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에 관한 시모음 25)
능소화가 피어나는 거리 /서정임
다국적 언어의 간판이 즐비하게 걸려있는 다문화거리
색소폰소리가 울려 퍼진다
줄기줄기 피어나는 능소화처럼
거리를 휘감는 소리가 서글프다
사내는 어쩌다 저토록 진한 그리움을 토하고 있는가
몇 년 전 이곳에 들어와 온전한 정착을 위한
국적과 이름을 바꾼 그는
기숙사 앞 은사시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릴 때면
누군가 돌리는 흑백필름 영사기 소리인 듯
지구 저편 두고 온 날들이 눈앞 환하게 펼쳐진다는데
잊으려하면 할수록 더욱 깊어지는 그의 뿌리 깊은 뿌리
음표를 짚는 시간이 길어진다
날마다 벗어날 수 없는 잔업과 특근과
어쩌다 주어지는 아르바이트에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외로움이
듣고 있는 악보에 악보를 더하고
저 슬픔에 전이된 사람들이 오래도록 서있는 거리
저마다 가슴에서 피어나는 능소화가
멀리멀리 그리움을 뻗는다
금정산(金井山) 능소화 /박모경
그렇게 힘겹도록 다가와
뜰락 한 구석에 무심(無心)히 서서
그게 봄바람이건
첫여름 땡볕처럼 일렁이는 산풍(山風)이건
공간 같은 것을 꿈꾸며
조용히 긴 목을 들어낸 채
몇 번인가 목숨을 불태우며
내리 사랑으로
끝간데까지 푸른 목숨 이어왔다
그게 나무 등결에 엎드려 지내다
끝없이 피어내며
홍안의 얼굴로
나무 아래 사람을 굽어본다
우리는 산풍소리도 듣고
산새소리도 들으면서
무작정 그 주위를 맴돌고
나는 새로운 탄력의 손을 기다리며
금정산 능소화
유랑의 자리를 지키고 있네
차 한 잔 속에 들어오는 빛깔을 맡기고
침묵 속으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능소화 향
어디에 묻을고
오 능소화 빛남이여
능소화 피는 날엔 /정심 김덕성
하늘빛이 시리게 빛나고
구름 한 점 없는데 실바람 불고
이루지 못한 사랑 그리워하며
능소화 꽃이 피는 날
불타는 더위도 아랑곳없이
여름 햇살에 빛나는 꽃 능소화
어느 꽃보다 더 주홍빛이
너무 아름답구나
애절한 사연이 있는데도
고운 주홍빛 입술로 웃음 지우며
그윽한 향기로움을 들어내는
어쩌면 저리도 어여쁠까
생을 님을 향해
기다림으로 살아온 사랑의 꽃
그날엔
꼭 님은 오시겠지
능소화처럼 /임보
시들기 전에 떨어지는 꽃도 있다
지는 능소화를 보면
열아홉에 투신한 낙화암의 궁녀들 같다
사람은 왜 나이 들면 추해지는가?
저 주름투성이의 얼굴
구부러진 허리
이는 빠지고
눈도 귀도 만신창이구나
나이 들어갈수록 예뻐지면 왜 안 되는가?
가장 영근 열매가 윤기가 나듯
소년보다는 청년이
청년보다는 장년이
장년보다는 노년이 더 아름다워지도록
왜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아흔아홉, 혹은 백
미의 최고 절정에 이른 순간
세상의 찬미 속에서
능소화처럼 뚝 떨어지게
인생을 그처럼
슬프도록 아름답게
왜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바보야, 바보야, 그것도 몰라?
노인이 그렇게 이뻐 봐
누가 젊어서 결혼들 하려고 하겠어?
능소화의 눈물 /우심 안국훈
하늬바람 고요해지면
그리움 꿈틀대며 순교하듯
붉게 물들었던 마음
기꺼이 통째로 다 내려놓는다
뜨거운 눈물 다 흘리고야
폭포 소리 들리듯
타는 가슴속에 번지는 보고픔을
지는 저 석양은 알리라
내 생의 빛나던 순간은
바로 지금이고
내 생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은
언제나 당신이어라
바닥에 떨어진 눈물은
아직 뜨겁거늘
그러니
지금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능소화 /박서영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능소화가
눈동자를 뚫고 나왔다 마른 가지를 내밀었다
돌의 박물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진안 마이산에서 본 돌덩이를 파고 들어간 바로 그 능소화
모든 것이 조용히 지나가주지 않는 날들이다
칠월에 꽃 피는 거 보러 가겠다고 엉덩이를 털며 돌아와
깜빡 잊고 살았다 한 해가 지나버렸다
칠월에 능소화가 피었다가 졌겠지 아마, 그날 두고 온
으깨진 시간들이 내 몸에 남아 있었나 보네
잠을 잤다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능소화가
방향을 바꾸는 게 느껴졌다
눈알이 빨개졌다 독을 먹은 꽃이었고 울음이었다
습濕의 시절이 다시 돌아온 걸까
마디마디 메마르지 않고 잎들도 꽃들도 무성하라고
눈물이 흐른다 흘러준다
내가 비를 좋아한다는 걸 당신이 잊지 않기를
능소화 연정Ⅷ /初月 윤갑수
고적한
토담너머 능소화가
나그네 눈 맞춤에 미소로
화답한다
허공을 향해
나발 불며 님 부르듯
살랑이고
아련한
그리움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추억을
잊었는지 붉은빛
여울진다
소화의 넋은
절개의 표상 죽어서
꽃이 되었구나.
