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분쯤 란창강을 따라 올라가자 양쪽 길가에 수많은 차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부의 말이 맞았다. 그 중의 상당수는 돼지를 싣고 온 트럭들이었다. 돼지는 졸고, 꽤액거리고, 꿀꿀거렸으며, 아예 길가에 드러누워 팔자 좋게 낮잠을 즐기는 돼지도 있었다. 길은 언제쯤 뚫리는가? 모른다. 여긴 언제부터 있었는가? 어제 왔다. 그럼 여기서 밤을 보냈단 말인가? 그렇다. 여기가 무슨 마을인가? 쩡궁마을이다. 사람들은 다들 오늘 안가도 상관없다는 듯 느긋했다. 마치 여기가 숙소인 것처럼 한쪽에선 카드를 치거나 마작을 즐겼고, 한 편에선 컵라면을 먹거나 삐루를 마셨다. 한 외국인 부부(이 부부를 드락순쵸에서 다시 만난다)는 길가 통나무에 걸터앉아 주변의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길이 막힌 쩡궁마을(왼쪽). 다리에 옌러우를 내걸고 있다(오른쪽).
졸고, 기다리고, 하품하고. 몇 시간이 될지, 아니면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내린 폭우로 전방에 토사가 흘러내려 길이 끊겼고, 지금은 그로 인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여기서 티벳에 가려면 다른 길이 없었다. 다시 길을 돌아나가 칭해성까지 가서 칭장공로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여기서 또 2~3일이 걸리는 일이다. 기다림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마 며칠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나는 평생을 여기서 기다려 할것만 같았다. 아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부가 내 앞을 지나쳐 간다. 마부는 때로 말이 차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유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막히지 않고 집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란창강가에 걸터앉아 두 시간째 강물소리만 듣다가 일어났다. 란창강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리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들은 방금 잡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다리에 내걸고 있었다. 냉장고나 냉동고가 없는 이들로서는 빙산에서 흘러왔을 차가운 강물의 수면 위쪽이 일종의 냉장고인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걸어놓은 고기들도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옌러우’라고 하는데, 이렇게 바람에 말렸다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 저렇게 허공에 매달아 놓아도 아주 썩지는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코담배.
차가 막혀 가지 못하는 쩡궁마을은 모두 35가구(150여 명이 사는)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마을이었는데, 위쪽 산마을에는 13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구경이나 하자고 올라간 산마을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개울가에 나앉은 마을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이내 경계심을 풀었다. 할머니 한 분이 손에 들고 있던 코담배를 권했다. 황토색 분말이 담긴 작은 담배 쌈지에서 향긋한 담배향이 났다. 뒤늦게 윗집에서 나온 여자 아이는 불청객을 보자 수줍음을 타는지 엄마 등에 매달려 고개를 묻는다. 이따금 고개를 들 때마다 아이는 수줍게 웃었는데, 입 주변과 이가 모두 새카맣다. 군것질을 따로 할 수 없는 이 곳의 아이들은 ‘하이궈’라는 검은 산열매로 주전부리를 대신한다. 하이궈를 한 주먹 다 먹고 나면 저렇게 입 주변과 이가 새카맣게 변하는 것이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에서 나도 이것을 한 움큼 먹어봤는데, 머루와 버찌를 섞은 듯한 기묘한 맛이 났다.
이 곳의 집들은 그 구조가 제주도와 흡사했다. 집과 헛간이 따로 분리돼 있었고, 마당에는 한결같이 마굿간과 돼지우리가 있었다. 이 마굿간과 돼지우리는 닭장의 노릇도 겸했는데, 우리 구석에는 나뭇가지를 결어 만든 닭둥우리가 걸려 있었다. 헛간에 걸친 사다리도 우리와 똑같았다. 통나무를 중간중간 도끼로 쪼아내 만든 이 사다리는 오래 전 경주 양동마을에서 본 것과 너무나 흡사했는데, 집집마다 이런 사다리가 두어개쯤은 있었다. 부엌에는 어느 집을 가든 쑤우오차(야크버터차)를 젓는 차통이 있었다. 차통은 큰것일 경우 거의 1미터에 이르렀다. 두어 시간을 산마을에서 보내고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보니, 여전히 차들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아침에 도착해 저녁이 다 되도록 길은 열리지 않았다.
돌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2시간을 달려서 다시 메이리 전망대 마을로 왔다. 저녁 8시가 되었는데도 날은 훤하게 밝다. 본래 티벳은 북경과 서너 시간의 시차가 있음에도 북경 시간을 표준시로 삼고 있다. 해서 라싸에서는 9시쯤에야 노을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도 별로 다를 게 없어서 8시가 훨씬 넘어서야 날이 어두워졌다. 느긋하게 메이리 설산이나 구경하고자 찾아들어간 카페에서는 한창 쑤우오차를 만드는 중이었다. 차통에 가락을 꽂아 젓고 있는 카페 주인에 따르면 야크 버터를 넣고 이렇게 100번 이상을 저어 주어야 차가 된다고 한다. 처음 맛보는 사람들은 야크 냄새 때문에 고개를 가로젓지만, 먹다 보면 제법 고소하고 맛있다.
당나귀의 아침식사.
아침으로 쌀죽과 티벳빵인 둥그런 ‘빠바’를 두 개나 씹어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식당 주인은 아직도 길이 열리지 않았다며 점심 때나 가라고 했지만, 가는 길에 메이리를 좀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밍융마을이라도 구경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214번 도로에서 빠져나와 란창강을 건너가야 하는 밍융마을은 지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밍융빙천’(明永氷川) 즉, 밍융 빙하를 여기서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은 세계에서도 해발이 가장 낮은 2650미터에서도 빙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빙하를 보려면 밍융마을에서도 말을 타고 2시간은 산을 올라가야 한다. 왕복 4시간이면, 쩡궁마을의 길이 뚫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밍융빙천을 품은 메이리는 윈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더친은 물론 윈난과 티벳 남동부에서도 최고의 성스러운 산으로 통한다. 옛 티벳어로는 ‘흰 봉우리’란 뜻의 ‘카와거보’(6740미터)라 불리는데, 주봉은 워낙에 험해서 등정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밍융마을에서 만난 마니차 돌리는 노인(왼쪽)과 수차처럼 돌아가는 마니차(오른쪽)
결국 밍융빙천 구경을 포기하고 다시 쩡궁마을로 왔다. 트럭의 행렬은 여전히 길가에 도열해 있다. 길은 뚫렸나? 아직. 언제 뚫리나? 곧. 트럭 운전수 한 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봉고차는 트럭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내달렸다. 바로 앞에서 불도저 한 대가 힘겹게 흘러내린 토사를 치우고 있었다. 거의 공사는 마무리 단계였다. 봉고차는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불도저가 옆으로 비킨 틈을 타 울퉁불퉁 질척거리는 길을 지프차처럼 넘어갔다. 휘유우~.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입에서 모두 한숨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길이 열렸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기다려 길이 열린 것이다. 낮 12시 16분. 이제 다시 티벳으로 간다.
티벳일기 4: 옌징, 원시 소금계곡의 다랑이 염전들
소금 계곡을 벗어난 마방의 행렬이 오르막을 올라 루띵마을로 가고 있다.
옌징에 도착했다. 한자로는 염정(鹽井), 소금우물이란 뜻을 지닌 곳이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주몽>에서 ‘고산국 소금산’이 어디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지명의 의미만 따져볼 때 옌징의 소금계곡이 드라마상의 ‘고산국 소금산’과 가장 흡사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고산국 소금산’은 가상의 지명이 분명하지만, 부여가 존재했던 기원전 1세기보다 앞선 기원전 2세기(중국의 왜곡된 기록에도 이미 기원전 2세기에 티벳 부족이 등장하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티벳 고원에 이들이 살고 있었다) 이전부터 부족 형태의 티벳이 존재했고, 옌징의 소금계곡 또한 티벳 부족이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나시족과 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드라마 <주몽>에서 가상의 지명으로 거론했을지언정 그 시기의 ‘소금산’이라 불릴만한 소문난 소금 생산지는 티벳의 옌징만한 곳이 없었다.
말이 지는 소금짐의 무게는 약 60~70킬로그램, 균형을 위해 마부는 정확하게 무게를 재고 싣는다.
