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이던가? 아무튼 1990년에 미국에 와서 이듬해에 저는 이모부와 함께 둘이서만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차는 고물 닛산 닷선 210 이었고, 이 차가 길이 들 정도로 그렇게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친척으로부터 단돈 4백달러 주고 샀던 이 고물차를 끌고 안 다닌 곳이 없네요, 생각해 보니.
아무튼 에어컨도 안 달린 이 차를 타고 집에서 8백마일 정도 떨어진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엘 다녀왔으니, 저도 그땐 참 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집에서 멀리 여행을 다니다보면 먹는 것도 장난 아닌데, 아무튼 그 당시만 해도 아이다호나 몬태나의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저희를 쳐다봤습니다. 백인들만 있는 동네에서 아시안을 실제로는 처음 보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고.
메뉴는 보통 아침엔 팬케이크, 점심은 건너 뛰거나 혹은 햄버거로 대충 때웠고, 저녁엔 나름으로 스테이크 같은 든든한 것들로 먹곤 했습니다.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건 먹는 거니까. 제 낡은 닷선 210은 털털거리면서도 우리가 원하는 곳을 찾아갈 수 있게 해 줬습니다. 그 차는 스틱쉬프트였고, 지금 타고 다니는 VW 티구안을 사기 전까지 저는 내내 수동식 기어가 달린 차를 탔었습니다(운전은 기어 바꾸는 손맛이지).
아무튼 옐로우스톤 관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파서 아무데나 가서 뭐라도 먹어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어딘지 기억도 안 나는 동네로 빠져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습니다. 그때쯤엔 이미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미국인들의 눈길엔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메뉴에서 바로 눈에 띈 것이 '리버 앤 어니언'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소 간과 양파를 볶아 내 놓는 요리죠.
그때 이후로 저는 미국 레스토랑에 가면 이 메뉴가 있는가 찾아보곤 했습니다. 소 간에 양파를 넣은 이 간단한 요리가 이렇게 매력이 있는 줄 몰랐던 겁니다. 재밌는 건, 큰 레스토랑에선 이런 메뉴가 없는데 어디 시골의 레스토랑에 가면 꼭 이 메뉴가 있었고, 여행 다닐 때마다 이걸 찾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나선 아내의 입맛에 맞춰 주문을 했기에 이걸 따로 먹을 이유가 없었던 것 같긴 하고, 아무튼 왜 갑자기 이게 땡겼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중국 마켓에 갔다가 소 간을 파는 걸 보고 오래 전 먹었던 리버 앤 어니언이 생각나진 않았을까 싶습니다.
영화 '늑대와 춤을' 에선 원주민과 동화된 삶을 살던 주인공 존 던바가 수우족 인디언들을 도와 들소 사냥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우 족 인디언들은 들소를 잡자마자 바로 배를 갈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들소의 생간을 먹으며 이걸 잘라 던바에게 건네는 장면이 나오죠. 생간 잘 먹는 우리에겐 "맛있겠다"는 감탄사가 나오지만, 미국인들에겐 정말 그건 생소할 겁니다. 그러나 이들도 소의 간이 맛있다는 건 알고, 그 역사도 상당히 오래 됐습니다.
문헌을 들여다보면, 소의 간을 양파와 곁들여 먹기 시작한 건 로마 시절부터이고, 이 음식은 폴란드계 유태인들로부터 미국으로 전해졌다고 하는군요. 하긴 폴란드가 아니더라도, 소의 간을 조미 가공해 먹는 독일의 레버부어스트라던지, 프랑스의 파테라던지, 간으로 만든 요리는 적지 않지요.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도, 천년 묵은, 혹은 꼬리 아홉개 달린 여우의 최애 음식은 사람의 간 아니던가요? 물론 이동욱은 민초를 더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이 음식이 갑자기 그리워져서였는지, 중국 마켓에서 2파운드짜리 간을 샀는데 가격이 4달러도 채 안 합니다. 살코기는 비싼데 이런 부속 고기는 저렴하네요. 아마 찾는 사람이 그다지 없다는 것의 반증이겠지요. 집에 가져와 잘 씻은 후 페이퍼타올로 물기를 빼 준 후에 이걸 다시 우유를 부어 둡니다. 이러면 잡내가 없어진다고 하네요. 그리고 양파 두 개를 껍질 벗겨 이걸 어니언 링 모양으로 얇게 썰어 스킬렛 팬에 담고, 여기에 버터를 넣고 볶습니다. 그리고 그걸 하는 동안에 밀가루(저는 밀가루와 아몬드 가루를 섞어 썼지만)에 소금과 후추를 섞어 튀김옷을 만들어 줍니다. 물을 넣을 필요는 없구요. 저는 아예 간을 썰어 여기에 버무려 주었습니다.
