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할범 그리고 바다와 항구 그 추상적 낭만의 단상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느가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얻어 작품화한 것으로 알려진 ‘훼드라’. 아테네 왕 테제의 젊은 왕비 훼드라가 전실 자식인 히폴리투스에게 연정을 품고 불륜의 애정행각을 벌이다가 운명에 항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종말의 이 작품이 영화로 각색되어 ‘죽어도 좋아’란 이름으로 국내에 상영됐을 때, 이는 낭만이 잉태하여 낳은 일탈된 음란성 로맨스의 극치로 평가돼 상당 기간 인구에 회자된 바 있다.
시름없이 궃은 비 내리는 낯 선 항구에서 하루 밤 풋사랑 인연으로 긴 밤을 지새우고 정만을 남겨둔 채 울리고 떠나 간 마도로스와의 첫사랑 추억을 잊지 못해 애태우는 선술집 아가씨의 하염없는 연정은 뭇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신파극의 단골 주제로 오래도록 재판을 거듭하는 장수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고도화된 기계설비의 매머드 부두와 대형화, 고속화된 선박의 빈번한 입출항, 거대한 하역장비의 간단없는 조작과 굉음에 압도되어 바다와 항구에서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이며 운치있는 낭만과 로맨스의 현장은 도심지대로 이전되고 변형되었으며 더 이상 확대 재생산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바다와 항구는 이제 더 이상 낭만과 로맨스의 대상이 아닌가?
항구는 여객이나 화물을 싣고 내리는 해상물류의 거점이요 바다는 오직 이를 수송하는 선박들이 오가는 물길일 뿐인가?
요즈음 바다와 항구를 벗 삼아 평생을 살아온 뜻있는 해운계 원로들은 그 옛날의 정감 어린 추억담을 나누며, 바다와 항구와 부두의 신고전주의적인 작금의 상업주의에 반기를 들고 실종된 낭만을 되찾자고 언성을 높인다.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언어를 매체로 하는 문학작품의 소재를 제공하는 낭만의 무한정한 보고, 바다와 항구. 윌리엄 워즈워드는 해질 무렵 칼레 해변의 고요와 적막 속에서의 다정한 님의 입김을 서정적으로 노래했고, 알프렛 테니슨은 산산조각 바윗돌이 부서지도록 휘몰아치라고 성난 파도의 노여움을 갈파했으며, 존 메이스 필드는 출항하는 뱃머리에서 다시 흘러간 옛날의 추억을 찾아 문득 떠나고 싶은 바다에의 향수를 섬세한 감정으로 읊조린 바 있다.
푸른 파도를 가르는 뱃고동 소리를 뒤로 하며 님 떠난 밤 부두에서 홀로 우는 여인의 흐느낌이 멎은 지 오래고, 굳은 약속을 남기며 다시 오마던 파이프담배 입에 문 첫사랑 마도로스는 함흥차사가 된 지 오래다. 신도 죽고 니체도 죽을 때 항구의 낭만도 부두의 로맨스도 같이 따라 죽었단 말인가. 그래, 궂은비가 항구에서만 내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근대화에 밀려 포구를 서성대던 선술집 아낙들의 입술 짙은 옛 모습들은 이제 항구의 티켓다방에서 핸드폰으로 문자 메쎄지를 보내는 마돈나로 변했고, 됫박 주전자로 기울이던 동동주 주안상은 캔맥주와 인스턴트 자판기에 밀려 옛 흔적을 찾기도 힘들게 됐으며 오색등 찬란한 샹들리에 불빛과 헤비메탈 뮤직에 테크노 댄스 음악이 판치는 항구의 밤 풍경은 심야를 유혹하는 에레나의 무도장이 된 지 오래다.
세상 곳곳에서 낭만과 로맨스는 시들고 사랑과 정서는 메마르고 그래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 의 김삿갓 식의 목가적인 운치와 풍경은 오랜 가뭄을 견디다 못해 ‘빈사의 백조’ 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긴 낭만과 로맨스, 이별의 무대와 정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양상이 어쩔 수 없이 변천해 온 건 사실인 것 같다. 그 옛날 토담집 앞 싸릿문이나 돌담 모퉁이가 아니면 신작로 어귀에서 행주치마에 눈물 닦으며 아스라이 손 흔들어 님 떠나보내던 정경이나 밀밭 넘어 미루나무 줄 지어 서 있는 강나룻 길이나 갯바람 몰아치는 포구에서 설운 사람 훌쩍 보내며 저고리 고름 말아 물고 한숨짓던 뫼별의 모습은 그 얼마나 낭만 어린 서정의 현장이었던가.
