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9
오늘은 참 좋은 날
全 世 俊
아내의 짜증스러운 한마디에 그는 못들은 척 언제나 혼자만의 공간인 아들이 쓰던 햇볕도 들지 않는 골방으로 들어갔다.
-이보게! 뭐라고 한마디 변명이라도 하게!-
잠시 조용하다싶던 또 하나의 그가 머리통을 쿵쿵 쥐어박았다
“저녁은 먹고 들어 온게요?”
씽크대 앞에서 덜그덕 거리고 있던 아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의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응... 먹고 왔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내 뱉으며 거치장스러운 웃옷을 벗어 침대 위로 획 던지며 의자에 풀썩 걸터앉았다.
-아니, 자네 어디서 저녁을 먹었나? -
-시끄럽네!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는 퉁명스럽게 혼자 중얼거렸다. 다리가 뻐근해 왔다. 축 늘어진 어깨다 아팠다. 온 몸이 피곤해 왔다. 이럴 때는 담배라도 한 개피 피워 물고 싶었지만, 그것도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내의 잔소리와 성화에 못 이겨 몇 십 년을 피워 온 담배를 끊은 것도 오래 되었다. 한때는 베란다로 쫓겨나 가슴 깊이 연기를 들이마시며 답답한 가슴속 찌꺼기를 속 시원하게 내 뱉으며 잠시나마 시원함을 느끼곤 했지만, 그것도 아내의 잔소리로 계속 할 수 없었다.
“빨리 나와서 식사해요!”
다시 한 번 씽크대 쪽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쨍하고 파고들었다.
“?”
틀림없이 저녁밥을 먹고 왔다고 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빨리 나와요! 반찬 다 식어요!”
역시 아내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차 있었다.
“먹고 왔다니까......”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세탁실로 난 창문 위에 걸린 사진으로 시선이 멈추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찍은 빛바랜 가족사진이었다. 그 속에서 어린 아이들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청년같이 젊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참
-1-
대단해 보였고, 그 옆에 얌전하게 앉아있는 아내의 모습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_ 그 때가 좋았는데.....-
“뭐해요! 빨리나와 식사하라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다시 씽크대 쪽에서 쨍 울려왔다. 그는 놀란 듯 사진에서 시선을 소리 나는 쪽으로 옮겼다.
-빨리 가 보게! 그러다 굶겠네!-
-응? 어....그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아내는 벌써 식탁 앞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식탁 앞에 앉았다. 옛날 같으면 볼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식사 장면이었다. 밥상을 차려 놓고 남편과 아이들이 올 때 까지 식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 모습이 잠시 안개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 저녁 먹었는데......”
모기소리 같은 그의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 나왔다.
“먹긴, 어디서 먹어요! 어서 식사해요.”
아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
아내는 저녁 식사를 아직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어서 식사해라. 굶으면 너만 손해다!-
녀석이 또 한 번 큰 소리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는 수저를 들었다. 마
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는 점심 무렵 쫓기듯 집을 나서 남대천 둔치 노인 쉼터에서 장기와 바둑 놓는 것을 어깨 너머 구경하며 한 나절을 보냈고, 점심때가 되었을 때, 마침 밥 차가 왔다. 그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 노인들 틈에 끼어 줄지어 섰고, 식판위에 밥과 반찬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겨우 여기저기를 곁 눈짓 해 빈 간이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부지런히 점심식사를 시작했다.
매일 노인들이 모여 바둑과 장기를 두고 있는, 둔치 노인 쉼터에서 점심을 기다리며 줄 서 있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나가곤 했지만, 그가 그들과 줄지어 배식 차례를 기다려 식사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 처음 보는데.....”
고개를 숙이고 부지런히 식사를 하고 있는 그 옆자리에 어수룩한 옷차림의
사내가 식판을 내려놓으며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잠시 시선이 부디 쳤다.
사내의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처음 보는데..... 형씨! 어디서 왔소?”
사내의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엷은 미소까지 띄우며 그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네.... 저기 가까운 곳에 삽니다. 오늘 처음.....”
“그... 그래요? 반갑습니다. 아! 이거 반주 한 잔해야 하는데..... 형씨. 돈 있으면 이 천 원만 ....”
사내는 눈을 끔벅이며 싱긋 웃었다. 사내는 웃고 있었지만, 그는 머리카락이 쭈뼛 했다.
“네?”
여기저기 간이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노인들이 사내와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허.... 이 양반이 귀가 멀었나? 이 천 원만... 돈이 좀 모자라서...”
