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벧전 4:10,11
제목 : 임박한 재림을 앞두고 어떻게 살 것인가? 정신을 차려합니다.
오늘 본문의 특징은 포괄적인 교훈으로 시작해서 점점 더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교훈으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마음 다짐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구체적인 일에 이르기까지를 하나씩 하나씩 보다 세세한 영역으로 그 처신 내용을 확대하여 권고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생각만을 갖고 대하면 점점 더 부담스러워질 소지가 있으나, 믿음의 마음으로 접근하면, 우리 각자에게 제시하신 이 진리의 권고가 점점 더한 감격과 감사와 감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됨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임박한 재림을 앞둔 신자의 처신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다음 주제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1. 임박한 재림을 앞 둔 신자의 처신-정신을 차림
2. 임박한 재림을 앞 둔 신자의 처신-성도의 교통
3. 임박한 재림을 앞둔 신자의 처신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
1. 임박한 재림을 앞 둔 신자의 처신 - 정신을 차림
개혁교회가 늘 언약에 신실할 것을 요구할 때에, 다른 무엇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늘 공적 신앙고백 때에 자신의 입으로 그리하겠노라고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한말을 근거로, 그리하겠다고 한 그 약속대로 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의 독자들을 상대할 때, 맨 먼저 일깨워 주고자 하는 부분이 그 독자들의 신분이었습니다. 곧 당신들은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1장의 큰 주제입니다.
그 독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1: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입은(1:18) 중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곧 인간의 수정체에 의해 -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 입니다(1:23). 복음 설교를 방편으로 일하시는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그 백성에게 새 생명을 심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백성들에게는 그 마음에 성령 하나님을 모신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신분의 고귀함이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상대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백성, 복음 설교를 방편으로 새 생명을 심으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거듭난 백성들은, 더 이상 이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지 않아야 함을 제시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이미 그 안에 능력으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들이므로, 그 감격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기 위해사라도,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망령된 행실을 버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련의 가르침을 통해, 모든 인간이 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이들과 동일한 신분을 받은 우리 또한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꾸려야 할 것인가를 지난주일 가르침 받았습니다.
지난주일의 4:1-6절의 교훈과 오늘 본문인 7-11절 교훈의 공통점은, 둘 다 인간이 만나야 할 궁극적인 시점' 을 근거로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는 개인적인 종말인 각 개인의 죽음과 그 죽음 이후에 즉각 자신의 모든 언행심사를 직고해야 하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염두에 둔 교훈으로, 중생한 신자가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러 주었습니다. 이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직고하게 될 때에 부끄럼을 당하지 않아야 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반면 오늘의 교훈은, 직전 본문의 개인적인 종말의 근거와 약간 다른 관점 즉 역사적인 종말을 근거로 한 중생한 신자의 바른 처신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종말론적 교훈은 성경 계시의 일반적인 성격입니다. 그 유명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한 바울의 교훈도 이 종말론적 교훈입니다. '종말론적' 이라는 말은, 개인이건, 역사건 주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시점을 말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는 주님의 부활, 승천으로부터 주님의 다시 오시는 그 시점 까지가 종말 시대 곧 말세입니다. 성경의 말세는 주님의 승천 이후부터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다시 오시는 재림 날까지의 종말시대입니다. 신약 성경은 이 말세에 기록되었으므로, 시간적으로는 말세 안에서 주어진 교훈입니다. 따라서 말세를 전제로 교훈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 바울 때에도, 여전히 종말론적 시대인 말세이고, 오늘 우리도 같은 말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말은 늘 개인이건, 역사건 상관없이 바로 오늘입니다. 언제 우리를 주님이 데려 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든지 오늘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시대를 한 주간 단위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 주일은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바울도,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고, 베드로에게도 주님의 재림은 임박한 현실이었습니다. 교회 또한 늘 종말론적 상황을 머리에 두고, 공적으로 주일마다 종말론적 설교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도 또한 주님의 재림은 임박한 현실입니다. 베드로 서신은 이 부분에서 있어서 보다 풍성한 교훈을 제공하고, 이에 근거하여 언약 백성들을 권고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오늘의 본문과 지난주일의 교훈의 공통점이 있는 반면, 또한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지난주일 읽은 본문은 개별적인 삶에서의 죄의 문제 그러니까 아무리 뛰어난 신자라는 평을 듣는 1세기의 신자들까지라도, 남들이 잘 알지 못할 소지가 있는 지극이 개인적인 죄의 문제를 끊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엄중한 명령을 들었습니다. 죄는 언제든지 지나간 날들로 충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 만나는 교훈은 일반적으로 쉽게 드러나는 부분에 대한 처신입니다. 사실 신자라고 할 때에는 그 인생의 대부분을 교회와 함께하기 때문에, 조금만 유심히 살펴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열심 하는가? 아니면 적당하게 그저 신자인 모양만 유지하고 있는가? 자신을 드러내는 발판으로 교회를 이용하는가?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는가? 말씀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의 존경심을 지니고 있는가? 선포된 복음에 자신의 삶을 구푸려 순종으로 가고 있는가?