어쨌든 옌징은 오랜 옛날부터 소금으로 유명했고, 이 곳에서 나는 소금은 중국의 윈난과 쓰촨, 티벳 고원의 중심부인 라싸는 물론 인도에까지 폭넓게 거래되었다. 때문에 차마고도 교역로에서 옌징이 차지하는 비중은 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더구나 고대국가 시대에는 소금이 곧 칼이었고, 권력이었으며, 부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 값진 소금을 바다가 아닌 내륙 깊숙한 협곡에서 생산한다는 것도 옌징의 소금을 유명하게 만든 또다른 이유였다. 정확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곳 염전의 역사는 부족국가시대인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그 때의 원시적인 소금생산 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원시적인 소금생산방식을 유지해오고 있는 옌징의 소금계곡. 수백여 개의 다랑이 염전이 있다.
옌징의 소금 계곡은 란창강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해 있다. 이 소금 계곡을 챠카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옛날에는 강을 사이에 두고 나시족 마을과 티벳족 마을이 분리, 대립하고 있었다. 옛 전설에 따르면 티벳족과 나시족(納西族)은 소금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랜 쟁탈전을 벌였다고 한다. 요즘에야 이런 대립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시족과 티벳족은 소금 계곡의 염전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옛 기록상에는 이 곳의 염전이 50여 개에 이르며, 여기서 나는 소금은 차마고도 교역의 중요한 거래품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재는 소금 계곡에 수백여 개의 염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모양은 마치 계단식으로 펼쳐진 다랑논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건 그냥 다랑논이 아니라 오랜 세월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눈물의 소금밭이다. 하나의 염전은 수많은 나무기둥과 받침대로 이루어져 있다. 빼곡하게 세운 나무받침 위에 돌과 흙을 깔고 그 위에 또 고운 진흙을 이겨 미장을 하고 두렁을 높여 염전을 만드는데, 이 염전들이 수백여 개 어울려 다랑이진 풍경이 오늘날 소금 계곡의 모습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곳의 소금 생산 방식이다. 약 1억년 전 해저의 땅이었던 지금의 티벳 고원은 두 개의 대륙판이 부딪쳐 융기한 곳으로, 옌징의 천연한 소금 광산은 그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물인 셈이다. 그 옛날 해저에 잠겨 있던 소금 성분은 챠카룽의 몇몇 곳에 샘솟는 온천수에 의해 지표로 솟아나는데, 이 물을 증발시키거나 여과시킨 것이 이 곳의 소금이다.
소금 계곡의 다랑이 염전. 소금물을 길어오는 소금 우물은 따로 있다.
이런 전통방식의 소금 생산과 다랑밭처럼 이뤄진 독특한 염전지대로 인해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에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건의하고 있지만, 중국은 딴청을 부리고 있다. 이유인즉슨 소금 계곡이 있는 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란창강에 곧 수력발전댐 건설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옌징의 소금 계곡이 수장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천년을 대대로 이어온 이 곳의 전통 소금 생산은 최근 들어 위기를 맞고 있다. 바다에서 생산한 미네랄이 풍부한(사실 옌징에서 생산한 소금에는 갯벌에 많은 마그네슘 성분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소금이 싼값에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어 경쟁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소금 계곡의 운명과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이 곳의 수백여 개 다랑이 염전은 엄청난 양의 나무기둥과 받침이 떠받치고 있다.
내가 옌징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시골 읍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옌징의 중심가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차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다 거리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사람들은 등짐을 진 말들을 끌고 어디론가 총총이 사라졌다. 시내 한복판에는 ‘차마고도 주점’도 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차마고도 주막 노릇을 해 왔는지 허름하고 오래된 옛빛이 역력했다. 시장은 과거 우리네 장옥같은 분위기가 났고, 소쿠리며 호미, 삽, 야크방울 같은 물건들이 난전에 나와 있었다. 옌징에는 나시족과 티벳족(뵈레)이 어울려 산다고 하는데, 사실 내 눈으로는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다만 좀더 얼굴이 검고 억세 보이는 쪽이 티벳족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옛날 소금과 차를 교역하던 마방들이 들러가던 '차마고도 주점' 오른쪽에 간판이 붙어 있다.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티벳족이라고 밝힌 띵정장춰(31) 가족을 만났다. 이 가족들은 동충하초 파는 일을 한다고 했다. 바이망 설산 인근에서도 여러 명의 동충하초 장사꾼을 만났듯 옌징에도 동충하초 장사꾼이 꽤 있다고 했다. 동충하초는 어디서 캐는가? 망캄 가는 길에 훙라 설산이 있다. 거기에 동충하초가 많다. 그럼 이건 어디다 내다 파는가? 중띠엔까지 가서 판다. 버스를 타면 중띠엔까지 3일이 걸린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는가? 지금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옛날에는 말 타고 중띠엔까지 갔다고 들었다. 동충하초는 얼마나 하는가? 500그램에 200위안이다. 그걸 캐는데는 얼마나 걸리나? 500그램 캐는데 두세 달 걸린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2만 5천원을 벌기 위해 두세 달이나 산을 헤매다녀야 하는 게 동충하초 장사꾼의 현실인 것이다.
옌징의 가장 큰 호텔에 짐을 풀고 TV를 켰지만, CCTV1밖엔 나오지 않는다. 오늘은 독일월드컵 한국과 토고전이 있는 날이었지만, 중계방송이 나오는 CCTV5는 시내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하긴 티벳에까지 와서 월드컵을 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리라. 티벳에 온 이상 티벳의 시간을 따라야 한다. 티벳의 시간은 말과 야크가 걷는 것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목포까지 4시간 반이 걸리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의 거리를 가자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는 한 시간 늦는 것에 안달을 하지만, 여기에서는 한 시간쯤 늦는 것은 늦는 것도 아니다. 비행기도 제 시간에 떠나는 적이 없고, 버스는 아예 시간표가 무의미하다. 티벳에서 급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한국 사람들이다.
옌징 거리의 아이가 야크의 꼬리를 잡고 걸어간다.
아침 일찍 어제 보지 못한 염전을 보러 란창강을 향해 간다. 멀리 산등성이에 자리한 루띵마을이 안개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절벽과 벼랑 아래로 황토색 란창강이 거칠게 흘러간다. 그런데 절벽을 따라 가로로 길게 실오라기처럼 이어진 것이 있다. 길이다. 까마득한 벼랑에 걸린, 한발만 삐끗하면 바로 란창강이 집어삼키는 위태로운 길이다. 그 위태로운 길을 건너편에서 보고 있자니 내 오금까지 저려온다. 염전을 향해 조금 더 협곡을 내려가자 아, 입이 쩍 벌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건너편의 실오라기같은 길로 10여 마리의 말이 소금짐을 싣고 간다. 그 뒤로는 마방(말이나 노새, 당나귀를 이용해 차와 소금 등을 거래하고 운반하던 상인조직)으로 보이는 세 명의 마부가 뒤따르고 있다. 사실상 옌징에 남은 마방은 옛 차마고도의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마방이나 다름없고, 옌징을 마지막 근거지로 삼고 있는데, 당연히 이 곳의 소금이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위태로운 낭떠러지 벼랑길을 걸어서 마방들은 루띵마을로 간다.
소금 짐을 싣고 궁궁을을 뻗친 오르막을 다 올라온 마방의 행렬은 루띵마을로 이어진 낭떠러지 벼랑길을 위태롭게 이동하고 있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벼랑길에서 마부들은 짐을 싣지 않은 말일지라도 절대로 타지 않는다고 한다. 고원에 부는 잦은 회오리바람에 말이 몸을 가누지 못해 마부를 벼랑으로 떨어뜨렸다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이 곳에서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옛 차마고도의 길이 대부분 저랬다고 보면 맞다. 해서 차와 소금을 나르던 마방들이 숱하게 길에서 죽어야 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방의 행렬이 루띵마을까지 무사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소금 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곳에서는 증발지 소금(오른쪽)보다 여과를 통해 고드름처럼 달린 소금(왼쪽)이 더 유명하다.
에움길을 돌아서자 말로만 듣던 다랑이 염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S자로 휘돌아나가는 란창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계곡에 빼곡하게 들어선 것들이 모두 염전이다. 염전을 바로 발 밑에 두고 소금을 나르는 소금꾼의 행렬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서 말들을 몰고 산길로 올라섰다. 이 곳이야말로 말이 걷는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곳이다. 나도 천천히 말이 걷는 속도로 염전에 도착했다. 사내들은 보이지 않고 몇 명의 아낙들만 염전을 오가며 두렁에 미장을 하고 있었다. 우기에 내린 비가 상당수의 염전을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다랑이 염전 두렁에 미장을 하고 있는 나시족(추정) 여인.
- 여기에 소금 우물이 정말 있는가?
- 온천처럼 소금물이 솟아나온다. 물동이로 그 물을 퍼서 날라다 소금연못(1차 염지)에 채우고, 그 물을 다시 소금밭에 붓는다.
