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드라마’(사극)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어린 시절에 본 〈조선왕조 500년〉(1983-1990)처럼 왕실 서사이거나, 장보고나 이순신 등이 나라를 구하는 영웅 서사이거나, 태조 왕건 혹은 정도전이 주인공인 건국 서사. 주로 남성-승자 중심 서사였다. ‘사극’은 이름 그대로 역사에 기반해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는 정형화된 장르이기에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재현한 드라마 못지않게 사극은 시대적 한계를 뚫고 미래의 거울로 존재하며 사회 변화를 가늠하기에 유의미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당대 정치·사회 변화에 비추어 끊임없이 역사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 왔음은 물론이거니와, 대중의 요청에 따라 왕실 중심에서 궁녀·의적·노비 등으로 서사의 지평을 넓히거나, 역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정통 사극’에서 판타지와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는 등 제 모습을 유연하게 바꿔왔다.
관점이 달라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사극은 역사를 얼마나 왜곡 없이 충실하게 재현했느냐가 중요한 장르지만, 과감한 상상력을 통해 동시대적 가치관과 지향을 드러내는 역할을 담당하며 한국 사회 속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현’을 넘어선 ‘재해석’에 방점을 둘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MBC 드라마 〈대장금〉(2003-2004)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장금〉은 부모를 잃고 수라간 궁녀가 된 서장금이 조선시대 최초 여성 어의(임금 주치의)가 되었다가 마침내 수라간 최고상궁이 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조선왕조실록 중 중종실록에 얼핏 등장하는 ‘장금’이라는 의녀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서사를 구성했다. 이 드라마의 등장은 의미가 크다. 운명에 순응하는 수동적 여성의 전형성을 넘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며 성장하는 주체적 여성이 전면에 나선 ‘여성 서사’로서, 왕실 중심 남성 서사가 주류를 이루던 사극의 지평을 넓힌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조선왕조’에 관한 이야기라도 누구의 관점으로 다루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전범으로서 가치가 있다.
이후 많은 사극이 〈대장금〉 뒤를 이었다. KBS 드라마 〈황진이〉(2006)는 조선시대 기생 황진이의 삶을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예인(藝人)으로 재구성했다. 신라시대 선덕여왕을 주인공으로 한 MBC 드라마 〈선덕여왕〉(2009)은 선덕여왕과 그에 대항하는 여성 권력자 미실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물론 여성이 주인공인 모든 드라마를 ‘여성 서사’로 분류할 필요는 없다. 변화 자체보다 방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 사극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성덕임은 무엇을 사랑했을까
지난 몇 년 동안 대중문화는 다양한 ‘여성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진화해왔다. 사극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혼하기보다 직업인으로 살고자 했던 조선시대 여성 사관을 다룬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2019)을 비롯하여 원치 않는 결혼을 종료한 조선시대 이혼녀인 ‘기별 부인’이 등장하는 드라마 〈어사와 조이〉(2021), 비록 ‘쌍생아’여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여성이 왕이 된 서사를 보여주어 ‘남장 여자 로맨스’ 레퍼토리를 한 단계 끌어올린 드라마 〈연모〉(2021) 등 최근 방영된 사극들에는 다양한 여성들의 서사가 전면에 등장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흐름을 ‘여성주의 사극’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흐름의 정점에는 정조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했던 ‘의빈 성씨’의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동시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1-2022)이 있다. 그간 〈이산〉(2007-2008)을 비롯해 정조와 ‘의빈 성씨’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더러 있었지만, 이 드라마는 궁녀 성덕임 관점으로 서사를 구성했다는 면에서 〈대장금〉의 맥을 이었다. 또한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한 지식인이며, 여성은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거나 승은을 입는 게 궁녀가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성취라는 낡은 관습에 저항하며, 직업적 자부심이 충만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면에서 〈신입사관 구해령〉과도 닮았다. 이 드라마는 여러 면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지만, 그중 백미는 왕과 궁녀가 사랑의 결실을 이룬다는 뻔한 관습적 결말을 뒤집은 마지막 회에 있다. “화려한 감옥”인 궁궐에 갇힌 후궁이기보다는 자유의지를 가진 궁녀이길 원했으며, 왕의 사랑보다는 동료들과의 우정을 소중하게 여긴 덕임이 승은을 입은 후 불행하게 살다가 죽게 되는 결말은 길이 기억될 만하다. 이 결말은 왕과 궁녀의 사랑의 결실을 애틋하게 보여주거나, 보통의 로맨스 드라마가 당연하게 추구한 낭만적 결말에 대한 단호한 반론이 아니었을까. 그동안 우리가 ‘해피엔딩’이라 부르던 결말이 누구의 관점이었는지 근본적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이 드라마는 ‘로맨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군주제’로 표상된 가부장제에 갇힌 채 살았던 여성들의 서사이기도 하다.
또한 이 드라마는 정조와 성덕임의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라 ‘궁녀’들이 주인공인 궁녀 드라마다. 로맨스 서사뿐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고자 했던 여성들의 관계와 사회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드라마 속 여성들은 “궁녀에게도 자신의 의지가 있고 마음이 있”음을 알고 실천하는 주체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우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연대를 이어가는 사회적 인간이었다. 또한 궁녀들은 ‘광한궁’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그간 남성들의 일이었던 ‘역모’를 주도할 수 있는 야심가들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간 사극에서 적대적 관계로 그린 왕실 여성들도 서로를 연민하며 돕는 관계로 설정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이 여성주의 사극의 모범은 아닐지 모르나, 과거 〈대장금〉이 그러했듯 동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한 진보적 성취이자 앞으로 올 무수한 여성 서사들의 지향으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첫댓글 딸들이 넘 재밌다고해서 저도 중간중간 봤어요^^
재밌었지만 슬프기도 하고요..
오~ 이런 내용이었군요!!
바쁜일 끝나면
정주행 해야겠습니다^^
잼나고
생각하고
연기대상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