의 여부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 신자는 무릇 교회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므로, 그가 속한 교회에서의 처신이 입으로만 아니고 실제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바른 처신인가를 교훈한다는 점에서, 지난주일 설교와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신자의 각각의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입니다. 물론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 어머니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교회가 나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와 별개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거짓 교회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책임이 있고, 참된 교회로 연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벨직28항).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중심은 마땅히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교회로 모으십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일생을 두고 자신의 삶의 근거지가 되는 교회에 속한 백성이 그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중생한 신자로서의 바른 자세인가를 교훈 받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처럼 소중한 도리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말씀 드렸듯이, 이 교훈 또한 베드로 사도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소견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주님 곁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뼈저리게 익혔던 사람이 있다면, 베드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가르침의 신실한 순종자이고, 그 가르침에 자신을 묶는 겸비한 백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이 교훈은 주님께서 하신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의 교회적 적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도 종말론적 심판을 근거로 제시된 것처럼, 오늘 본문도 역사적인 종말을 근거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비유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독특한 상황을 고려하면, 여러 부분에서 교회적 교훈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전제로, 베드로는 정신을 바짝 차릴 것을 권고합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여러분의 삶과 사고를 명확히 하고, 이 모든 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누구에게 이렇게 정신을 바짝 조이라고 하는 것인지를 상기하여야 할 필요가 오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신자" 라는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이 가르침은 그냥 마음만이라도 굳게 세우라는 정도로 끝나는가 할 때에, 뒤이은 일련의 말씀을 볼 때,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자가 제 정신을 차린다고 함은, 자신을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면전에 세운다 함이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살기를 작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신자가 본래 신자의 모습을 찾으면,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할 때의 첫 번째 모습은 그것은 서로를 열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함으로 서로에게 죄가 틈타지 못하게 하고, 죄를 빨리 회개하게 함 곧 끊게 함으로 허다한 죄가 덮어지게 함입니다. 잠언 10:12절의 인용입니다. 그리하여 사단의 역사는 설자리를 잃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증거만 풍성하게 하는 일입니다. 실로 정신을 차린다 함은, 자신을 하나님 면전에 세우는 일에 열심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밤이 지나고 동녘에 해 떠 오르면 잠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듯이,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는 그렇게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게 됩니다. 바울의 권고대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것을 알고 현실을 대처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함이 빛의 갑옷을 입음입니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열매이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자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신자" 라는 구체적인 또 다른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서로 상대를 대할 때에 새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새 사람으로 상대를 대한다고 할 때에 드러나는 가장 현저한 증거 중 하나는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곧 2:11절에서 제시된 것처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상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상대를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대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니 원수라도 사랑해야 할 것이므로, 형제를 두고 특별히 한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을 두고 은근히 라도 원망하고 공격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제어를 받습니다.
2. 임박한 재림을 앞둔 신자의 처신-성도의 교통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신자" 의 모습이 점점 손에 닿는 부분으로, 점점 더 살가운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정신을 차린 신자의 구체적인 모습은 성도의 교통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배웁니다. 다른 말로는 은사를 따라 봉사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하게만 보아도 이 부분에 더 많은 계시를 제시함으로 이 진리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통을 다루는 본문 10, 11절을 살펴봅시다. 이 말씀 정말로 영광스럽지않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들이 마치 이미 대단한 무엇인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전제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도무지 받을 가치가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분에 넘치는 호의를 나타내심으로 실로 대단한 것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분에 넘치는 은사들을 다 받았습니다. 받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로지 은혜로만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이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과 재능을 말합니다.