- 이 흙바닥에 그냥 부으면 소금이 더럽지 않은가?
- 그 위의 소금은 주로 가축에게 먹인다(물론 이 소금이 가축을 위한 소금은 아니지만, 티벳인들은 이 소금이 가축의 다산을 돕는다고 믿는다).
- 그럼 사람은?
- 이 아래(나무기둥이 받치고 있는 곳)를 보라. 저기 고드름처럼 매달린 것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수확한다.
- 그렇다면 이 위의 소금밭은 증발지가 아니라 여과지란 말인가?
- 그렇다. 여기에 소금물을 부으면 일부는 위에서 증발하고, 일부는 이 밑으로 스며들어 저기 천장(밑에서 봤을 때)에 고드름처럼 매달리게 된다.
- 그럼 이 소금밭은 당신 것인가?
- 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여러 구역 중 한 구역을 가리킴)의 소금밭을 모두 스무 가족이 같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 공동소유?
- 그런 셈이다. 한때 이 곳의 소금밭은 중국에 의해 국영으로 운영(중국이 티벳을 점령한 이후 모든 것은 대부분 국영으로 운영되었으며, 80년대 이후 민간에도 조금씩 양도되었다)된 적도 있다. 다시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 남자들은 왜 보이지 않는가?
- 나도 모르겠다.
옌징의 미래는 이 아이의 눈처럼 밝지가 않다.
소금밭에서 일하는 소금꾼은 거개가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소금을 나르거나 내다파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소금물을 퍼나르거나 소금밭을 고르고 생산하는 힘든 일은 대부분 여자가 담당한다. 티벳에서는 도대체 남자들은 뭐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여자가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옛날 기록에 따르면 나시족은 모든 힘든 일을 여자들이 도맡아 하는 대신,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철저한 모계사회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는 알지만, 아버지는 알지 못했으며, 여성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고, 재산이나 아이에 대한 소유권이나 양육권도 여성에게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나시족(중국과 티벳에 현재 2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은 진사강과 란창강, 얄룽강 유역에 주로 살고 있는데, 리장에 나시족 자치현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티벳인들과 달리 지금도 물과 바람, 산과 같은 물신을 숭배하며, ‘동파’라고 불리는 무당이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 일처다부제 생활을 했던 티벳인과 비슷한 면이 많지만, 종교와 생활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나시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갔던 나는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시족인지 티벳족인지 알지 못했고,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공부 좀 할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티벳일기 5: 옌징에서 훙라산까지
차와 소금을 교역했던 차마고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역로이자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문명통로였다. 어떤 이들은 차마고도가 실크로드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주장하지만, 알 수가 없고, 다만 실크로드의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당나라(7~10세기) 때 차마고도의 교역도 활발하게 전개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우리에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교역로와 문명통로를 대표하던 길이 바로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였다. 현재 티벳에 남은 차마고도의 흔적은 군데군데 남은 옛길과 옛길을 따라 낸 도로들을 제외하면 옌징의 염전과 이 곳을 무대로 근근히 활동하는 마방이 가장 확실한 차마고도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학교에 갔다가 윗옌징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아이들.
수없이 많은 마방이 걸어갔을 옌징의 황토 에움길을 나는 편히 차를 타고 달린다. 옌징을 벗어나면 곧바로 또다른 옌징을 만나게 된다. 옌징(해발 3109미터)은 윗옌징, 아랫옌징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랫옌징에 살고 있다. 옌징에서 고작해야 차를 타고 5분도 걸리지 않는 윗옌징에는 티벳의 유일한 외래종교이자 유일한 천주교 교회가 자리한 곳이다. 약 130여 가구, 600여 명이 사는 윗옌징에 천주교 신자는 의외로 많아서 약 3분이 1이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 교회는 외관이나 건물 형식은 물론 벽화나 단청의 무늬까지 티벳 사원풍을 고스란히 따랐다. 그러나 예배당에는 분명하게 십자가가 걸려 있고, 입구에는 경전의 문구 대신 주기도문이 적혀 있다. 이 곳에도 여느 천주교처럼 주말 미사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이 어김없이 예배를 보러 온다. 티벳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일 수밖에 없다.
윗옌징에 자리한 티벳의 유일한 천주교 교회.
옌징을 떠나기에는 말과 야크의 속도로 떠나는 것이 어울리지만, 개념 없는 봉고차는 고약한 흙먼지를 날리며 순식간에 옌징을 벗어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옌징다운 풍경을 다시 만났다. 마방의 행렬이었다. 3명의 마부와 6마리의 말로 이뤄진 마방의 행렬은 잠시 쉬었다 가려는지 길가의 너른 공터에 짐을 풀었다. 미라 씨(53) 일행이다. 갈색 마포자루를 내리고 마구를 내려 말도 쉬게 하고, 마부 한 명은 나무를 해오고 또다른 마부는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는 때가 시커멓게 낀 양재기를 올렸다. 여기에 미라 씨는 역시 때가 시커먼 주전자에서 물을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길에서 짐을 푸는 마방. 미라 씨 일행.
- 물은 왜 끓이는가?
- 물을 끓여야 차를 마시지 않겠는가
- 이렇게 다니면서 늘 차를 마시는가?
- 그렇다. 차는 지친 몸을 풀어주고, 영혼을 맑게 한다.
- 아까 말에서 내린 짐은 무엇인가?
- 옌빠(소금)다(미라 씨는 짐을 풀어 소금을 보여 준다).
- 아, 이건 붉은 소금이 아닌가.
- 그렇다. 옌징의 염전에서는 홍염과 백염을 다 생산한다.
- 왜 다른 색깔의 소금이 나오는가?
- 강 이쪽의 소금은 백염이고, 저쪽은 홍염인데, 저쪽은 흙(증발지의)이 붉은색이어서 홍염이 된다.
- 이걸 싣고 어디까지 가는가?
- 마캄까지 간다.
- 옌징에서 얼마나 걸리나?
- 4일 걸린다.
- 옌징에서 마캄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나?
- 120킬로미터(112km)쯤 된다.
- 이걸 가져가면 거기서 얼마나 받나?
- 100근(한근에 600그램)에 45~50원 받는다.
- 그것밖엔 안되나. 그런데도 마캄까지 가야 하나?
- 가야 한다. 이제껏 그렇게 살았다.
미라 씨 일행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주루막같은 보따리에서 커다란 빠바를 꺼내 권했다. 손으로 한주먹 뜯어 입에 넣었으나, 먹기가 쉽지 않다. 내내 먼지가 날리는 길을 온 터라 빠바에서는 모래와 먼지가 아작아작 씹혔다. 이건 숫제 먼지빵이다. 내가 빠바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목이 메인줄 알고 티벳에서 김치처럼 먹는 나물무침(‘양유’라 한다)을 건넨다. 포우싼에서도 양유를 입에 넣었다가 너무 짜서 인상을 찡그린 기억이 있어 나는 손을 내저었다. 모래가 서걱이는 빠바를 억지로 삼키고는 미라 씨 일행과 헤어졌다.
미라 씨 일행이 불을 피워 덩어리차를 끓이고 있다.
모래가 서걱이는 빠바(왼쪽)와 양유(소금에 절인 나물무침, 오른쪽).
계속되는 비포장길. 차는 덜컹거리고, 탈탈거리고, 쿵쾅거렸다. 갈수록 풍경은 기가 막혀 아! 우와! 쩌억, 짜악, 크아! 계속해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갈수록 날씨도 좋아져, 전형적인 티벳의 푸른 하늘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덩달아 사진을 찍는 나도 신이 나서 덜컹이는 차가 폐차가 되든 말든 정차, 출발을 연발한다. 사실 중띠엔에서 옌징까지 오는 길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처음 이틀은 비가 왔고, 이후에는 계속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지루한 우기를 벗어나 이제야 제대로 된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자전거로 넘는 사람들이 있다. 오체투지로 넘는 스님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자전거로 라싸까지 간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옌징을 벗어난 지 2시간이 지나 두 명의 바이커를 만났다. 59세의 판웨이선 씨와 26세의 황샤오라이 씨. 둘은 일행이 아니라 오다가 만난 사이란다. 둘다 자전거로 차마고도 답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자전거를 타고 차마고도 답사중인 바이커가 67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자전거 여행이야말로 자전거와 한몸이 되지 않고는 넘을 수가 없는 여행인 것이다.
훙라산 가는 길에 만난 풍경. 한족 옷을 입은 티벳 아이가 덩치 큰 야크를 끌고 간다.
- 어디서 왔는가?
- 랴오닝 다롄(대련)에서 왔다.
- 언제 출발했는가?
- 올 2월 19일에 처음 페달을 밟았다.
