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님께서는 분명히 명.청시대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일제시대'에 경험한 '식민적 경험의 예행 연습'인 양 이야기하곤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님 스스로가 조공관계라는 전통시대를 제국주의시절의 통치방식에 비교하면서 유사한 양 이야기 하셨던것 아닙니까?
제 글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읽어 주셨다면 조공외교와 직접 식민통치가 왜 다른지를 조명하자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전통시대에 제국주의적 해석을 끌어들인다라? .....오히려 제국주의 시절의 직접 통치라는 상황이 틀린것에 조공외교라는 논제를 끌어들이면서 '식민적 경험'이라는 것에서 '유사할 것이다'라며 끌어들인 것이 누구였습니까?
2. 조공제도가 명목적 통치이고 청이 조선에 대한 정책을 바꾸기전까지도 청인스스
로 조공제에 대한 성격을 말을 하였습니다.(황제의 책봉을 받은 조선왕이 통치하고
자신들은 관여하지 않는다라고요)그렇지만 이 조공제도 자체가 모순적인 것이라는것
은 이미 이때 서구에 의해서도 일본등에 의해서도 질문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왜
속국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이 속국을 최대한 자치권을 보장한다.간섭안하는 선하에
서의 속국의 의미라고 하지만 여전히 이 속국은 국가간에서 당시 청국보다 우월한 나
라가 나오기 전까지는 조선은 오직 청국에게만 사대를 해야 했습니다.
-----> 그렇다면 당시에 청국 이외에 조공관계를 요구하는 다른 국가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당시 조선시대에 조공관계를 개설해야만 관계교류를 허용하는 다른 세력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고구려는 북위와 양에 모두 조공했고, 고려시대는 거란침입 이후에 요와 송에 모두 조공을 바쳤습니다. 조공을 요구하는 다른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조선시대 같은 경우는 과연 명나라나 청나라 이외에 명목상의 조공관계를 감내하면서까지 관계를 터야할만한 세력이 있지도 않았다는 점을 간과하시는군요.
그리고 왜 속국이라는 것이죠?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 역시 정치적으로는 단순한 명목상의 속국이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칭신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죠.(중국과의 무역관계 및 문화교류의 허용)
그러나 님께서는 '명목상 속국인데, 이것을 속국이 아니라 하면 무엇이냐?'라면서 정치적인, 그것도 명분적인 것만 바라보신다는 점에서 님도 조선의 성리학자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습니다.
3. 물론 청국보다 강한 중국세력이나 기타 다른 민족세력이 일어난다면 조선은 그 사대대상을 바꾸
어야 겠죠. 지금까지 그런식으로 쭉 중국제왕조,북방왕조들과 그렇게 관계를 맺어왔
으니까요. 그리고 이미 변현된 청의 조선정책(이것도 청의 제국주의식지배방식,
청이 정책을 바꾸어 직접 조선을 군현화 한다는 방식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경제권,제후의 자주권,외교권등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만 전 이부분에서 너무 일본이 조선에게 행한 조선병합작업을 순서대로 말씀하시는것
같습니다. 굳이 조공관련제도에서 이런 서구식지배방식,흔히 말하는 식민지방식에서
쓰이는 이런 외교권,자주권,경제권침탈을 동아시아사 혹 전통시대에 대입할수 있을지
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 듭니다. (제글이 모순적인가?-_-;;)
-------> 모순적인 것은 둘째치고간에, "청이 조선을 군현화한다."는 도대체 어떤 사료나 어떤 자료를 근거로해서 그렇게 주장하시는 것입니까? 단순한 추리? 역사는 소설이 아닙니다. 제가 이전에도 주장한 '근거나 사료가 뒷받침 되지 않는 폐해'가 여기서 다시 드러나는군요.
