하는데… 이놈의 죽은 문어
대가리 같은 놈을 어물전에 내다 팔 수도 없고…
무지개/이홍섭
서산 너머에서 밤새 운 자 누구인가
아침 일찍 무지개가 떴네
슬픔이 저리도 둥글 수 있다면
내 낡은 옷가지 서넛 걸어놓고
산 너머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겠다
아픔이 저리도 봉긋할 수 있다면
분홍빛 당신의 가슴에
내 지친 머리를 파묻을 수 있겠다
서산에 뜬 무지개는
당신의 눈물처럼 참 맑기도 하지
풍매(風媒)/이홍섭
뻣뻣하게 서 있던 소나무 떼가
한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실을 때가 있다
숨죽이던 파도가
일순간, 앞 파도의 등에 올라 탈 때가 있다
긴 긴 골짜기를 내려온 바람이
뎅뎅뎅, 절간 풍경을 때리는 아침
극락보전 앞마당을 가로지르던 숫두꺼비 한 마리가
몰록, 암놈 등에 올라 탄다
북극성/이홍섭
너를 보면 목탁소리가 난다
뒤늦게 철든 중처럼
밤을 사르며 치는 초가을 단풍빛 목탁
모두가 잠든 밤, 적막한 하늘 저 멀리
홀로 떠 있는 목숨 하나
어금니를 꽉 문 채
눈물도, 서러움도 기어이 떨쳐버리겠다고
모질게, 모질게도 우는 목탁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이홍섭
젊은 날, 절에 들어와 처음 의문을 품었던 말은
무슨 거창한 화두 같은 것이 아니라
바람결에 들은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이었다.
화두를 잘못 들어 한평생 행려병자처럼 살아가야 할 스님이나
화두를 잘 들어 한 소식 한 스님이나
간장 종지 같은 머리가 깨지기는 마찬가지,
종재기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삶은 종재기가 깨지도록 가야 하는 그 무엇이기에
이 말 속에는 더덕 애순 같은 지순함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철마다 골짜기, 골짜기를 온통 뒤덮고 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뿌리를 속으로 스며드는 더덕 향 같은 것이
이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 속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초당 순두부/이홍섭
순두부 같은 밤이 온다
모질게 마음 먹어도
나는 늘 초당바닷가에 서 있다
모두가 떠난 뒤
바다소나무에 기대어
꾸역꾸역 토하던 여름밤
캄캄한 해변과
외로움에 떨던 너
모두부 같은 마음도
다 부질없다
부질없다고 너는 또 말한다
순두부가 오는 밤
어성전(魚盛田) 골짜기를 지나다/이홍섭
고기들이 날아올라
이 봄, 골골이 꽃으로 피어난 걸까
내 가는 길은 언제나 마른 물길, 흘러도 흘러도
긴 긴 한숨으로 되돌아오지만
그 어느 여울목에서 오늘처럼 이쁘다, 이쁘다 소리치면
몸 비틀며 날아올라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서러운 그대를 안고
꽃비늘 떨어지는 이 골짜기를 굽이쳐 달릴 수 있을까
두고 온 소반/이홍섭
절간 외진 방에는 소반 하나가 전부였다
늙고 병든 자들의 얼굴이 다녀간 개다리소반 앞에서
나는 불을 끄고 반딧불처럼 앉아 있었다
뭘 가지고 왔냐고 묻지만
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다
큰 슬픔/이홍섭
새들은 날아서
하늘을 품고
바람은 부어서
허공을 안는다
인간만이 걸으면서
큰 슬픔을 껴안는다
파라호 1/이홍섭
저 먼데서 누가 아픈가
잔물결이 시름시름 밀려온다
바다보다 더 깊은 파라호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고인돌, 푸릇푸릇 숨쉬고
그 위로 가을햇살이
부챗살처럼 쏟아져내린다
저 먼데서 누가 아픈가
은사시나무 이파리들, 잔물결처럼 반짝이고
고인돌처럼 서서
온몸에 빗살무늬를 꿈꾸는 그는
별/이홍섭
밤하늘에 웬 짐승 한 마리 떠 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쌔근쌔근 숨소리 들리는 어리디어린 짐승입니다
애비라고, 어둠에 묻힌 늙은 짐승 한 마리도
그 옆에서 별을 핥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