그러나 우리가 갈망하는 토속적이고 서정적 이별의 무대는 교통수단의 급진적 발달에 따라 그 장소가 크게 업그레이드(?) 되어 기차 정거장이나 고속터미널로, 연안부두나 국제여객터미널로 옮겨져 "안녕"
을 나누는 근대화된 모습으로 바뀌었고 이어서 비행장이나 국제공항으로 발전하여 "굿바이"를 하는 공항의 이별이 보편화 됐는가 하면 앞으로는 우주 공항 플랫홈에서 "아디우스"하는 초현대식 이별의 무대가 등장 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또 인간 삶의 여정에 낭만과 로맨스가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 속의 유모는 낭만의 마지막 단계에서 생산되는 생명수요 청량제라 할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옷 벗는 소리에 가장 민감하고 여자는 남자의 돈 세는 소리에 가장 민감하다고 했던가.
밤바다를 항해하느라 지친 몸으로 항구를 찾은 나그네가 지폐 몇 장을 암연히 수수하는 약식거래로 하룻밤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던 고전적 로맨스는 요원한 전설이 되었다고 치자.
한양천리 과거 길 나그네의 날 저문 주막집의 호롱불 밑에서의 하룻밤 쉬어감도 동구 밖 물레방앗간에서의 수줍음 많은 선남선녀의 댕기 풀던 맹세도 소낙비 피해 우묵빼미 느티나무 밑에서 남의 눈 피해 앙가슴 펄쳐 보이던 청상과부의 설레임도 또한 그저 이제는 곱게 접어 추억으로 나빌 때가 됐나보다.
이제 예순을 넘는 길을 걸어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상륙전야에 섰다. 그래서 뭍으로 오르면서 뇌리 속에 부각되는 다양한 형태의 사념들을 적하목록처럼 정리해 보곤 한다.
고독한 자아를 달래는 마법의 묘약처럼 가슴 속에 여울지는 낭만의 티끌들을 감미로운 환상으로 패러다임하여 허구적 로맨스를 엮어간다. 바다와 항구와 배와 사람과 여인들로 이어지는 작은 인연들을 곱게 다듬어 소중한 추억의 실타래를 만든다. 생각 날 때마다 몰래 꺼내보는 사진첩같이 퇴색한 낭만의 편린을 꿰어 풍성한 회억의 잔치 상을 준비한다.
요사이 해진 농촌의 들녘 어디에선가 서울 남산에서 마저 반딧불이가 되살아났다고 신기해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메마른 가슴에 회상의 꽃씨를 뿌려 잊혀진 낭만의 새싹이 움트게 하고 로맨스 둥지를 만들어 항구와 부두에는 사랑이 만발하고 해학과 유머가 충만한 삶의 터전을 일구어 보자.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도 시(문학, 예술)와 시인(낭만파, 예술가) 이 죽은 지식 습득과 권위적인 규율에 질식 당해 황량해진 교정을 낭만의 교육장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보이던 교사 로빈 윌리암스의 열연은 우리에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던가.
알량한 몇 낱의 지식과 위장된 충성심으로 권력자에게 기생하여 진정한 학문과 인격을 저버린 속된 관리들을 빗대 "죽은 시인의 사회"를 개탄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생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현학적 문제 제기가 될지는 몰라도, 인간이란 엄격히 말해 종족의 번성이나 승계의 본능보다 원초적 낭만에서 잉태된 로맨스의 산물이며, 이로써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은 실존적 개체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시적 정서가 고사 위기를 맞고 있는 시인도 죽고 선비도 죽은 사회에서 사포우의 서정적 시상과 밀턴의 실락원적 페이소스를 접목시켜 죽은 시인의 사회에 새로운 낭만파 시인을 탄생시키는 역사의 재구성을 서둘러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안드로 프로스트의 "좋은 길이란 평범한 길을 통해서만이 갈 수 있다"는 말을 곧잘 인용한다. 그리고 "통속적" (비범의 반대 개념으로써의 보편성 내지는 일반성)이란 어휘가 나를 상징하는 말 같아 난 이 말에 각별히 애정이 많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백호의 유행가 "낭만에 대하여"를 듣고 어머 이런 노래도 다 있네 하고 귀를 쫑깃 세운 적이 있다.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 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제목 하나는 기발하나 가사가 길어 외울 수도 없고 해서 가끔 듣기만 하고 불러본 적은 없지만 술자리나 노래방 같은 곳에서 그 노래를 곧잘 부르는 옛 직장 동료 L군을 보면 박자 음정 등 노래 실력은 신통찮지만 우선 여기에도 아직 죽지 않은 낭만파가 하나 더 있구나 하고 내심 흐뭇해 하곤 한다.