그리고 외교권 자주, 경제권 침탈이라는 서구적 개념을 동아시아사 및 전통시디에 대입할 수 있냐고 물으신다면, 님께서는 서구적 '자주독립'의 개념을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조공외교'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못하십니까? 님께서 하도 그 '자주독립'이라는 서양식 개념으로 바라보시니 저 역시 그 '자주독립'이라는 서양식 개념의 기본 구성조건인 '내정의 자주권, 경제적 독립권, 문화적 독립권.'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3. 저는 남북조시대의 조공과 또 조공당사자들 북위와 고구려,당과 고구려,당과 통
일신라시기 송과 고려등의 조공관계는 어느정도 유사한부분도 있지만 또 시대적으로
달라진 부분도 많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주나라시기 조공제,한나라
시기 조공제에 이미 청나라 말기까지의 조공작태의 원형이 거의 다 나와있는것은 분
명합니다. 그렇지만 좀더 시대별로 당사자간의 동아시아의 세력구축에 따라 분명 남
북조시기,당시기,송,요,금의 남북대치시기,원시기등은 달랐다고 보이고 한문화,화(중
화)문화에 대해서도 입장이 틀렸다고 보여집니다.
---------> 달랐다는 것과 입장이 틀렸다고 보는 사료나 근거는 또 무엇이죠? 이번에도 '생각만 하고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폐해'가 드러나시는군요. 기본적으로 어느 시대에 조공을 하든 기본적으로 중국에 '칭신'을 하고 조공을 사신을 파견하여 바치며, 답례로 하사품을 받으며, 그럼으로서 교류와 무역의 허가를 받았다는 점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4. 송나라는 요한테도 서하한테도 금한테도 몽골한테도 고려한테도 정통 화(중화)민
족답지 않게 많이 낮추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금,몽골등한테는 더욱 심했죠. 우리
가 오히려 평소에 너무 중화적인 굉장하게 부풀려 생각한것 아닌가 하고 싶을정도로
송은 저자세를 취했습니다.
-----------> 저랑 지금 말장난하시자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님이 맘데로 잘라낸 앞서의 바로 글에서, '송의 힘이 약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송의 힘이 약했는데 왜 조공이라는 것을 명목상이나 받을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즉 조공관계에는 "힘의 논리 이상의 것이 있다."라는 논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냥 '송의 힘이 약했습니다~"라고 제가 한 주장을 어설프게 되풀이하시자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5. 그대신 일본은 충실한 조공국가는 못돼고 도중에 이 조공질서에서 탈락을 합니다.
물론 일본또한 임진왜란 시기까지 명나라가 차지 하는 위치를 감안하고 대중국외교에
서는 제후국이 천자국을 말하는것처럼 높임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동아시아국가
중에서는 대부분 중국에 대해 알고 있었고 어느정도 다 중국의 군주를 높여 부렀을것
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 그렇습니다. 결국 일본이 조공질서에서 탈락하는 것은, 내부적인 분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대중국교역에서 조선을 통해 중간교역을 하는 방식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조공을 바쳐서 중국과 교류를 트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조공관계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맘데로 취사선택을 할 수 있었고, 중국은 이를 응징할 수 없었다."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힘의 논리 이상이 있었고, 결국은 경제적,무역적인 필요성의 문제가 컸다."라는 명제가 돌출되는 것이죠.
이는 님 스스로가 이야기하셨던 "조공관계는 정치적이고,강압적인 힘의 논리이다."라는 점을 스스로 부정하시는 꽤나 모순적인 모습이신 듯 하군요.
6. 몽골과 원에 대해서 단순하게 경제적 이유등으로 명에 조공을 하였고 오히려 몽
골은 더욱 적극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전 여기서 경제적이란것도 하나의 무기가 될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엄청난 국력이죠.. 그리고 다소 또 전체적면에서 또 몽골의 중
국지배경험등과 비교할때 남송시기 몽골이 흥기할때와 명제국시에 몽골의 존재는 서
로 다른시기 입니다. 확실히 몽골역시 쉽게 명나라의 사직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
다. 그리고 몽골은 한번 1세기 이상 황제라 칭한적이 있었는데 저는 이러한 부분들
도 조공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자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저의 글에서 "몽골은 경제적으로 명에게 얻어야 할 것이 있었고, 의존하고 있었다."라는 논제를 통해 "조공관계 자체는 힘의 것 이상이 있다."라는 명제를 뒷받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님께서 "경제력이라는 것이 무기가 될 수 있다."라는 말로 무엇을 하시자는 것인지? 논제하고는 맞지 않는 말이군요. 님께서 제대로 된 토의를 하시려면 "몽골은 경제적으로 명에 의존하지 않았다.(저의 논거자체를 반박하는)"라는 주장을 펼치시거나 "경제적인 이유보다도 명에게 정치적(강압적)인 이유로 조공을 바쳤다.(저으의 주장에 다른 측면으로 반박을 하는)"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어야 반론이 되셨을 것입니다. 논제 이탈은 사절입니다.