- 그럼 넉달째 이러고 있는 건가?
- 그렇다. 다롄에서 산둥과 강소성, 윈난, 따리, 리장, 중띠엔, 더친, 옌징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1만 620킬로미터를 달렸다.
- 그럼 하루에 얼마나 달리는 건가?
- 산길에서는 하루 50~60킬로미터, 평지와 내리막에서는 190킬로미터를 달린다.
-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가?
- 퇴직을 하고 집에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행은 또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 이렇게 힘들게 만날 필요는 없지 않은가?
- 힘들다고 여겼으면 여기까지 왔겠는가.
- 이제 어디로 가는가?
- 마캄을 거쳐 라싸까지 갈 거다. 라싸에서는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잡아 칭장공로를 따라 갈 것이다. 지금 계획으로는 북쪽으로 더 올라가 내몽골을 거쳐 외몽골까지 가볼 생각이다.
넉달째 차마고도 자전거 여행중인 판웨이선 씨.
판웨이선 씨는 분명 미쳤다. 그의 여행은 모험에 가깝다. 심지어 그는 몽골까지 다녀온 뒤에는 장강을 따라 배를 타고 미얀마까지 표류할 계획까지 짜놓았다. 그런데 미쳐보이는 그가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뭔가. 그건 그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지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즐겁고 기구한 운명의 여행자인가. 나는 그가 여기까지 바람을 헤치며 달려온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아 기나 긴 길의 흔적을 느껴본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땀과 관절의 통증까지 다 배어 있는 자전거는, 얼핏 보기엔 그냥 자전거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냥 자전거는 그와 한몸이 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훙라산 고개에서 만난 산양. 무리의 대장 노릇을 하는 숫놈이다.
길은 이제 점점 고도를 높여 산으로 올라간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눈 덮인 봉우리가 산 너머로 펼쳐진다. 제법 덩치가 큰 이 산은 훙라 설산(4470미터)이다. 차는 훙라 설산의 고갯마루를 향해 힘겹게 올라선다. 겨우겨우 올라온 훙라산 고갯마루에서는 사방으로 펼쳐진 산자락의 바다가 장엄하다. 길이 지나는 고갯마루 인근은 천연한 목장이어서 한쪽에는 야크가, 한쪽에는 산양이 떼를 지어 풀을 뜯는다. 고개에 내려 도망치는 산양 사진을 찍느라 잠시 초원을 달렸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린다. 아직 심각한 고산증세는 없었지만, 이 곳이 고산이라는 것을 호흡이 먼저 느끼고 있다. 내가 헉헉거리는 모습을 보자 산양의 무리 가운데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멀찌감치 나를 노려보며 고소하다는 듯 음메에~거렸다. 다른 산양들도 일제히 나를 향해 음메에~ 한다. 여기서 마캄까지는 아직도 60킬로미터가 더 남았다.
티벳일기 6: 훙라산에서 마캄까지
훙라산을 넘은 길은 다시 올라온만큼 고개를 내려간다. 산을 다 내려와 처음으로 만난 마을은 빠라마을이었다. 빠라마을 인근은 온통 칭커밭이 에둘렀다. 칭커는 쌀보리의 일종으로 티벳인의 주식인 짬빠(짬바, 볶아서 가루로 만든 것 또는 가루를 버터나 뜨거운 물에 반죽해낸 것)의 재료가 되며, 밀가루와 섞어 빠바를 만들기도 한다. 칭커밭마다 김을 매러 나온 아낙들의 모습이 보이고, 놀러 나온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은 차가 지날 때마다 손을 흔든다. 이 곳에서는 이따금 지나가는 차조차 반가운 손님이다.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들어 주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따라오면서까지 손을 흔든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이며 행복한 풍경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마캄 가는 길, 빠라 마을에서 만난 아이.
군데군데 남자들은 밭갈이에 한창이다. 빠라마을의 밭갈이를 보니 우리네 겨리쟁기질과 똑같다. 두 마리의 야크를 봇줄에 매어 앞세우고 농부는 뒤에서 쟁기질을 하며 따라간다. 남자가 들판을 갈아엎고 나면, 여자는 번지(흙덩이를 고르는 도구)로 흙덩이를 으깨며 고랑을 고른다. 티벳인들에게 야크는 가축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선 야크는 밭갈이를 하거나 수레를 끌거나 짐을 나르는 일에 동원된다. 그리고 티벳인들은 야크 고기를 구워먹고, 말려먹고, 끓여서 스프처럼 먹기도 한다. 또 야크 우유를 마시고, 이 우유로 버터를 만들며, 버터는 다시 티벳에서 즐겨 마시는 쑤여우차(쑤우오차)가 된다. 야크 버터는 사원에서도 유용하게 쓰이는데, 사원에서 불을 밝힐 때 야크버터를 녹여 기름처럼 쓴다.
빠라마을 야크 밭갈이.
야크의 가죽으로는 옷과 이불과 유목민의 텐트를 만들고, 뿔은 대문의 장신구가 되기도 하고, 사원의 마니단을 장식하는 성스러운 제물이 되거나 그 두개골에는 마니석을 대신해 ‘옴 마니 팟메 훔’을 적어놓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야크의 똥은 잘 말려 놓았다가 불쏘시개로 사용하며, 이것을 티벳에서는 ‘쭤’라고 한다. 쭤는 그냥 야크 똥만 말린 것이 아니라 칭커짚을 똥에 섞어 마치 흙반죽을 만들 듯 둥그렇게 만든 덩어리를 가리킨다. 야크가 많은 동네에서는 어디를 가나 집담이나 옥상에 쭤를 붙여 말리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티벳에서는 이렇게 쓰임 많은 야크를 그냥 ‘야’라고 부르며, 가장 친근한 가축으로 친다.
빠라마을 아이들.
빠라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은 한마디로 꾀죄죄, 꼬질꼬질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씻지 않은 모습이다. 요즘에야 달라지고 있지만, 본래 티벳인들은 씻지 않는 게 전통이다. 그들의 씻지 않는 전통은 티벳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도가 높은데다 건조하고 햇볕이 강렬해 말끔하게 씻을수록 되레 자외선에 의한 피부 손상이 심해지는 것이다. 거개의 티벳 사람들이 모자를 쓰거나 터번을 두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흔히 중국에서는 티벳인을 구별할 때 ‘고원홍’이 있느냐를 먼저 살핀다고 한다. 고원홍이란 얼굴의 광대뼈 부분과 코가 검붉게 탄 것을 일컫는 말인데, 고원의 티벳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원홍’이 생길 수밖에 없다. 티벳의 태양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얘기다. 나 또한 옌징에서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잠깐 사이에 얼굴이 익은 감처럼 된 적이 있다.
빠라마을에서 마캄으로 가는 길.
왠지 나는 ‘꼬질꼬질’한 빠라마을의 아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별로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들을 보는 순간 어린시절이 자꾸 떠올랐고, 내가 어린시절을 보낸 1970년대가 바로 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타임슬립한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티벳에 깊숙이 들어올수록 자꾸만 과거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오래된 과거로 시간여행중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이 곳에서는 현재이며, 이 곳에서의 현재가 우리의 과거인 것이다. 그러나 잘 나가던 과거로의 여행은 얼마 뒤 순식간에 분위기를 잡치고 말았다.
마캄 인근의 마을.
빠라마을에서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조그만 마을을 지날 때였다. 우리의 타임머신 봉고차는 질풍노도와 같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느닷없이, 순식간에 저쪽에서 세 명의 아이가 달리는 차 앞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미처 빵빵거릴 겨를도 없이 운전수는 끼이이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차는 이 녀석들을 불과 10센티미터 정도 앞에 두고 간신히 섰다. 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운전수가 화가 나서 차창을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저쪽에 앉아 있던 아이들까지 우르르 차창 앞으로 몰려왔다. 앞에서는 3명의 아이가 차를 가로막고 옆에서는 다른 아이들이 다가와 다급하게 무슨 말인가를 하며 차문을 열려고 한다. 이건 숫제 칼만 안들었지, 노상강도에 날강도가 아닌가. 그 중의 한 아이는 채 다섯 살도 안되는 어린아이도 끼어 있었다.
마캄 중심부에 자리한 웨이서 사원과 라마.
