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산 봉황의집
하동으로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뒤로하고 보성강을 거슬러 오르면, 구산선문(九山禪門) 동리산파의 중심인 태안사가 있다. 불교에서 하나의 학파를 이룰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절이지만 태안사가 유명해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전통건축물에서는 흔치 않은 지붕 얹은 다리 ‘능파각’ 때문이다.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 능파(凌波). 다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무심코 지난 다리 너머에 사바세계가
사실 태안사를 기억하게 된 것은 능파각(凌波閣)이라는 작은 다리 때문이었다. 콸콸콸 물이 쏟아지는 계곡에 걸터앉은 다리가 어찌나 시원해 보이던지, 그 기둥에 잠시 기대 앉아 있으면 웬만한 근심은 금세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절 가까이까지 차를 타고 가라는 택시기사의 말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한다. 태안사 이르는 잡목숲이 꽤 운치 있다는 얘기도 들었던 터라 삼림욕하는 셈 치고 걷는다. 매표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인 조태일을 기리는 시문학관이 자리하는데 여기서부터 태안사에 이르는 숲길이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사찰 중에서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최고로 꼽는 이가 많지만 태안사 숲길도 그에 못지않다. 다만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차가 지날 때마다 흙먼지를 써야 하는 게 단점이지만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초록숲을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힘들면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다리를 쉬고 더우면 바로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 발을 담그면 된다. 그렇게 30~40분 정도 걸어간 끝에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능파각이다. 규모가 크거나 화려한 단청을 입힌 것은 아니지만 깊은 산속 바위와 바위 사이에 걸터앉아 있는 다리가 절경이다. 부지런히 풍경을 사진에 담아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능파각의 자태가 너무나 매혹적이다. 고운 님을 만난 듯 찬찬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그윽한 풍경에 취해도 본다.
일주문이 절 가까이로 옮겨 세워지기 전에 능파각은 천왕문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천왕문은 악귀를 막아주는 문이라 금강역사상이 모셔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능파각은 예외다. 아마도 이곳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을 만나기 전 마음의 때가 저절로 씻기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능파각이 일주문 밖에 있어 상징성이 퇴색되었지만 여전히 속인들에게는 잠시나마 극락세계로 가는 관문이 되어주고 있다. 한국전쟁 때도 화마를 입지 않은 것도 아주 우연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동양학자 조용헌은 그의 저서 <사찰기행>에서 태안사를 물과 관련 있는 절로 설명한다. 징검다리 위에서 도를 통한 전강스님 이야기며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 개의 돌다리를 건너야 하는 점, 청화스님이 조성한 연못 등을 예로 들며 인생에서 담담여수(淡淡如水)의 경지를 맛보고 싶다고 썼다. 담담여수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물처럼 맑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선하고 공부하기 좋은 사찰
곧장 가면 30~4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일주문에 도착하고 시계를 보니 2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태안사는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1980년대 청화스님에 의해 중창되기까지 폐사로 있었다고 한다.
태안사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커다란 연못인데, 청화스님이 일부러 판 것이라고 한다. 언뜻 보고는 연못이 너무 인위적이네, 크네 작네 말들이 많지만 실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고 하니 도인의 큰 뜻을 범인이 알 리가 없다.
공양시간인데도 경내는 조용하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이라더니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싶었는데, 공양간 보살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 참선하고 수행하기 좋기로 태안사만한 곳이 없다는 얘기. 평소엔 이렇게 한가해도 하안거와 동안거 때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바쁘다는 보살님들을 더 이상 붙들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태안사의 보물인 바라와 동종을 보고 싶다며 스님 한 분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다 운 좋게도 주지 스님께 차까지 얻어 마시고 보니 이게 웬 호강인가 싶다. 천은사에서 태안사 주지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각일스님이 보름 전 새롭게 단장했다는 다실 겸 집무실로 이끈다.