7. 한일병합시기에 조선의 농촌지대 (대부분이 농촌지대였겠지만)등이나 원산,인천,
부산등이 아닌 내륙지역의 중소지역등에서도 쉽게 일본인,일본문화는 일제식민지 절
정기까지도 볼수는 없었을것이라고 생각은 듭니다.(사실 일본인들이 광복전까지 이주
했던 사람수나..일본과 청나라의 조선경제 비율등 통계자료가 있긴한데..써먹지는 못
하고 이렇게 글로 표현합니다.)
--------> 이주했던 이주민 수가 많고 경제적 침투가 강한 것을 '문화적 침투'라고 보셨던 것입니까? 통계자료의 유무 여부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연관 자체가 안되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일본 문화가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되셨던 것입니까? 정말 이것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서 허전할 따름입니다.
8. 조공이란것이 같은 조공이니 뭐 명시기의 조공은 거의 같아 보일수도 있을것입니
다. 물론 조공관계대상도 어디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그렇지만 전 명나라와 몽골,
여진,조선,유구,베트남등과 조공은 조금식 다르다고 보입니다. 특히 명나라는 몽골말
고도 비슷하게 여진등과도 시장등을 개시하며 조공관계를 맺었습니다. 저는 여진의
경우와 조선의 경우가 같지는 않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 제가 끓임없이 주장했던 반론을 또 되풀이해야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전의 토론에서 님은 조선,베트남,몽골의 조공관계는 다르다,같지는 않다~라고 주장하셨고, 저는 도대체 어떠한 점과, 어떠한 측면에서 다른지 조명해달라고 했습니다.(즉 사료적 뒷받침이나 연구)
그런데 님은 다시 또 저에게 몽골,여진,조선,유구등은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경우가 같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이런 주장을 또 반복하고 계십니다. 다시 또 제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사료적 논거나 연구를 들어보시라고 해야겠습니까?
9. 가까운시기의 역사는 일단 현대사와 매우 연결이 되기에 중시되지만 전통시대 구
시대의 역사는 그렇게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왜 그런지
(?)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도 몽골의 침입에 대해 이 몽골처줄일놈 하고 지금에 와서
심하게 분통터뜨리거나 일본과 같은선상에서 예기는 안하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
론 몽골의 고려침입및 지배가 정말 가혹했다고 역사책에는 서술은 합니다 그렇지만
~~그냥 이부분은 넘어가겠습니다
--------> 백년전쟁(프랑스-영국전쟁)의 발발시기는 17세기로 지금으로부터 300년전입니다. 임진왜란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몽골의 예는 너무나도 멀고 멀다는 것을 잘 알기에 굳이 저 역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토론의 문제에 논외의 문제라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는 백년전쟁과 임진왜란을 비교했던 이유가,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짧은 편린에 지나지 않는 사건으로, 거시적인 역사구조에 영향을 미쳤다고 규정지으려 하냐는 것이 타당하냐는 의문이었고. (즉 님께서 임진왜란에 조선팔도가 다 점령당한것이 식민적 경험을 뒷받침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셨던.)
이에 님께서는 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시려면, "임진왜란은 편린적 사건을 뛰어넘어 조선에 식민적 경험을 부여하였다."라고 주장하시고 그를 뒷받침하는 논거를 제시하셨어야 합니다.
몽골침입을 들먹거리며, 국사책에 과장이 있지만 넘어간다~라는 식으로 '대범하게'이야기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님은 삼포로..아니 삼천포로 가고 계시니.
10. 제가 이런 고전까지 인용하면 글을 쓰는데..맹자라는 분께서 왕도 왕노릇 못하
면 갈아엎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여러 동이천자, 북적천자들이 중국을
통치했고 조선시대에 성군이라고 불려지는 분이 많습니다. 일본도 그런경우라고 볼수
도 있다고 보입니다. 일본은 근척의 이웃나라이고 일본은 이 동이세력 전통세력의 오
랑캐에 딱 들어맞습니다. 이미 조선은 여진족황제를 지존으로 대하고 이었으니까요..
물론 당시에 일어난 서구의 존재및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의 발현도 무시 못하겠죠..