아이들의 요구는 이것이었다. 돈을 내놓던가, 담배를 내놓아라. 아니면, 먹을 거라도 내놓아라. 마치 아이들은 통행세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 큰소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그건 분명 구걸하는 자세가 아니라 강탈하려는 자세였다. 아이들이 뛰쳐나온 쪽을 살펴보니 4명의 어른이 어슬렁거렸고, 그 중 하나는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하나는 서서 우리를 구경하고, 두 명은 한발한발 발걸음을 옮겨 이리로 다가왔다. 결국 우리는 가지고 있는 담배를 내놓는 것으로 흥정(사실은 강탈)을 마무리했다. 아이들은 부업삼아 이 짓을 하는 것같았지만, 이것이 직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입이 짭짤해지면 이 녀석들은 이제 학교도 가지 않고, 이 곳에 죽치고 앉아서 지나가는 차마다 달려들어 이런 강탈을 직업삼아 일삼을 것이다. 이것이 티벳의 낭만과 경치만 보고 온 내 눈에 비친 티벳의 또다른 슬픈 현실이었다.
마니차를 돌리며 법당을 코라하는 순례객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마캄(망캉)에 도착했다. 여기서 라싸까지는 아직도 1200킬로미터 이상이 남았다. 마캄(해발 3900미터)은 지금까지 달려온 진장공로가 쓰촨 쪽에서 올라온 천장공로와 합류하는 곳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현(군) 소재지로서 제법 규모가 큰 도시다. 티벳의 도시가 대체로 그렇듯 규모가 클수록 티벳다운 풍경은 사라지고, 중국화가 다 되어 여행자에게는 별 매력 없는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그나마 마캄에는 중심부에 겔룩파 사원인 웨이서 사원이 자리하고 있어 도시에서 받은 실망감을 보상해 준다. 사원은 어른들에게는 기도와 순례의 장일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놀이터 이상의 의미가 없다.
웨이서 사원 입구 마니차와 법당 마당에서 만난 극성스러운 아이들.
웨이서 사원에서 만난 아이들은 어디서 났는지 물총을 가지고 2층 회랑에 올라 법당으로 향하는 순례객들에게 장난을 친다. 이 녀석들 어찌나 짓궂고 극성맞은지 내가 카메라로 법당과 순례객을 찍는 것을 발견하자 우르르 몰려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법석이다. 안 찍어주면 찍어줄 때까지 앞을 가로막고 촬영을 방해한다. 결국 녀석들에게 나는 몇 장 찍어주고 검사까지 받고서야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마캄을 벗어나면 이제껏 함께 한 214번 국도는 318번 국도에게 라싸행 임무를 넘겨준다. 길도 한결 좋아져 모처럼 아스팔트길이 푸른 골짜기를 향해 뻗어 있다. 덜컹거리던 차가 잠잠해지니 어쩐지 엉덩이가 허전하다.
티벳일기 7: 마캄에서 조공까지
지금까지의 노정: 중띠엔-(190km)-더친-(181km)-옌징-(112km)-마캄-(158km)-조공
앞으로의 노정: 조공-(201km)-팍쇼-(219km)-보미-(89km)-퉁마이-(146km)-링트리/빠이-(120km)-드락숨쵸-(50km)-공푸장따-(274km)-라싸-(280km)-시가체-(146km)-간체
라싸에서의 노정: 라싸-(195km)-남쵸 * 붉은색은 왕복노정
마캄을 벗어난 길은 다시 펑퍼짐한 고개를 넘는다. 봉우리는 밋밋하고 산자락은 부드럽게 흐른다. 나무는 드물어서 고갯마루가 천연한 초원의 언덕이다. 만만해 보이는 이 언덕도 해발 4000미터가 훨씬 넘는 곳인데, 고갯마루에는 역시나 타르쵸가 바람에 펄럭인다. 펄럭이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찢어질 듯 바람이 거세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라체(돌을 쌓아 만든 탑)가 쌓여 있고, 타르쵸가 날리는 풍경이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하건만, 여전히 고개마다 그 감흥은 색다르다. 타르쵸가 날리는 언덕에서 무심하게 풀을 뜯는 양떼들. 젊은 양몰이꾼은 활 대신 이제는 엽총을 등에 매고 언덕을 어슬렁거린다.
마캄 인근의 언덕길.
언덕을 넘어가면 한동안 보지 못했던 란창강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란창강과는 이별이다. 여기서 5천미터급 산을 넘어가면 미얀마로 흘러들어 샬윈강이 되는 노강을 만나게 되고, 조강에 이르면 다시 유추강을 따라가게 된다. 이제 318번 국도는 란창강을 건너면서 다시 비포장길로 바뀐다. 티벳에서 비포장길이란 말 그대로 포장할 수 없는 구간이란 뜻이고, 그만큼 난구간이란 의미가 된다. 여기서 조공으로 가려면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해발 4000미터 남짓한 고개이고, 다른 하나는 해발 5008미터의 둥다라 산이다. 이제껏 지나온 산 중에 가장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다.
마캄 인근 언덕의 타르쵸.
문제는 벌써 시간이 저녁 6시가 넘어서 필경은 한밤중에 저 산길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봉고차는 최대한으로 속력을 내보지만, 오르막길인데다 굽이가 심한 길이어서 속도는 느림보 트럭과 다를 바 없다. 올라갈수록 길은 급경사의 벼랑길이다. 오른쪽은 금세라도 사태가 날 것만 같은 절벽이고, 왼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겨우겨우 산 하나를 다 올라와 내려다보니 산 아래로 흐르는 란창강 줄기가 실오라기처럼 보인다. 날은 거의 저물어 산그늘이 지나온 에움길을 다 지워버렸다. 이제 차는 어둠을 뚫고 산을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봉고차 운전수는 전조등을 켜지 않는다. 뒤에서 불좀 켜고 달리자 해도 운전수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는 기어이 그 위험한 산길을 전조등도 없이 넘었다.
엽총을 맨 목동과 양떼.
캄캄한 계곡에서 5분간 휴식. 다시 출발. 하지만 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차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짤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두 번, 세 번, 네 번째가 되어서야 시동이 걸렸다. 뒤늦게 운전수는 배터리가 거의 소진됐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아까 산을 넘을 때 전조등을 켜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조금 전에 넘은 산은 4000미터 남짓한 고개였고, 이제 넘어야 할 산은 5008미터였다. 그것도 전조등도 없이 캄캄한 밤에 넘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해서 차에 탄 일행들은 설령 가다가 서는 한이 있어도 전조등을 켜고 달리자고 애원했고, 운전수도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 둥다라 산길엔 이제 흐릿한 전조등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차가 불을 켜고 달리는데도 차안에서는 이따금 으악, 꺄악, 어어어, 어머나 하는 비명이 합창하듯 울려퍼졌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 지나자 공포의 비명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쿨쿨, 푸아, 드르렁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똑같은 공포의 반복에 사람들은 둔감해졌고, 결국 계속되는 공포의 리듬이 오히려 사람들을 피곤한 잠속으로 이끈 것이다. 저녁 10시 30분. 차는 둥다라산을 넘어가 둥다마을에 닿았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차가 멈추자 사람들도 일제히 잠에서 깨어났다.
저 위태로운 벼랑길을 봉고차로 달려왔다.
비몽사몽간에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또다시 으악, 꺄악, 이럴 수가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비명소리가 아니라 감탄사였다. 바로 하늘에 뜬 별을 보고 내지른 소리였다. 정말 별천지였다. 하늘이 온통 별로 뒤덮여 눈꼽만큼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한국에서 보아온 별들의 백배천배는 돼 보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별은 처음 봤다. 아무리 해발 5천미터급 산밑에서 보는 별이라지만,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별들이 본래 저렇게 많았단 말인가. 우주에 떠 있는 모든 별이 저 하늘에 다 모여있는 것만 같았다. 이후 티벳에서 꽤 많은 밤을 보냈지만, 둥다라 산밑에서 보았던 별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별천지 아래를 달려 차는 조공을 향해 간다. 산을 넘는 동안 비포장이었던 길은 다시 아스팔트로 바뀌었다. 11시가 넘어 드디어 조공(해발 3800미터)에 도착했다. 한밤중에 도착한 조공은 생각보다 크고 화려했다. 애당초 이 곳은 티벳의 도시가 아니라 중국이 건설한 인공 군사도시인지라 티벳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군인들을 위한 위락시설과 식당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삭막하게 느껴지는 도시다. 힘겹게 비포장 산길을 넘어온 탓인지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내자 티슈는 금세 검붉은 황토 먼지로 얼룩진다. 입안에서는 먼지가 서걱거리고, 눈은 따끔거리며 아팠다. 너무 늦게 온 탓인지 빈방이 남아 있는 숙소가 거의 없었다. 몇 군데 ‘삔관’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도미토리 방을 얻었다. 바닥은 그냥 먼지가 뽀얀 시멘트 바닥이었고, 다섯 개의 삐걱이는 침대가 아무렇게나 놓인 방이었지만, 짐을 풀고 나자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런데 피곤해서 잠은 밀려오는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산소 부족 증세가 심해지면서 호흡곤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통은 없었지만,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숨이 막혀 괴롭기만 했다. 이것이 고산증세라는 걸 난 다음 날에야 알았다. 어쨌든 나는 잠을 설치며 40여 분간을 침대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좀 괜찮아진듯하여 잠자리에 들었으나 이번에는 자다 말고 수면 중에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났다. 나는 다시 일어나 30분 넘게 심호흡을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고산증을 경험한 사람에 따르면 이 정도는 아주 경미한 증세에 불과하다고 한다.