자신이 볼 때에는, 변변찮아 보이는 이 선물들과 재능들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는 것이냐? 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다 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은사와 재능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하나님을 아무 능력도 없는 세상의 지도자처럼 평가절하 하는 악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얼마만한 크기나 능력이 되었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면, 그것은 신령한 것입니다. 소중한 것입니다. 고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길목에서 반드시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겨야 할 진리는,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형제와 교회를 섬길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너무 소중하고 고귀한 그리고 어느 누구의 은사나 재능 못지않게 탁월한 고유한 복을 받았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1장 2절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찌어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주심이 우리 교회에, 우리 각자에게 실제로 임하여 있다면, 깜짝 놀라겠습니까? 언제 그런 복을 우리가 받았느냐고 항의 할 것입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아멘 하는 믿음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신령한 복이 넘치도록 부어졌습니다. 내 느낌상 그런 것 같아서가 아닙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는 이를 아멘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신자의 정상적인 믿음입니다. 무릇 신자는 현실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정확한 현실은 없다는 것을 알고 믿고 따르는 특성을 갖습니다.
바로 이 베드로를 통한 넘치는 은혜와 평강의 축복선언이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 중에 현실화되는 것입니까? 그 복의 하나가 바로 우리 각자에게 부어주신 은사들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축복선언에 대해 풍성한 답을, 다양한 은사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모든 회원들에게 그들의 나이와 환경, 그들의 지혜와 시간, 그들의 자라난 배경과 성격까지를 감안하셔서, 교회 안에서 형제를 섬김으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부어주셨습니다.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선물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이 복을 주심으로, 그 복을 나누는 헌신을 통해, 주님은 그것들을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발로 사용하셔서 교회와 동료 회원들을 섬기십니다. 도와주십니다. 격려하십니다. 경고를 받게도 하십니다. 그리함으로 마침내 11절의 지적대로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로 시작되었습니다. 종말을 전제로 우리의 섬김과 헌신을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후서3:8-11 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이를 통해 현재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때, 다 회개하기를 바라서 기다리고 계시는 때임을 통보받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참으심과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따라서 4장 3절에 언급된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 행위들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각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 은사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카리스마'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영광을 의미하는 '카리스' 라는 헬라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은사는 진실로 선물입니다! 이 은사들은 관대하게도 하나님의 선함을 받을 가치가 없는 이들에게 주어졌으며,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10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를 서로 간에 선한 청지기와 같이 봉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봉사' 란 단어는 원래 헬라어로 모든 봉사에 관련된 단어의 기본 관념이 된 어원입니다. 베드로는 "서로 봉사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무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이 세 직분은 각각의 은사를 따라 회중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이 주된 사명입니다. 이런 직분의 신실한 수행이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향해 서로 봉사하라고 하신 그 요구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봉사입니다.