그래서 중국내에서도 일보만큼은 어디까지나 외세,외부칩입자이지 중국의 왕조 중화
민족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일본은 처절하리만큼 외부세력이죠.
그렇지만 말씀하셨다시피 좀 거북스런 표현이지만 일본제국역시 다민족제국국가였습
니다.그리고 일본이 조선을 계승할수는 없었지만 일본은 지금 한국에서 쓰이는 국가
개념을 거의다 창조해낸 원본인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그리고 고종,순종실록을 편찬
했고 조선사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일본은 조선을 내지로 삼으려고 하였거
나...식민지란 표현도 가능하지만 일본땅으로 만들려고 하였던것을 맞는것 같습니다.
------> 일본이 다민족 제국국가? 다민족 제국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이야기하였듯이 제국 자체는 확장을 하고 타 민족을 지배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민족을 포함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다민족의 비율이 얼마만큼 되고 어떠한 민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이겠지요.
그리고 맹자를 인용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삼천포로 가시는군요. '이민족 군주론'을 들먹이시면서. 말씀을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민족 군주들은 중국내에서도 '중국문화,제도,경제시스템을 인정했기에 통치와 호평이 가능했다."라는 점을 간과하시는 듯 하군요. 그런데 일본의 조선지배 자체는 조선의 제도,문화,경제 자체를 싸그리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짓밟고 시작한 성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고전'도 중요하지만 참고하신 '소박한 사료' 하나라도 언급해주시면 퍽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맹자의 말을 어설프게 인용해서, 다시 또 '지배층의 단순한 교체'인양 말씀하시다니요? 비교의 대상 자체가 안되는 것을 다시 또 비교하시는 것은 둘째치고간에, 일본의 고종,순종실록 편찬은 기본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의 역사편찬이 의도였다는 점을 간과하신겁니까?
그리고 프랑스 역시 알제리를 식민지라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본국의 행정개념인 주(Province)로 나누어 통치하고, 교육 및 행정권,대표 파견권은 본국과 동등하게 대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그 누구도 식민통치가 아니라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마당에 프랑스보다도 조선에 권리나 이익을 부여하지 않았던 일본의 통치를 "식민지 이상의 것이 있었다."라고 주장하시자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일본이 일본땅으로 만드려 했던 것은 권리적측면에서의 일본과의 동등이 아니라, 정신적,문화적 종속을 의도하려는 것이었다는 점도 간과하신 듯 하군요.
11. 이것은 일본식민지시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것 같습니다. 뭐 이부분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있고 심도있게 연구하신분이 아닌 단순히 반한국적 사고 가진사
람들이 다소 한국을 비하하려고만 하여 일본식민지시대를 다른 서구의 식민지보다 좋
게 보고 일본식민지시대는 조선말기보다도 좋은 시대였다 이렇게 보는것으로 알고 있
습니다.제개인적으론 이런사람들의 주장이 아주 신뢰를 함으로써 또하나의 정반대의
입자을 취하기보단 어느정도 취사선택할부분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통계자료
로 본다고 하여도 당시조선에서 사망자수등을 년도별로 체크한다고 하여도 이렇게 말
하는것 자체가 심한말씀이지만 대규모 학살은 없었던것으로 보입니다.
---------> -_-;; 대규모 학살이 꼭 있었어야 합니까? 영국의 인도통치, 프랑스의 서부아프리카 통치 그 어디에서도 대규모 학살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를.
문제의 중점은, 학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님은 엉뚱한 답변을 하시는 것이, 저는 "식민지 관료.군인의 숫자 및 비율"로 님이 말씀하시던 "일제의 조선통치가 수월했는가?"에 반박을 가했습니다. 그럼 님은 여기에 다시 반론으로 제가 제시한 그런 수치적 통계를 부정하거나 혹은 상쇄할만한 다른 자료를 찾음으로써 저의 논거를 파괴하시던지, 아니면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 일제의 통치는 무난했다고 보여진다."라고 제시할 만한 다른 근거, 혹은 주장을 하셨어야 했습니다.