사내의 얼굴에서 야릇한 웃음이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미 사내의 내역을 잘 아는 듯 모두 외면을 하면서도 힐끔힐끔 사내의 다음 행동을 은근히 주시하는 듯 했다.
“아! 이 천 원.... 이거, 미안 합니다. 돈 갖고 나온 것이 없어서....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나?”
그는 공손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주 미안한 듯 사내를 바라보며 수저를 들었다. 은근히 겁이 났다. 곧 무슨 행패가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젊은 놈이 대낮부터 술 마시고...-
-야!..이 사람아 참아. 그냥 가만있어!-
또 하나의 그도 무엇인가 불안한 듯 머릿속에서 살며시 외치고 있었다.
“그래요? 하하.. 이 양반아, 돈 좀 가지고 다녀요. 에이.....”
사내는 다시 그를 한번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식판을 들고 온 식판을 덥석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이 수돗가로 옮겨갔다.
무엇인가를 기대하듯 했던 노인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식판에 담긴 음식을 어떻게 비웠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빈 식판을 간이 주방에 내려놓고 음료수 한 잔을 받아 들었을 때, 사내는 구석진 한쪽 식탁
에서 몇 사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우리고 있었다.
“저 사람, 식사 할 때 마다 그래요..... 술주정도... 오늘은 그래도 얌전 하네요. 허허허... 참”
누군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빈 음료수 잔을 쓰레기봉투에 던지고는 그 자리를 떴다.
가끔 명절이나, 뉴스에서 줄지어서 식판을 들고 배식을 기다리는 노숙자나나 노인들의 사진을 보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무관심으로 흘러 보내곤 했다. 그들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로만 생각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요즘 들어 그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사실 그의 주머니에는 천 원짜리 몇 장 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쑥 사내의 술값으로 사내 손에 쥐어 줄 생각은 없었다. 조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가 스며들었지만, 대 낮 술값으로 지출한다는 것이 스스로 허락되지 않았다.
-잘 했어! 빌어먹을.... 젊은 녀석이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쯧쯧쯧....-
-내가 잘 했지?-
-그래, 참 잘 했다. 그런 녀석 줄 돈이 있으면 너나 먹고 싶은 것 사 먹어라!.. 빌어먹을.... 세상 참 더럽다!-
그날 이후 그는 가끔 식사가 제공되는 고수부지 노인 쉼터를 그냥 지나치곤했다. 처음 앉아 본 야외 노인 쉼터. 그리고 점심 식사, 많은 노인들이 모여들어 장기나 바둑을 즐기고 있었지만, 젊은 노숙인들의 술자리도 무시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는 그들을 외면하면서 목적지 없는 발길을 옮겼다.
“내일 영일네가 온다는데....”
저녁 밥상을 치운 아내가 씽크대에서 덜거덕 거리며 혼자 중얼 거렸다.
“뭐? 영일이가?”
커피 잔에 종이 커피를 쏟아 넣으며 그는 식탁 앞에 앉았다. 아내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식사 후 한 잔의 커피도 그는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예전에 없던 새로운 그의 식후 할 일이었다.
“그래요”
“무슨 일로?”
영일네가 온다는 아내의 한 마디에 늘 마시던 커피 맛이 달라졌다. 늘 마시던 똑 같은 커피였지만, 그는 스스로 커피 맛이 예전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은..... 휴가랍디다. 아이들이랑 모두 같이....”
“아이들이랑?”
커피 맛이 더욱 쓴 것만 같았다. 손주 손자들이 같이 온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러나 그는 영 마음이 커피 맛 쓰기만 했다. 출가한 아들이 가족들과 같이 처음 몇 번 고향을 찾아 왔을 때, 그는 즐겁기만 했다. 손주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새삼 삶의 보람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몇 번 겪은 후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출가한 아들 딸 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손주 소녀들이 차츰 자랄수록 부모를 찾아오는 기회는 줄어 들었다. 출가한 딸은 시댁에 가야한다고 했고, 출가한 아들 녀석들은 처가에 간다는 전화로 안부를 대신하곤 했다. 출가한 아이들과 만나는 기회가 많이 줄어 편하고 홀가분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어쩐지 그들로부터 ‘아버지’라는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서운함이 가슴속에 깊이 자리 잡기 시작 했다. 출가한 아이들뿐만 아니었다. 이젠 그렇게 얌전하고 고분고분했던 아내까지도 그를 밖으로 내 보냈다. 그가 하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혼자 집을 보거나, 아니면 집 밖으로 나가 거리를 헤매야 했다. 출가한 자식들 세 가족이 한데 모이는 날에는 모처럼 즐거웠지만, 그러나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더욱 좁았다.