모든 신자 된 회원들은 각각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사용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10절에서 “각각 은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심으로 우리는 봉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지만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결코 자만하거나 스스로를 높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속으로라도 나 없이는 안 될 것이라는 식으로 과대평가 하거나, 나야말로 이것을 할 줄 알며 저것도 할 줄 안다는 등의 오만한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는 식으로 결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며, 왜 자신에게는 이렇게 적은 은사가 주어졌는지 푸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어떤 이유도 우리 모두에게는 전무합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교만한 자도,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자들도, 둘의 공통점은 다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는 불신앙에 속하여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가 당대의 주변에 있던 '선한 청지기에 언급하고 있음을 봅니다. 선한 청지기는 자기욕심을 따라 처신하지 않고, 그의 주인의 자원을 잘 관리하는 사람을 말하는 당대의 용어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달란트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이는 우리에게 신실하고 선한 청지기이자 종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르고 사악한 종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그 은사에 따라 어떻게 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불신실한 종은 자신의 은사를 땅에 묻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받은 그대로 돌려드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은사들로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위험도 존재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를 감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더해서 선한청지기는 그에게 주어진 은사를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최대화 할 수 있는지 찾는 자입니다. 되는대로 하지 않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각양 은혜'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사가 다양한 면을 지니고 있으며 무한한 변화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의 몇몇 편지에서 우리는 그 은사들의 종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리스트가 매번 다를지라도 이는 회중들에게 다양한 은사가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심지어 각 은사 자체가 사람에 따라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2명의 사람이 같은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고 그 은사에 따라 일한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다른 인격에 의해 같은 은사라도 다양성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견해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살펴보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한 지혜로 얼른 보면 그것이 그것 같아 보이는 눈송이도 좀 살펴보면 한 송이도 같은 송이가 없을 정도로 다르고 구분되는 패턴으로 만드신 것처럼, 그분의 백성들에게 은사들을 무한히 다양한질과 스타일과 은사의 조합으로 베푸셨습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하나님의 각양 은혜에 대해서 의미한 것이며 진정 각양으로 다르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의 본문에서 신자들은 이러한 은사들을 통해 서로를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청지기로 봉사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베드로가 영적 은사나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에 어떠한 구분도 하지 않음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낭독했던 출애굽기의 한 부분을 살펴봅시다. 다른 내용들과 함께 주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친 예물로 성막을 만들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이 모든 일을 관장할 일꾼으로 지명되었으며 이들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님을 통해 은사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출애굽기 35장 31절) 그들의 이름은 브살렙과 오홀리압입니다.
주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시고 이 두 특별한 능력을 받은 이들은 한순간에 그들의 특별한 능력의 핵심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출신지파를 보면 다양함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인 브살렐이나 단 지파인 오홀리압에게 어떤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가정의 모든 회원들을 사용하십니다. 설혹 교회 안에서 조차 소외감을 느끼는 회원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자나,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회원 간에 나타나는 죄인들의 악일뿐입니다. 그가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6장은 이를 명백히 해줍니다. 2절에서는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남은 백성들이 단순히 뒤에 앉아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에 그들에 대해 우리는 출애굽기 36장 3~5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 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정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먼저 우리는 이처럼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는 명백한 실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각 회원들은 무언가를 가져오고 부모들은 그들의 자식들에게 그처럼 하기를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적 삶을 사는 참된 묘사를 표현합니다. 마침내 필요로 하는 것보다도 많이 모였습니다.
어디서 그들은 이처럼 신속히 가져올 수 있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에게서 부터였습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사역하사 자발적으로 동참할 마음을 주시고, 그들 역시 이기심보다도 먼저 타인을 배려하고자 하였고, 교회 세우는 일에 마음을 두고자 한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6장에서 그들이 자원하여 심지어 동시에 가져오게 됨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안에서 사역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발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심에 즐거이 그리고 신속하게 순종하였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자신의 헌신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출애굽기 36장에서 우리에게 묘사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과 심지어 그 이상을 성경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 명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비록 죄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그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산에서 이 모든 가르침을 받을 때 그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둘러싸고 춤추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목이 곧은 백성들의 곁으로 가시길 원하셨고, 그분의 성령님의 사역으로 심지어 그들의 마음 안에서 역사 하셔서,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사 그들이 특별한 예물을 자원하여 각자 모세에게 가져 오게 하셨습니다. 언약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두신 것들임을 바로 알고, 이를 행동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주인의 것을 훔치는 악한 청지기가아니라, 주인의 뜻을 따라 봉사하는 선한 청지기임을 행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고귀한 피를 흘리시고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으셨지만 또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탄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분은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고 그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건설하게 하게 합니다. 이는 모두 그분의 사역이며 우리의 사역이 아닙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를 돌이켜 보면 얼마나 우리가 가치가 없는지를 알게 되고, 이는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우리의 은사로 이 모든 은사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더욱 적극적이 되게 합니다.