능소화 꽃 앞에서 /정심 김덕성
하늘빛 시리게 내린다
햇살은 사랑스럽게 내려 붓는다
한 치의 양보 없는 더위 이겨내며
담을 휘감으며 올라앉은 성좌
너무 사랑스럽다
넝쿨을 휘감으면서
사랑으로 다가오는 내 사랑 그대
애절한 사연을 가지고도
보다 더 아름다음을 들어내는
능소화의 주황색 미소
신비스럽게 예쁘다
꽃잎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그 향기에 취한 나
이제 그만 마무리하려는가
끈질긴 사랑 능소화여
너무 자랑스럽다
성스럽다
능소화 연정 /안영준
강렬한 땡볕에
제 몸 가누지 못해도
목덜미 세우고
임 마중에
해 저문다
달빛 물든 울 밑에
한 서린
슬픈 곡조는
임 그림자만이라도
그립구나
속세의 단절된 사랑
천상에 오르면
만날 수 있으려나
능소화 피어나는 이 아침 /은파 오애숙
훅하고 부는 훈풍속
여겨저기 카카오톡이
동창 밝았다 나팔불며
능소화가 노래한다
진초록에 주홍빛의
여울진 조합 눈 호강이
삶의 향그럼 휘날리매
퐁퐁퐁 사랑 솟는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눈 씻고 봐도 찾지 못하나
인터넷 상 휘날리는 꽃
충분한 마력 지녔다
주홍빛 싫었던 기억
검정과 데코레이션으로
매치시켰더니 아름답게
웃으며 빛을 내었지
밤이 어두울수록
별이 깜까만 밤하늘에
보석되어 반짝 반짝이듯
아름답게 빛 발하듯
능소화 활짝 피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잿빛의 어두운 마음속에
사랑을 노래하리
능소화2 /정기현
한여름 뙤약볕에
달구어진 담벼락 부여잡고
기약없는 기다림으로
승화된 애증의 상징인가
줄기마다 흐르는
사랑과 애욕의 목마름에
흐느끼는 애절한 그리움의
몸부림인가?
어쩌면 저리도 고와서
서럽게 피어 났나
그리운 임 기다리다
서러워 서러워서 주홍빛
붉게 물들었나 보다
하늘도 서러워
애닯은 마음 어름쓸듯
먹구름 뿌리는 눈물에
방울방울 사랑이 흐르네
비련의 꽃 /이태수
- 능소화
한여름 땡볕에 한사코
담장 타고 기어오르며 피는 꽃
능소화들이 목 뽑은 채 귀를 활짝 연다
오로지 그 님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음의 저 붉은 끈,
그 끈을 끝내 놓지 못하기 때문일까
땅바닥에 떨어지면서까지
귀는 마냥 그대로 열고
담장 너머 발소리에 애간장 태우는 것 같다
기다림이 도를 넘으면 한이 되고
한이 하늘 찌르면 독이 되고 마는 걸까
독이 되어 더 아름다운 저 꽃잎들
그 님이 아니면 그 누구든
저 꽃잎에 손대지 마라
저 꽃을 탐한 손으로 절대 눈 비비지 마라
눈이 멀어도 좋다면
그 손으로 저 꽃을 탐해 보라
그 님이 아니면 그 저주 죄다 떠안게 되리니
능소화가 지는 법 /복효근
능소화는 그 절정에서
제 몸을 던진다
머물렀던 허공을 허공으로 돌려주고
그 너머를 기약하지 않는다
왔다 가는 것에 무슨 주석이냐는 듯
씨앗도 남기지 않는 결벽
알리바이를 아예 두지 않는 결백
떨어진 꽃 몇 개 주워 물항아리에 띄워보지만
그 표정 모독이라는 것 같다
꽃의 데스마스크
폭염의 한낮을 다만 피었다
진다
왔던 길 되짚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수직으로 진다
딱 거기까지만이라고 말하는 듯
연명치료 거부하고 지장을 찍듯
그 화인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