쓴 커피를 훌쩍 마셔버린 그는 거실 긴 의자에 기대앉았다. 돋보기를 찾아들고 아침에 읽다가 접어놓은 신문을 다시 펴들었지만, 영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는 할 일을 다 마친 듯 안방으로 들어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연속극을 보는 듯 했다. 습관처럼 하는 아내의 저녁 일과였다.
그는 신문을 접어치우고 아이들 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낡은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늘 쳐다보는 천장의 무늬는 변함이 없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아내의 방에서는 계속 텔레비전의 연속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어제나 오늘이나 늘 잠자리는 혼자인지 오래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젊었을 때 그렇게 같은 잠자리를 좋아했던 아내는 언제부터인가, 아니 그가 회사를 정년퇴임하고 얼마 후부터 하루 이틀 그의 곁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가 피곤해서 그렇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이젠 아예 그의 곁에서 떠나버렸고, 그가 불러도 무응답이 예사였다.
_허어 참. 많은 사람들이 각방을 쓴다더니..... 그게 사실이군...-
-그래 맞다. 자네만 그런 것이 아니야! 참고 감수해야지...-
녀석의 참견은 여전했다. 어쩔 수 없었다. 하루 이틀..... 이젠 혼자 잠자리
에 든다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고 습관이 된 듯 기대하지도 않았다.
-늙으면 다 그런 거야._
-시끄럽네!-
그는 전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뒤척이던 그는 어둠속으로 잠적해갔다.
다음 날 오후부터 그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 되었다. 아들이 세 아이들을 앞세우고 아파트로 찾아 들었고, 뒤를 이어 먼 길 승차에 축 늘어진 며느리가 뒤따라 들어와 벽에 기대앉았다. 손자 손녀를 보기 전부터 며느리는 먼 길을 힘겨워하면서 시집을 찾아 들곤 했었다.
“힘들었지?”
역시 아내는 축 늘어진 며느리를 위로하며 짐을 정리하며 금시 저녁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손자 손녀들을 한 동안 어루만지며 오랜만에 사람 사는 것 같은 흐믓함에 젖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가지 못했다. 아내는 온 종일 집안일에 매달리면서도 아이들과 같이 있는 즐거움에 빠져 있었지만, 그는 아이들과 집에서 오래 같이 지낼 수 없었다.
“집안에만 있지 말고 밖에 바람이나 쏘이구려! 답답할 텐데....”
아내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아내의 충고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금시 알 아 들을 수 있었다. 집안에서 귀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으음.... 그래야지.... 너희들 재미있게 놀아라!”
그는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었다.
“아버지. 같이 바다에 가요. 아이들 데리고....”
현관문을 나서는 그에게 아들이 한마디 뱉었다.
“그래요 아버님. 아이들도 바다에 가고 싶어 하는데....”
며느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바다?-
바다에 갈 계획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래.... 너희들 끼리 다녀오렴. 난, 힘들다..... 얘. 에비야 아이들 잘 보살펴라. 아이들 조심시키고... 애비 노릇 잘 해 줘라...”
그는 현관문을 밀치며 밖으로 나왔다.
지난날 아이들과 같이 바다 모래밭을 딩굴었다. 파도에 몸을 띄우고, 바위틈이 달라붙은 소라를 줍던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때가 참 좋았는데....-
-그렇지! 그때가 참 좋았지...아이들과 모래 위를 딩굴고.....-
-너도 아직 기억하니? 그때 참 즐거웠지...허허.-
-다 지나간 일이야!-
녀석은 줄곧 머릿속에서 기억을 살려내고 있었다.
-이제 틀렸어! 다 잊으라고.. 많이 늙었다고....쯧쯧-
-그래, 맞다 맞아. 이젠 틀렸다고!-
-그땐 아이들 기르는 재미로 젊은 날을 재미있게 보냈지만, 이제 다 키워 출가 시킨 지금 무슨 재미가 있겠어? 손자 손녀 보는 재미? 허허... 그것도 잠시 뿐이네. 한 보름만 애들 같이 있어보게!-
-알았어! 그만, 그만해도 내 잘 알고 있네.-
녀석은 그의 머릿속을 맴돌며 떠들었다.
그는 사방이 꽉 막힌 승강기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일층 단추를 눌렀다. 승강기 천정 한쪽 구석에 언제나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안경잡이가 그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뱉었다.