아침 7시의 조공 시내 풍경.
심할 경우 고산증은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고, 되게 차멀미라도 한 듯 속이 메슥거리면서 결국 속엣것을 다 토하고, 정신은 혼미해지고, 숨은 막혀서 죽을 것처럼 답답하고, 여기서 더 심하면 폐에 물이 차서 생명까지 위험하다고 한다. 너무 심한 경우 고산증은 지대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지만, 토하고 어지러운 정도의 고산증은 대개 3~4일이 지나면 한결 나아진다. 중국이나 티벳의 약방에 고산증에 먹는 알약이 있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증세를 다소 완화시킬 뿐 치료약이 되지는 못한다. 다행히 아침에 일어나서는 더 이상의 고산증세 없이 가뿐했다.
라싸로 가는 침대버스.
숙소에서 나와 밥을 먹으러 가는데, 라싸로 가는 침대버스가 거리에 정거해 있다. 오는 동안 어쩌다 마주치는 침대버스가 궁금하던 차에 잠시 침대버스를 구경했다. 침대버스는 2층으로 되어 있다. 높이를 높여 2층으로 만든 것이 아니므로 버스 침대에서는 일어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라싸까지는 어떡하든 누워서 가야 하는 것이다. 조공에서 만난 침대버스는 이틀 전 중띠엔에서 출발했는데, 기사 2명이 교대로 운전하면서 밤에도 쉬지 않고 달려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이렇게 2교대로 쉴새없이 달리면 라싸까지 4일이면 간다고 한다.
이얼빠와 쭝지(왼쪽). 침대버스 내부(오른쪽).
침대버스 앞에는 승객들에게 먹을 것을 팔려는 장사치가 이른 아침부터 진을 쳤다. 보아하니 찐빵같은 것과 찰밥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찐빵처럼 생긴 것은 ‘이얼빠’라 하고, 댓잎에 싸서 찐 찰밥은 ‘쭝지’라 불렀다. 쭝지는 언젠가 담양에서 사 먹었던 댓잎찰밥과 모양새가 똑같았다. 중국에서는 보통 단오 때 쭝지를 먹는다고 하며, 이날은 시인 굴원(중국 초나라 때의 시인, 여러 번 유배를 당한 끝에 굴원은 돌을 안은 채 강물에 몸을 던졌다. 중국에서는 5월 5일에 굴원을 추모하는 용선축제를 벌이기도 한다)이 빠져죽은 날이기도 해 쭝지를 만들어 강물에 뿌리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굴원이 죽은 날 쭝지를 강물에 뿌리는 것은 물고기가 시체를 뜯어먹는 대신 이 쭝지를 먹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란다. 중국화된 티벳의 도시에서 중국 음식을 팔고, 한족이 더 활개치는 풍경은 이제 티벳의 어디를 가나 만나는 풍경이 되었다.
티벳일기 8: 조공에서 팍쇼까지-아흔아홉 굽이 감마라 산을 넘어
감마라 산의 아흔아홉 굽잇길.
조공(左貢)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배터리를 손보기 위해 정비소로 떠난 운전수는 2시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짐을 모두 챙겨 정비소를 찾아 나섰다. 정비소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문제는 배터리를 손봐야 한다던 봉고차였다. 만일 배터리를 교체해야 하는 거라면 30분도 걸리지 않는 작업이었지만, 아무래도 문제는 배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결국 1시간을 더 정비소 앞에서 기다린 끝에 운전수가 차를 몰고 나왔다. 11시 30분. 3시간 30분을 순전히 차를 고치기 위해 밍숭맹숭 기다린 것이다.
이제 318번 국도는 조공을 벗어나 유추강을 따라간다. 유추 강변을 따라 내내 푸르고 시원한 칭커밭이 펼쳐진다. 칭커밭엔 붉은색과 분홍의 터번을 쓴 아낙들이 김매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도 김매기, 저기서도 김매기, 칭커밭마다 너댓 명의 아낙들이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자 아낙들은 아예 고개를 들지 않는다. 보리싹처럼 올라온 이것이 칭커 맞느냐고 묻자,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칭커, 칭커라고만 대답한다. 결국 내가 칭커밭을 다 벗어났을 때쯤에야 이들은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그러나 다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감춘다.
유추강변 칭커밭에서 김매기를 하고 있는 아낙들.
유추강은 생각보다 유순하게 흐른다. 그동안에 만난 진사강이나 란창강에 비하면 유추강은 밋밋하고 부드럽다. 진사강이나 란창강이 단 한치의 농토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비해 유추강은 강변을 따라 칭커밭이 즐비하고, 제법 터가 너른 마을도 끼고 있다. 한동안 유추강을 따라가던 길은 해발 4000미터 이상을 올라가 폼다 갈림길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북쪽으로 길을 잡아 가면 폼다와 참도가 나오고, 서쪽 길을 택하면 감마라 산을 넘어 팍쇼(八宿)에 이르게 된다. 라싸로 가는 318번 국도는 여기서 왼쪽으로 뻗어 있다. 보이는 건 희끗희끗한 설산 봉우리와 첩첩이 펼쳐진 산자락 뿐이다.
감마라(4618미터) 가는 길에 쓰촨에서 왔다는 런저 스님(37)을 만났다. 그는 한낮의 뙤약볕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오체투지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따라가고 있었다. 본래 오체투지(五體投地)란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부처에게 예를 올리는 것인데, 실제로는 배와 가슴, 허벅지까지 땅에 닿게 하여 전체투지 모양을 띤다. ‘오체투지’를 티벳 스님들은 ‘차체’라고 부른다. 보통 티벳의 스님들은 차체를 할 때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사실은 더 많은 오체투지를 하기 위해) 앞에는 앞치마같은 야크가죽를 걸치고, 손과 발, 팔꿈치에는 나무와 가죽으로 된 보호대를 착용한다. 런저 스님도 그런 모습으로 차체를 하며 아스팔트를 따라가고 있었다.
- 어디서 왔는가?
- 타궁에서 왔다.
- 어디로 가는가?
- 라싸로 간다.
- 라싸는 왜 가는가?
- 라마로서 한번은 가야만 하는 길이다.
- 그렇게 오체투지로 말인가?
- 그렇다. 다들 이렇게 간다.
- 이렇게 가면 라싸에 언제 도착하는가?
- 1년쯤 걸릴 것이다. 더 걸려도 상관없다.
- 타궁에서 여기까지는 얼마나 걸렸나?
- 4개월 걸렸다.
- 혼자 가는가?
- 혼자 간다.
- 다른 스님들은 뒤에서 식량을 들고 따라오는 보급 스님을 두지 않는가?
-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나까지 그래야 하는가.
- 밥은, 또 잠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 저기 뒤로 보이는 마을에 짐수레가 있다. 거기에 내가 먹을 식량과 필요한 것들이 실려 있다.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냥 길에서 잔다.
- 그럼 다시 저 마을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1킬로미터를 다시?
- 그렇다. 내가 가고자 한 만큼 오체투지로 가서 올 때는 걸어서 수레까지 온다. 수레를 끌고 다시 여기까지 와야 하니까.
-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뭔가?
- 이건 라마로서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
스님에게 나는 10원짜리 지폐를 가죽치마에 찔러주고는 고개를 숙여 합장했다. 보통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까지 가는 스님들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공양하는 돈과 식량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간다. 다행히 티벳에서는 이렇게 오체투지하는 스님들에게 기꺼이 공양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가난하고 쪼들리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오체투지를 ‘그’가 대신해 주고 있으므로 ‘그’에게 하는 공양은 곧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2~3일이면 나는 흔들리는 차에 실려 라싸에 가 있을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몸으로 경전을 외우며 저 팍팍하고 뜨거운 길 위에 육체의 모든 끝을 비비며 갈 것이다.