숨가쁘게 뒤돌아 보지도 않고 달려와 결승점을 앞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향해 어디에 서 있으며 또 내일은 어느곳으로 가야하는가. 시가 있고 문학이 있고 풍류가 있고 낭만이 있고 거기에 더하여 향긋한 로맨스가 아지랑이 처럼 피어나고 무지개처럼 떠오르는 유토피아- 이상향의 전설은 정말로 힘든 일일까?
아찔한 스피드 시대에 스스로 낭만파임을 자처하는 문화 예술인과 시민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름 하여 "낭만파 클럽" 이란 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다와 항구와 부두와 배를 이웃하여 평생을 살아온 해운 가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 낭보에 귀 기울일만 하며 또 업종별 소조직이라도 결성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는지.
회장이니 대표니 하는 감투나 벼슬자리는 아예 없고 비정치, 비이념, 비편파적 즉, 3비와 남녀, 국적, 직업, 학력, 종교 등 5불문이 이 클럽의 강령이란다.
삭막하기 이를 데 없고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모두가 저 잘났다고 아우성인 우리 사회를 부드럽게 위무하기 위해 시작한 이 낭만 운동은 정말로 살맛나고 인간미 넘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였는데, 각 지역별로 16군데 지부를 두고 해외지부도 결성하게 되며, 또 전국 지부는 산하에 몇 십 명 단위의 개미클럽도 운영하게 된단다. 회원의 자격은 “따지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손해 본다. 문화 예술 스포츠를 사랑한다. 식도락을 즐긴다. 지갑을 보고 친구를 삼지 않는다." 등 낭만적 지향점 20가지 조건 중 3부의 1을 충족하는 20세 이상의 남녀면 누구나 오케이다.
지능지수(IQ), 정서지수(EQ)보다 낭만지수(RQ)로 회원으로써의 합격여부를 결정한다니 적어도 여태껏 “낭만 속에서 쌀이 나오느냐. 연탄이 나오느냐. 낭만이 밥 먹이더냐. 뭐 말라 죽은 게 낭만이냐. 낭만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던 낭만에 대한 조롱이나 멸시적인 폄하는 다소 수그러들 것 같기도 하고 낭만과 낭만파와 낭만주의가 대접 받는 시대가 올 법도 하다.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상태를 일컬어 낭만이라고 정의했고 고전파와 대칭되는 낭만주의을 신봉하는 일파를 낭만파라 불렀으며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자유와 개성을 구하고 감정의 우월을 중요시하며 개성을 강조하고 중세 문화에의 부활을 이상으로 하고 무한한 자연에의 동경을 표출하던 18-19세기의 낭만주의는 이제 새로운 문예사조보다 음유시인들이 부르던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노래 곡조와 감미로운 로맨스와 사랑이야기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메마른 우리의 가슴에도 뮤즈의 밀알을 심어 시상의 화단을 가꾸고 지금까지 죽은 자의 무덤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해운계의 낭만파들을 불러 모으자. 낭만의 소낙비를 흠뿍 맞으며 망각이라는 우유 빛 강물과 영겁이라는 어둠의 숲 속으로 마지막 정배를 떠나기 전에 우리 모두 아직은 살아있는 최후의 낭만주의자가 되어보자. 최후의 로맨티시스트.
첫댓글 다녀 갑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십시오 ,행복한 주말입니다 .
제 컴이 말 안들어 글은 날라가고 다시 쓰자니 김빠진 맥주가 되어 그저 남들에게 말로 햇답니다...기가막힌 글을 쓰셨다고.......마지막 로맨티스트 화이팅!!!
과히 대작이라고까지 말씀드립니다 지식이 많으시고 경험이 풍부하시고 연륜이 있으시며 그야말로 낭만까지 있으신 샌드님 샌드님다운 글솜씨 샌드님이 아니면 절대로 이른 류의 글이 안된다고 봅니다 젊은날 이뿌장한 남자 얼굴로 항구에 여자를 얼마나 울렸을까 이런 생각까지 떠오르게 합니다 ㅎㅎ 건강하시고 오래
여자가 운적은 없고 여자 대신 늘 제가 도맡아 대신 울었답니다 요조숙녀님!
오래 좋은글 분위기 살리는글 읽게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