교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매주 주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는 어떻게 이를 함께 세울지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이 목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지은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교회를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찬송은 어른들을 경성시킵니다. 아이들의 교리문답 암송은 어른들을 자극하고 진리를 다시 청취하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아이들이 예배에 신실하게 참여함으로, 교회는 후대의 교회를 보존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젖먹이라도 얼마든지 교회를 섬길 수 있음을 봅니다. 시편 8편 2절에서 말한 바를 생각합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 아이들 역시 어린 나이에도 섬기며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예배 시간에 참여시키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그들 역시 신자의 일원임을 배워야 합니다.
이제 베드로 전서 4장 10절을 다시 봅시다. 게다가 저는 베드로가 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더 뛰어나 보이며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공헌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참여하길 바라십니다. 몸 안에서 각 장기들이 각각의 역할을 합니다. 어떤 한 장기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은사를 받았음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을 받았고 그 분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은사를 받았음으로 우리는 봉사를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만 아닙니다. 그들에 의해 세움을 입은 자들만 아닙니다.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온 백성들도 교회 세움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회원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들로써 각 회원들은 서로 간에 하나님께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봉사하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 오전 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3.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의 처신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
신자가 자신은 신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함이면, 베드로 서신의 전제대로 자신이 중생한 백성임을 자각하고 이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 삶의 현실에서의 보다 현실적인 처신은 무엇입니까? 그 내용이 11절로 이어집니다. 다소는 부담이 있을 수 있지만,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가르침이며, 넘어설 수 있다면, 정말 놀라운 복을 누릴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몇 가지 은사들에 대해 언급 하였습니다. 그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라고 명령합니다.
여기 앞부분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는 기본적으로, 당대의 교회의 목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쉬운 번역은 “설교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하고" 입니다. 강단에서 제발 세상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온갖 세상 이야기, 자신 철학, 자기 경험, 자신의 지식이나 자랑하고 있으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교훈은 일차적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라고 세움을 입은 말씀 봉사자들이 자신들이 맡은 직무에만 신실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그가 받은 은사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이 의미를 확대하면,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해당됩니다. 특별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왕이고, 제사장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따라서만 살아야 하는 선지자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교회의 회원들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이 명령 누구에게 이렇게 하라고 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새기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믿음 하나에 목숨을 실제로 건 자들입니다. 직장도, 돈도, 명예도, 안정된 생활도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며, 그러기에 주 하나님을 믿음을 앗아가거나 약화시키는 그 어떤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그것을 다 벗어던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 하나에 목숨을 건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입에서 어떤 말만 나오겠는가 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제발 입을 벌려 말을 하려거든, 그 말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고백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은덕과 보화를 나눔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취사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복입니다. 다소 힘들게 느껴지고 짐스럽다 할 수 있으나, 이것이 신자에게 요구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다거나, 잘 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한다거나 하는 것은, 여전히 내 정욕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한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연장 선에서 봉사의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을 통해, 그 발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면,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처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궤계에 넘어간 죄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봉사 곧 일을 할지라도,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하나님만을 드러내기 위하여 움직여야 합니다. 거기에 어떤 인간적인 생각도 파고 들 여지가 없습니다. 결국 모든 영광과 모든 감사는 하나님께만 돌려지게 합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탄할 일입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봉사에 있어 적극적이 되는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역하심의 결실입니다. 이는 사도 베드로가 이 부분을 11절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마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분명히 모든 영광은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사가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합니다.
이것이 오늘 오전 설교에 앞서 낭독한 출애굽기 35, 36장에서 아름다운 방식으로이루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사 그들이 자원하여 모세에게 오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안에서 함께 거하시기 위한성막을 짓기 위해 일꾼으로 보내셨고 그곳에서 번제물의 피를 흘림으로 주님을 나타내는 화목제를 드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이 신약 교회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가 거듭나서 더 이상 이기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기를 원하며 그곳에서 다른 이들을 위하고, 우리 모두의 은사로봉사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그 자신들을 교회의 가르침과 권징에 복종시켜야 하며, 그 목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하나님께서 같은 몸의 지체로 살도록 그들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5] 형제와 자매를 세우기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벨직28항)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자는 오늘 광주개혁교회에 모였습니다. 분명히 신자로서 매순간 존경하고 각 회원이 서로의 짐을 자신의 은사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함께 이 오전 설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