사실 그가 라싸에 가려는 이유와 내가 라싸에 가려는 이유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라싸까지의 물리적 거리와 내가 생각하는 물리적 거리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차를 타고 가는 나의 라싸보다 되레 오체투지로 가는 그의 라싸가 훨씬 가까워보였다. 그가 라싸를 멀게 느꼈다면 애당초 이런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모험도 여행도 아닌 수행이며 참선이고 독경인 것이다. 아마도 나는 평생을 가도 그가 만나려는 라싸를 만나지 못하리라. 라싸에 도착해서까지 나는 라싸에 가기 위해 내내 차를 타고 있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라싸는 얼마나 먼가. 런저 스님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오체투지하는 그보다 차에 올라앉은 내가 더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낮의 태양이 해발 4천미터의 땅거죽을 뜨거운 양철처럼 달구어 놓았다. 더위 탓인지 차창 밖으로 간간 보이는 설산 봉우리가 시원하기만 하다. 길은 다시 고도를 높여 해발 4618미터의 감마라 산(이에라 산)을 넘는다. 어느 새 아스팔트는 흙길로 바뀌어 있다. 타르쵸가 날리는 고갯마루에서 잠시 휴식. 여기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곧 후회하게 된다. 라싸까지의 노정에서 가장 심하고 어렵고 지루한 굽잇길을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감마라 굽잇길은 더러 여행자들에게도 알려져 영문책자나 안내서마다 굽이의 숫자가 다르다. 어떤 책에는 일흔두 굽이라 하고, 어떤 책에는 아흔아홉 굽이라 소개해 놓았다. 어차피 몇 굽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굽이가 많은 길을 심리적 굽이로써 아흔아홉 굽이라 하였으니, 이 곳의 굽이는 아흔아홉 굽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도라사원의 일주문.
감마라의 아흔아홉 굽이는 멋들어진 굴곡의 본새로 궁궁을을 산자락을 내려간다. 내려가면서도 까마득한 길이다. 한참 졸다가 깼는데도 여전히 굽잇길이다. 팍쇼가 해발 2600미터라고 하니 감마라 고갯마루에서 무려 2천 미터 고도를 굽이굽이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감마라를 다 내려가면 잠시 노강과 만났다가 노강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군사지역인 관계로 다릿목에는 몇 명의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여기서 무모하게 노강 사진을 찍으려던 나는 보기 좋게 총을 든 군인들에게 걸려 군소리 없이 차에 타야 했다. 티벳에서는 다리를 찍거나 다리에서 강을 찍는 것이 금지돼 있다. 티벳에서 다리는 중요한 군사시설이기 때문이다.
도라사원 마니단의 야크뿔.
감마라 산을 넘고 노강을 건너면 팍쇼 가는 길에 만나는 아담한 사원이 하나 있다. 뚜어라션산에 있는 도라사원이 그곳이다. 도라사원은 규모는 작지만 꽤나 인상적인 사원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마니석과 야크뿔을 잔뜩 쌓아놓은 마니단이 있는데, 뿔이 달린 야크의 해골뼈에는 마니석에 적어놓은 것처럼 ‘옴 마니 벳메 훔’이나 경문을 적어놓았다. 티벳에서는 종종 마니단이나 대문 위 또는 지붕을 야크뿔로 장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 아마도 이는 잡귀를 쫓으려는 민간신앙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마니단 뒤쪽에는 마니차 순례길과 쵸르텐이 있고, 마당을 건너면 크고 오랜 마니차를 보관한 마니라캉이 있다. 마니라캉에는 원색의 붉은색으로 칠한 마니차가 천장에 걸려 있는데, 붉은색과 어울린 용그림이 눈길을 끈다.
도라사원의 법당은 전망 좋은 언덕에 자리해 있다. 법당 앞에서 만난 스님은 두 명의 난장이 스님이다. 나를 보더니 법당 뒤로 숨어버린 스님도 난장이 스님이고 보니 이 사원에는 난장이 스님이 꽤 있는 듯했다. 저리 스님(22)과 뎀바 스님(23). 20대 초반인 두 스님의 얼굴은 나보다도 훨씬 늙어보여 적어도 40대 후반이나 50대로 보였다. 이들은 사원에 나타난 외국인 손님이 낯설고 처음인 듯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며 이야기를 시켜도 뒤돌아서곤 했다. 그러나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나서는 허리춤에 찬 상징메달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우리의 십이지간지 동물을 빼곡하게 그려넣은 만물영생 상징물이었다.
짬파로 둥글게 빚은 토르마.
법당의 단청은 다양한 원색 채색과 금색 치장으로 화려하다. 법당 안쪽도 벽은 노란색으로 칠해 눈이 부셨고, 천장은 붉은 기둥과 파란 서까래가 한눈에 들어왔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고 그 앞에는 낡고 오래된 북이 걸려 있다. 불단 양쪽에는 불경이 잔뜩 쌓여 있고, 불단 앞 스님이 앉는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붉은 물감을 칠한 토르마(짬파로 만든 부처에게 바치는 제물용 음식)와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사원 안에는 두 명의 비구니가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자 조화가 분명한 조잡스런 화병을 앞에 갖다 놓는다. 아마도 두 비구니 스님은 앞에 꽃이 있으면 더 예쁘게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해서 내가 일부러 자리를 옮겨 사진을 찍자 금세 그쪽으로 조화 화병을 옮겨놓는다.
팍쇼 소학교 아이들.
도라사원을 나와 318번 국도를 조금만 더 따라가면 이제 팍쇼가 나온다. 도심 외곽에 숙소를 잡고 짐을 푼 뒤, 저녁을 먹으러 중심가로 걸어간다. 팍쇼 소학교 앞을 지나는데, 10여 명의 아이들이 극성스럽게 내 앞으로 몰려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녀석들이 내 목에 매달린 카메라를 발견한 것이다. 조금 어둡긴 했으나, 녀석들의 요구대로 셔터를 몇 번 누르자 아이들은 우르르 카메라 앞으로 바싹 다가선다. 뒤에 선 녀석들은 아예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극성스러움을 넘어 녀석들은 밥 먹으러 가는 나에게 들러붙어 계속 치근덕거린다. 팍쇼는 도로를 따라 길게 도심을 이루고 있다. 넓은 편은 아니지만 긴 편이다. 물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는데, 15분이면 충분하지만.
이동용 길거리 푸줏간.
이튿날 아침 숙소를 나오는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낮달이 떠 있다. 한국에서 보았던 달보다 훨씬 큰 달을 망원으로 들여다보니 아쉬운대로 달표면까지 다 보인다. 하늘이 가까우니 달도 크다. 이른 아침 거리에는 이동용 푸줏간 수레가 돼지고기를 싣고 지나며 호객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오면 남자는 손저울로 달아 고기를 팔고, 여자는 옆에서 돈을 받고 거슬러주며, 장부에 적는다. 푸줏간 주인과 경리가 함께 거리 장사를 하는 셈이다. 이 이동용 푸줏간은 장사가 제법 잘 되는 편이어서 내가 지켜본 10분 동안 무려 4명의 손님이 고기를 사들고 갔다. 저렇게 많은 고기를 싣고 나온 걸 보면 저걸 오늘 아침에 다 팔려는 생각인 모양이다.
티벳일기 9: 빙하호수 라웍쵸와 도둥 사원(팍쇼-포미 구간)
팍쇼를 지나면 다시 길은 차츰차츰 고도를 높여 간다. 길 옆에는 여전히 칭커밭이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유채밭이 노란꽃을 피우고 있다. 녹색의 칭커밭과 샛노란 유채밭과 멀리 보이는 흰 설산과 푸른 하늘의 어울림. 자연의 빛깔은 어떤 식으로 어둘리든 아름답기만 하다. 영문판 안내서에는 여기서부터 걸라설산(5768미터)을 앞에 두고 달리게 된다, 고 설명해 놓았지만, 앞쪽으로 보이는 설산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어떤 것이 걸라설산인지는 알 수가 없다. 길은 점점 설산 쪽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제 풍경은 푸른 칭커밭에서 김을 매는 아낙과 뒤로 보이는 설산이 어우러진 정말로 티벳다운 풍경이 한동안 펼쳐진다.
안주라 언덕으로 이어진 318번 국도.
이런 풍경을 만나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티벳을 왜 여행하는지가 의심스러울 것이므로, 나는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칭커밭과 설산을 찍고, 김을 매는 할머니와 뛰어노는 아이들을 찍는다. 김을 매던 할머니 한 분은 웬 이상한 녀석이 칭커밭을 돌아다니나, 하고 한참이나 내가 하는 짓을 구경한다. 밭에서 놀던 아이들도 잠시 나를 구경한다. 아이들에게는 이 푸른 칭커밭과 뒤로 보이는 설산 언덕이 놀이터이고 쉼터이다. 솔직히 말해 이런 곳에서는 모든 일정을 접고 그냥 하루쯤 놀다가 가고 싶다. 혼자 돌아다니는 여행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테지만, 갈 길이 먼 봉고차는 시동을 걸어놓고 자꾸만 재촉을 한다.