12. 아 당시 광해군 관련해서 저 개인적 의견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 된것 같았습니
다. 다소정말 너무나 개인적인 글이었던것으로 평가되는데..명나라가 최강인가 아닌
가에는 음............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다시 제의견쪽으로 기울어지는것인지 모
르겠지만^^ 명나라는 남부에서도,북부에서도 동북부에서도 동쪽에서도 서북에서도,
각소수민족 진압등 사방팔방 군대를 동원하였습니다. 너무 삼대정,북로남왜만 부각되
는듯 싶은데...분명 명나라는 베트남을 잡아먹기 위해 출병하는데 영락제시기입니
다. 영락제시기는 북쪽 몽골과는 심한 전투가 있었고 동북지역에 대해서도 여진등을
초무하였습니다. 전 이런부분에서 명나라는 정말 군사적부분은 인정해야 한다고 보입
니다. 물론 명나라말기 청나라 군대와 함께 비교할때 어떠한가에 대해서 무기수준,군
기수준,명나라 군사편제당시 명나라 군사내부문제등 다방면으로 고려해야 겠죠..또
막말로 명나라가 청나라보다 무기가 후질수도 있습니다 이런부분등으로도 최강을
나눌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 예기가 정말 세나가지만 전 명나라는 지옥같은 몽
골군단을 아시아에서 해방시킨 구세주(?)로 봅니다. 사실 한반도가 몽골의 압제에서
벗어난것은 명나라 때문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 아니겠죠..아무튼 명나라의 건국
으로 다시한번 한족의 위대성이 발현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조선은 그이전시기
와는 다르게 물론 제조의 은혜를 받긴 받았지만 청이 중국본토를 차지하였어도 이전
고려처럼 홱 버리지는 않고 계속 명나라를 숭상 했던것 같습니다. 물론 이미 무르익
고 최대 정절기를 맞은 성리학문의 영향도 크고 조선인들의 송나라 사랑도 매우 한몫
했을것지만요.
------------> 님? 저번에 우리의 토론은 명의 군대가 과연 최강이냐는 토의에서, 명의 군대는 최강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뒷받침하려 하였던 저의 글에 님께서는 "좀더 사료조사를 하고 참고를 하겠다." 라는 말로 토론을 보류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뭔가 다른 논거나 사료라도 찾으셨나 했더니 다시 또 자기 생각만의 반복일 뿐이군요.
(거기에 조선인들의 송나라 사랑이라는 또 논거가 제시되어있지 않은 전제의 존재....)
그리고 재조의 은혜? 이제 이 단어에서 님의 역사 인식의 본질이 드러나시는 듯 하군요.. 왜 조선인들이 명을 그렇게 숭상해야했고, 과연 명이 재조의 은혜를 배풀 의도가 있었는지 토의하는 것이 좋겠지만, 논제를 이탈하는 행위이니 자중하겠습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저 개인적 의견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 된것 같았습니다."라고 하시는데. 제가 사료로서 반박하였을때 님이 리플로 "저와 그분의 생각이 나름데로 있기 때문에..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좀 더 조사를 해보겠습니다."라고 마지막으로 말씀을 하셨죠.(누가 님의 글과 의견을 바탕으로 마무리를 지었다는 말입니까?) 만일 그래도 님께서 "명의 군대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었다."라고 이야기 하시려면, 저는 님에게 '약속의 이행'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13. 마치며.
언제나 그렇듯이 님께서는 자유롭게 생각하시고, 논의하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논거는 제시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반론을 제기하게 만드는군요.
언제나 님께서는 자신이 자신있게 내세우시는 전제조건은 우리의 일반 인식과 많이 다르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우리가 일반적 인식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근본적인 반성이 될 수는 있으며, 새로운 시각과 사고를 역사에 불어 넣어줍니다. 분명.
그러나 철학은 자유분방한 사고를 요구하지만, 역사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명제의 틀 안에서 고찰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철저하게 조사해야하고, 인문분야 뿐만이 아니라 경제,정치 심지어는 순수과학에 이르기까지 고찰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은 분명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고 납득시키려면, 최소한의 사실에 근거한 증거나 논리적인 논거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님은 '자신의 전제'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하고, 같은 논리를 공박해야 하는, 그리고 그러한 질의와 비판에 계속해서 반론보다는 "제 생각입니다~"하면서 자신의 전제조건만을 되풀이해서 듣는 수고를 더 이상 반복할 정도로 인내심이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번의 지적을 마지막으로 저는 님의 글에 더 이상 어떠한 이의도 의문도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시대의 사고관(지배층이 역사를 바꾸어나간다는 18세기의 랑케적 사고관이나, 조공체제로서의 편입은 곧 중국의 질서에 복종하고 간섭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니시마西島의 1920년대식 사관이라던지.)을 마치 새로운 역사인식인양 이야기하는 분과 무엇을 더 이상 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님의 글에서 많이 배웠다는 상투적인 멘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님의 글에 반박하고 토의함으로서 저의 사고가 정립된 것은 분명 진실로서 그렇게 느끼니깐요.