벽 한쪽을 유리로 마감해 안과 밖에서 서로를 훤히 볼 수 있게 했다. 신도들이건, 여행객이건간에 좀더 가까이에서 사찰을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만들었단다.
“태안사 참 좋지요”라는 스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정말 좋다”는 대답이 튀어 나온다. 정말 좋다는 말의 의미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차까지 얻어 마시고 보니 그날 태안사엘 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밥에 차에, 빵까지 얻어 먹고 다음에 오면 재워주겠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을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고 내려왔다.
버스를 타고 곡성읍으로 나오는 길 운전기사 아저씨도 똑같은 말을 한다. “태안사 절 참 좋지요?” “네, 너무 좋던데요. 아침에 갔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나왔네요.” “그쵸? 절에 놀러 갔다가 좋다고 그길로 눌러앉은 사람도 여럿 봤으요.” 웃으라고 한 소리였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지스님과 한 약속 때문에라도 올해가 가기 전 태안사를 꼭 한번 다시 찾아야 될 듯 싶다.
글·사진 서태경 기자
태안사는…
지금은 화엄사의 말사이지만 한때는 송광사, 쌍계사, 화엄사 등을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던 사찰이다.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 대안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후 혜철선사가 동리산문을 개창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 말~고려 초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 집단이자 학파)의 하나가 되었다. 동리산의 동리(桐裏)라는 지명은 오동나무 속이라는 말인데, 절 동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친 산의 형세가 마치 한 마리 봉항이 오동나무를 향해 날아드는 형상을 하고 있어 유래된 것이다.
절 동쪽에 불쑥 솟은 봉우리는 봉황의 머리이고 양 능선은 두 날개를 펴고 힘차게 날아드는 형상이다. 전설에 봉황은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죽곡(竹谷)이나 동리라는 지명은 봉황이 편안하게 안식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봉황이 머물 곳을 찾았으니 봉황도 편안하고 이로 인하여 천하가 편안해지는 것이므로 절 이름도 태안(泰安)이라고 했다.
도선국사 역시 이곳에서 혜철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조선 초기에는 태종의 둘째 왕자인 효령대군이 이곳 태안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아 핍박을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수복을 빌기 위해 시주한 대바라(보물 958호)가 태안사에 남아 있다.
그러다 한국전쟁 당시 동리산 일대가 대격전지로 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한동안 폐사로 있다 1969년 곡성군의 보조로 대웅전을 중건, 1985년 청화스님에 의해 확장된 사세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동리산 내에 성기암, 명적암, 봉서암 등 9개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Info
자가운전 호남고속국도 전주IC → 남원 → 구례 방향 17번 국도 → 압록유원지 → 죽곡 방향 18번 국도 → 태안교 → 태안사
대중교통 곡성역과 곡성터미널 앞에서 태안사 가는 군내 버스가 하루 6~7회 운행된다. 약 40분 소요.
입장료 어른 1500원, 어린이 700원 문의 061-363-6669
Info
태안사 근처보다는 압록유원지와 곡성읍에 식당과 숙박시설이 모여 있다.
섬진강에서 잡은 참게와 민물매운탕 등이 곡성의 먹을거리다. 별천지가든 061-362-8747
곡성군에서 운영하는 관광홈페이지(www.simcheong.com) 내 숙박정보(www.gsstay.com)가 자세히 나와 있다.
문의 곡성군청 관광홍보과 061-360-8324
Info
조태일 시문학관 <국토>, <아침선박>, <가거도> 등의 시집으로 알려진 민족시인 조태일의 시문학관이 태안사 가는 길목에 있다. 1941년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안사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도 자신의 시는 태안사에 시작되어 끝났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문학 인생에 태안사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99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창작과 후학 양성에 왕성한 활동을 했다. 조태일 시문학관은 태안사에서 부지를 기증하고 곡성군 등에서 예산을 들여 2003년 문을 열었다. 시인의 유품과 육필원고, 사진과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시간 09:00~18:00 월요일 휴관 문의 061-362-5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