“오늘은 또 어디로 가시렵니까?”
“모르겠네... 그저 나가는 거야....”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들 내외가 오고, 재롱을 부리는 손녀 손자들이 모처럼 찾아 왔지만, 어쩐지 그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나도 우울증이 찾아 온거냐? 남자도 우울증에 걸리냐?-
-시끄럽다! 너 마음먹기 달렸다. 야! 운동도 좀 하고 등산도 좀 해봐라.-
사실 그는 매일은 하지 못하지만, 가끔 가까운 산에도 오르고 남대천 고수부지를 한 바퀴 돌아오는 걷기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쾌함이나 가벼웠던 마음은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이면 곧 자신의 몸에서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다.
“어디 갔다 와요?”
무료하게 방을 지키고 있던 아내의 판에 박힌듯한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소리도 이젠 만성이 된 듯 싶었다.
승강기를 빠져 나왔다. 관리사무실을 지나 노인정 앞을 지날 때 노인정 안에서 손뼉을 치며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오늘이 노래 부르는 날인가?-
노인정에서는 매 주 한 번씩 노래 강사가 찾아와 노인들을 모아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처음 갔을 때부터 할머니들로 가득한 것을 본 이후 그는 노인
정에서 열리는 노래 공부를 포기했었다.
정문을 지나 큰길로 나왔다.
-그래, 노인복지관?-
그는 노인정 안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를 듣고 문득 떠 오른 곳이 있었다. 시에서 작년에 만들어 놓은 노인 복지 회관 이었다
-그래, 생각 잘 했어! 진작 그곳에 가야했지!-
-한번 가 볼까?-
-너, 정말?-
사실 그는 노인복지회관 이야기는 친구들 모임에서 여러 번 들었지만, 처음 등록을 하고 명패를 받은 이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고수부지 옆 웅장한 삼층으로 자리 잡은 현대식 노인복지회관에는 벌써 많은 노인들이 컴퓨터 교실, 탁구 교실, 독서교실 운동교실..... 각 방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65세 이상 남녀 노인네들만 출입할 수 있는 복지회관에는 직장이 없는 노인들이나 퇴직한 회사원과 공무원 출신들이 모여 여가를 보내고, 단돈 천원으로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는 잠시 쉴 겸 이층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허어 참.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탁구라도 한 번 치려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하겠네....쯧 쯧.
“글쎄 말이네....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좀 빠지지....여기까지 뭐 하러 온담..주책이야.....집에서 손주들이나 봐 줄 것이지...”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두 사내(?)들의 짜증석인 대화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리고 일층으로 내려 오는 계단을 밟았고 복지관 문을 밀치며 밖으로 나왔다.
-야. 어디로 가는 거야? 왜 나왔어?-
-에잇! 가서 손주나 보란 소리 못 들었냐?-
-그 소리 듣고 나왔단 말이냐? 허허..-
-늙은이는 빨리 죽어야 해!-
-........-
-너도 할 말이 없지? 세상 참......-
-젊었을 때가 참 좋았지!-
복지관을 나온 그는 그냥 발이 가는대로 걸었다.
-8-
-내가 늙은 사람? 그래, 나이 들어 늙은 사람, 노인(老人)이지....이젠 죽음을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냐?-
-시끄럽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나약해 졌니? 너는 시니어(Senior)다! <가장 숙련된 용사!>, 과거 로마 군대에서 가장 숙련된 용사란 말이다! 너는 가장 숙련된 용사야! 이 바보야..-
녀석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내가‘숙련된 용사’라고? <시니어>라고?-
-그래, 맞다. 너는 진짜 <숙련된 용사>다. 너 젊었을 때 얼마나 멋지게 살았냐? 남 해치지 않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 생활에다, 아이들도 잘 키워 교육도 잘 시키고, 마누라 하고 재미있게 할 일 다 하고 살았고, 가정도 잘 이끌어왔고....넌,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어! 나이가 문제냐?-
녀석은 숨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 하냐?-
그는 다시 어디론가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래....... 아이들 다 키워 출가 시키고 손주 손녀 재롱 피우겠다. 이제는 늙었지만, 평생 한 방 쓰며 살아 온 마누라 있겠다. 허 허, 뭐가 그리 불만이냐? 평생 연금으로, 아들 딸 들에게 손 안내밀고 둘이 오붓하게 .....-
-음.... 그럴 듯하네!-
그는 녀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잠시 말을 멈춘 순간 그의 머릿속을 번개 같이 지나가는 텔레비전 화면이 있었다. 누군가의 퇴임 인사를 중계하는 장면이었다. 무료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였다. 흰 머리카락이 보일락말락한 멋진 사내의 음성이 우렁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같이 정년퇴임하는 듯한 사람들이 힘없이 서 있었다.