하지만 앞으로 역사게시판을 마치 자신 전용의 '생각 표명란' 혹은 '칼럼란'처럼 여기시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적어도 주관적인 생각도 중요하지만 '객관적 지식'역시 전달해야 하는 '상식'게시판이라는 점도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생각만 적는다고 해서 모두가 아닙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마지막 당부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일 덧붙이고 싶으신 말씀이나 생각이 있으시면 메일로 보내주시기를. 이제 우리의 논쟁은 이 게시판에 의도적이든 아니든 폐를 끼치는 듯하니 말입니다.
다만 전 사료의인용은 거의 안했지만 역사를 왜곡햇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최근글들을 보면 죄다 무슨 근거로 쓴것이고 다분히 생각나는대로 쓴 추측정도 아니냐 하시겠지만 저는 그것을 저의 주장,좀 거찰하지만 학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외 실제적으로 이랬다는 식의 글은 다른 전문서적등을 바탕으로 쓴것
입니다. 하마님께서 일단 이곳에서 역사적 논의는 피하시는것 같아 저도 조심하며 꼬리말을 쓰지만 당시시대에 대한 묘사나 제도등에서는 최대한 전문서적등 현학설에 충실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쓸려고 했습니다.그리고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일부로나마 바꿔서 생각해볼려고 했습니다. 제국주의국가의시각,구일본
역사적 논의를 피한다라.... "역사적 논의"의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역사적 논의란 적어도 자신이 어떠한 근거에 바탕하여 어떠한 논리를 펴는지 보여주는 것이 최 우선입니다.그런데 자신이 어떠한 근거에 근거하였는지에 대한 언급조차 없으시면서 타자에게 "역사적 논의"를 피한다니요...
첫댓글 제가 답글을 잘못달았달아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하마님께서 먼저 토론정지를 요청하시니 일단 저도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하마님께서 지적해준신대로 제가 사료적 제시는 거의 안했습니다 지금까지 글들을 본다면 그렇게 느끼실것입니다.
님께서 죄송하실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단지 사료적 제시도 없이 역사에 관련된 주장을 편다는 것은 제가 아니라 '역사 게시판'에 계시는 다른분들께 죄송할 따름일 것입니다.
다만 전 사료의인용은 거의 안했지만 역사를 왜곡햇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최근글들을 보면 죄다 무슨 근거로 쓴것이고 다분히 생각나는대로 쓴 추측정도 아니냐 하시겠지만 저는 그것을 저의 주장,좀 거찰하지만 학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외 실제적으로 이랬다는 식의 글은 다른 전문서적등을 바탕으로 쓴것
입니다. 하마님께서 일단 이곳에서 역사적 논의는 피하시는것 같아 저도 조심하며 꼬리말을 쓰지만 당시시대에 대한 묘사나 제도등에서는 최대한 전문서적등 현학설에 충실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쓸려고 했습니다.그리고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일부로나마 바꿔서 생각해볼려고 했습니다. 제국주의국가의시각,구일본
에 대한 시각등..이부분등에서는 다소 아니 많은 무리가 있었던것 사실입니다.그리고 제가 조금찰거머리같고 말을 잘 못알아 듣기도 하지만 다소 다른 주제등에서 답글등을 달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상입니다.
역사적 논의를 피한다라.... "역사적 논의"의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역사적 논의란 적어도 자신이 어떠한 근거에 바탕하여 어떠한 논리를 펴는지 보여주는 것이 최 우선입니다.그런데 자신이 어떠한 근거에 근거하였는지에 대한 언급조차 없으시면서 타자에게 "역사적 논의"를 피한다니요...
제가 토론의 중지를 요청드린것은 더 이상의 "역사적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역사"게시판에서 "역사적 논의"를 중단한다는 것은...오히려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여튼간에 저도 저의 시각만을 남에게 강요할수는 없겠지요.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이만 줄이죠....좋은 밤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