세로로 세워진 깃발을 룽다라 하는데, 언덕에서 기원을 빌며 던지는 종이도 룽다(달리는 말)이다.
고도를 높여온 길은 이제 해발 4618미터의 안주라 언덕을 올라간다. 티벳에서는 안주라 언덕처럼 5천미터 안팎에 이르는 언덕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뾰죽한 봉우리가 없으니 고도가 높아도 그냥 ‘언덕’인 것이다. 티벳어로 ‘라’는 언덕을 뜻한다. 반면 산은 ‘리’를 붙인다. 계곡은 ‘룽손’, 강은 ‘창포’, 좀더 작은 샛강은 ‘추’, 호수는 ‘쵸’, 길은 ‘람’이라 한다. 안주라 고갯마루에는 어김없이 오색의 타르쵸가 날리고 있다. 왼쪽에는 습지와 호수가 이어져 있고, 오른쪽에는 설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고갯마루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설산에서 흘러내린 유빙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이 빙하는 조금씩 녹아서 계곡의 지천으로 흘러드는데, 계곡물이 천연한 빙하수가 되는 셈이다.
안주라 언덕에서 만난 빙하와 빙하수 계곡.
안주라 언덕을 내려오면 제법 운치있는 호수인 라웍쵸(3859미터)를 만나게 된다. 라웍쵸는 318번 국도에서 라웍 마을을 앞에 두고 왼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십리 넘게 따라가야 만날 수 있는데, 호수의 둘레를 산자락이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라웍쵸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바로 길 옆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보라를 일으키는 두 줄기 폭포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라웍 마을을 에두른 응안쵸로 흘러드는데, 응안쵸는 다시금 파룽 강으로 물길을 낸다. 간혹 라웍 마을을 지나는 초행자들은 이것이 라웍쵸인줄 착각할 때가 많다. 사실 응안쵸나 라웍쵸 정도의 호수는 티벳에서 그리 큰 축에 들지 못한다. 티벳에는 남쵸를 비롯해 자리남쵸, 세르링쵸, 얌드록쵸와 같은 거대한 호수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라웍 마을(인구 2000여 명)은 팍쇼에서 90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마을 앞을 둥그렇게 휘돌아 나가는 응안쵸는 주변을 둘러싼 설산 봉우리로 인해 어느 쪽에서 바라보든 인상적인 그림을 연출한다. 응안쵸 호숫가는 늪지와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데, 호수를 배경으로 무리지어 풀을 뜯는 야크떼도 만날 수 있다. 마을과 응안쵸 사이에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숙덴 사원도 만날 수 있다. 폐허가 되었을지언정 멀리서 바라보는 숙덴 사원의 풍경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사원 앞에는 노란 유채밭이 펼쳐져 있고, 유채밭으로 가는 길가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다. 이 꽃밭은 마을 아이들에게 종종 놀이터가 되고, 운동장이 되어 준다. 숙덴 사원에서 그나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호숫가로 한발 나앉은 쵸르텐인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호수와 설산 풍경이 제법 그럴싸하다.
빙하호수인 라웍쵸 호수.
라웍 마을은 318번 국도변을 따라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거리에는 중간중간 당구대를 내놓았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티벳의 당구장이다. 이런 야외 당구장 풍경은 작은 시골 마을까지 흔하게 보는 풍경이다. 라웍 마을을 지나면 길은 파룽 강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간다. 파룽 강은 이제까지 보아온 강물의 빛깔과는 사뭇 다른 빛깔을 띤다. 이제까지의 강물이 황토색이었다면, 파룽의 물빛은 연한 비취색이다. 이는 설산의 빙하가 녹아내린 빙하수의 빛깔이다. 빙하수가 에메랄드나 비취색을 띠는 까닭은 돌가루 때문이다. 이것을 과학적으로는 ‘락플라워 현상’이라고 하는데, 빙하가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면서 빙하수가 지표면의 돌가루를 함께 실어날라 이런 아름다운 빛깔을 띠게 되는 것이다.
라웍마을 쑥덴 사원(위)과 쵸르텐(왼쪽 아래). 사원 언덕에서 노는 아이들(오른쪽 아래)
옥빛 물길에 뒤로는 설산이 펼쳐져 있고, 산자락을 따라 침엽수가 뒤덮은 이런 풍경은 얼핏 보아서는 캐나다에서나 봄직한 풍경이다. 파룽 강가에서 자라는 침엽수는 거개가 냉삼나무(렁쌍나무, 삼나무 종류)다. 냉삼나무는 올곧게 솟아오른 모습도 멋지거니와 붉은빛이 감도는 솔방울이 무엇보다 아름답다. 어지간한 꽃보다는 냉삼나무의 솔방울이 훨씬 화려하고 자극적이다. 특히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적갈색 솔방울이 방울방울 매달린 풍경은 일부러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게 만든다. 냉삼나무뿐만 아니라 설산 쪽 기슭에는 다른 수종의 침엽수도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라웍을 지나면서 유난히 많은 너와집을 만나게 되는 까닭도 바로 주변의 풍부한 목재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티벳을 황량한 고원으로 인식할 때가 있지만, 사실은 목재가 풍부해 중국에서는 티벳의 목재를 우라늄만큼이나 중요한 자원으로 여기고 있다.
라웍을 지나 만나는 캐나다다운 풍경.
잠깐 졸다가 깨어보니 어느 새 차는 포미에 도착해 있다. 제법 규모가 큰 포미(2740미터, 11,000여 명 거주) 시내는 중국의 여느 도시의 풍경과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중국화가 이루어져 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중국이 도시마다 반드시 건설하고야 마는 중국식 광장까지 들어서 있다. 팍쇼가 그렇듯 포미에서도 티벳다운 풍경을 만나려면 시내를 벗어나야 한다. 포미를 벗어나 약 십리쯤 왼쪽 산길을 타고 오르면 도둥 사원을 만날 수 있다. 때마침 도둥 사원은 1년에 한번 일주일 동안 불경을 외우는 ‘배젠신주’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는 오로지 불경을 외우는 데 모든 시간을 바친다. 스님들이 불경을 외우는 동안 주방스님은 빈 찻잔을 찾아 돌아다니며 일일이 차를 따라준다. 배젠신주 기간 동안 주방스님은 거의 하루종일 차를 끓이고 가져와 따라주는 게 일이다.
도둥 사원은 게사르 왕에 대한 벽화로 유명한 절이다. 게사르는 티벳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실존 인물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영웅이다. 티벳의 <게사르 왕 이야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영웅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가 사람과 사람을 거쳐 시대와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보태져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양의 이야기로 탄생하였다. 이야기는 고원의 나라 ‘링’에 마귀가 창궐하자 하느님의 아들 게사르가 링으로 내려와 중생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사원에서는 부처나 미륵불이 아닌 다른 인물이 세상으로 내려와 중생을 구한다는 내용을 달가와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사원에서 게사르에 대한 벽화를 그려놓은 것은 그만큼 게사르가 티벳 중생의 메시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직도 티벳에서는 게사르 왕 이야기를 전하며 돌아다니는 ‘이야기꾼들’(설창꾼)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소설가이고 시인이 아닌가.
포미에 있는 도둥 사원.
도둥 사원은 800년 전에 지어진 절이지만,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60년대 후반)에 파괴되었다가 25년 전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티벳의 사원은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중국이 티벳을 침략하고 식민지화시킨 1950년대 초반은 물론이고 극렬한 독립투쟁이 있었던 초창기 라사봉기(1959년) 때에도 수많은 사원이 파괴되었다. 마지막으로 60년대 후반 문화혁명기 때 중국은 또 한번 대대적인 티벳사원 파괴를 일삼았다. 중국은 사원에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해 폭파시키는 방법으로 사원을 철거시켰는데, 폭파 이전에 사원에 있던 문화재는 중국으로 대량 유출되었다.
도둥사원 마니차 순례길과 향촛불.
사원을 파괴하면서 티벳에서는 종교활동 또한 금지되었는데, 이 때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수많은 지도층 승려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다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1984년이며, 티벳 내 사원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 이후 부터이다. 사실 중국이 티벳의 모든 도시를 중국화시키고, 한족을 이주시켜 상권을 장악한 지금도 티벳인들의 생활이자 운명인 종교만큼은 중국화시킬 수가 없었다. 티벳 불교는 티벳의 정신이고, 티벳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티벳은 중국이 아닌 것이다.
-- 10편에서 계속. 글/사진: 이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