“....지금은 백세 시대입니다. 이제 우리가 오 육십 대에 직장에서 은퇴한다고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리 타이어’ 하겠습니다. 이제 다시 이 순간부터 새로운 바퀴를 달고 달리는 ‘리’‘타이어’입니다. 오늘부터 다시 새 바퀴를 단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우리들은 달리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퇴임식장에 큰 박수 소리가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왔지만, 그날 그는 별 생각 없이 자리를 떴다.
-그래. 새로 시작 하는 거야! 젊었을 때처럼!-
-잘 생각했어!-
녀석의 참견은 끝이 없었다.
성남동 큰 길을 지나 노숙인 쉼터를 지났다. 그곳에는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
탓인지 한가했고 몇몇이 이곳저곳 식탁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다리 끝에 자리 잡은 교회 종탑이 보였다. 오늘따라 교회 입구에서 그전부터 펄럭이며 붙어있는 긴 알림 광고가 시선을 파고들었다. 지나칠 때마다 코웃음 치며 스치던 프랑 카드였다.
-그래. 내가 할 일이 많아!-
-뭘 하려고?-
-할 일 많지! 그래. 노인 쉼 터 배식도 돕고... 시니어 클럽에 신청해 봉사활동도 하고... 또. 건널목에서 등하교 아이들 돌보기도하고..학교 주변 우범지역 순찰하면서 아이들 안전관리도 해 주고....
-뭘 할 일이 그렇게 많니?-
-그뿐이 아니지... 또 있지. 소외 장애인들 활동도 돕고, 그뿐인가 국립묘지 태극기 설치, 잡초제거랑 묘비 닦기도..... 또....요양원 환자 발마사지, 청소랑 목욕보조....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하하하 이제 생각하니 할 일이 너무 많아!-
-하 참, 할 일 많아 좋겠구나!-
녀석이 덩달아 신이 난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야! 서라!-
-끼익! 쿵!-
가방을 맨 아이가 급한 듯 건널목으로 뛰어 들었다.
순간, 다리 끝 사거리 건널목에서 급정거하는 자동차의 굉음이 들렸고, 그는 쿵 어딘가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건널목으로 뛰어든 아이를 밀어제친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밤늦은 종합병원 응급실이었다.
“정신 좀 들어요?”
아직까지 놀란듯한 아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 다 보고 있었다.
“그만하길 다행이에요.”
아내는 그의 손을 꼭 쥐고 마음이 놓인 듯 조금은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미소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옛날 예쁘던 그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오고 있데요...”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이?”
그는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졸졸졸 따라다니며 용돈 달라고 하던 아이들 모습이 떠오르자 그는 빙긋이 웃었다.
“학생은 당신 덕분에 무사해요. 학생 부모들이 조금 전 다녀갔어요.”
“그래! 다행이군!”
병원 안이 참 아늑해 보였다. 누워있는 환자들이 모두 웃고 있는 듯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그래! 내가 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가정도....우리 아이들도, 손주 손녀들도 찾아올게 아니냐?-
문득 교회 정문에서 펄럭이던 현수막이 떠올랐다.
아이들과 손주 손녀들이 오랫동안 집에서 같이 지냈으면 싶었다. 그렇게 무관심했던 아내에 대한 미움과 서운함이 눈처럼 녹아내렸고, 어렸을 때 졸졸 따르던 아이들의 모습이 환하게 눈앞에 다가왔다.
-우리 이제부터 같은 방 써요!-
아내가 소주 한 병과 안주 접시를 들고 찌든 노인의 냄새만 풍기는 그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야! 너 정신 차려!-
녀석은 병상에 누워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를 오늘따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
#.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입선. <아동문학세상>동화 신인상
#. ,<한국교육신문> 꽁트 입선. 기타
#.지은 책; 꽁트 집 <비틀거리는 바다> 동요 가사 집<시골장터><기다림>
동화집<아빠를 찾았어요><잘 키워드릴게요><회고록>외 중 장편#.동도신문 꽁트 연재작가. 강릉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아동문학연구회. 한국아동문학회. 강원문학회. 강릉, 관 동문학회. 솔바람 동요문학회 회원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