양파를 따로 빼낸 후에 그 스킬렛 팬에 그대로 버터를 또 투하하고 그걸로 밀가루 입힌 간을 볶습니다. 한 3-4분 정도 볶다가 뒤집어 또 볶고. 그렇게 한 후에 나중에 미리 볶아 놓았던 양파를 다시 투하해 또 볶습니다. 그리고 불 꺼 두고... 이런 음식엔 와인 가야죠. 어쩌면 소주와 맞춰도 좋을 듯 하지만, 내장 요리라 해도 여기에 밀가루 아몬드 가루 들어가면 와인을 맞춰도 좋지요. 마치 우리 요리 중에서도 온갖 전류에 와인이 잘 가는 것처럼.
카테나라고 하는 아르헨티나 와인이 있습니다. 그 동네답게 말벡이라는 품종을 전문으로 하지요. 아르헨티나의 말벡은 프랑스 와인의 핏줄을 갖고 있는 포도입니다. 19세기, 유럽에 필록세라 곰팡이가 창궐, 거의 모든 포도나무들이 전멸하고 결국 병충해에 강한 미국산 포도나무를 들여다가 접붙이기를 해 다시 살리는 일이 생기기 전, 말벡은 그 당시 유행이던 미주 이민 붐을 타고 이민을 선택한 농부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까지 가게 됐으니. 아무튼 안데스 산맥은 이들 포도에게 전혀 새로운 신세계였을 터이고.
과거, 보르도 와인을 만들 때 사이드로 쓰이는 정도였던 말벡은 아르헨티나에 와서 메인 플레이어가 됐습니다. 쇠고기도 풍성한 이곳에서, 아르헨티나 인들은 점심 시간에 말벡 한 병씩을 비우는 건 예사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카우보이라 할 수 있는 가우초들이 이 나라의 유명한 평원 지역 팜파에서 기르는 소들 덕에,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소고기가 가장 저렴한 지역이지요. 와인 문화도 이에 따라 풍부해진 것이 당연하지요.
카테나는 1902년 이태리에서 이민 온 카테나 자파타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의 손자인 니콜라스 카테나가 사업차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다가 프랑스 보르도에서 제대로 와인을 알게 됐고, 그 뒤에 캘리포니아에서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를 몇 차례 방문, 미국 와인의 혁신적 면모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시도 자신의 가족이 세운 와이너리에 혁신을 불어넣겠다고 다짐했다지요. 그리고 그의 딸 로라가 이 와인 산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현직 의사이기도 한 그녀는 '비노 아르헨티노 (아르헨티나의 와인)'이라는 저서를 쓰고, 이후 '포도밭의 황금'이란 제목의 유명한 저서를 냅니다.
카테나의 '하이 알티튜드' 말벡, 안데스의 고산에서 자란 이 동물성 강한 와인은 간 요리와 매우 잘 어울렸습니다. 육고기 요리보다 훨씬 거칠고 강렬한 내장 요리. 그러나 너무 튀는 잡내가 있을까봐 간을 30분쯤 우유에 담궈 놓아 잡내를 뺐고, 양파의 또 다른 강렬함은 간과 어울리기 딱 좋았습니다. 간만에 와인에 집중을 해서 마셨고, 그러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한 병을 다 비우는 호기를 부렸습니다.
아마 요즘 조금 뭔가 희망을 보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하지 싶습니다. 과일 향과 일종의 가죽의 느낌이 물씬해서인지, 간의 야성과 잘 어울리는 야성적 와인입니다.
원래 제 블로그는 와인 블로그였죠. 제가 처음 파워블로거가 된 건 와인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해 동안 와인으로 파워블로거였는데, 언젠가부터 갑자기 시사 부문의 파워블로거가 되어 있더군요. 어쨌든 7년 연속 파워블로거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시작이 와인이었고, 그런 면에서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쓰고 싶지만 세상이 이러니 와인 이야기를 쓰기가 참 뭐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와인 이야길 좀 자세하게 쓰네요. 아마 그것은 요즘 보이는 일말의 희망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발 세상이 좋아지길, 그래서 제가 더 많은 와인 이야길 쓸 수 있기를.
시애틀에서...
첫댓글 오랜만에 종상님 글을 보니 좋네요~^^
풍미가 진한 음식에 흙내음과 스파이쉬한 말벡의 조합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이고, 격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영 불편해서 와인을 안 마시다가 최근에 조금씩 즐기고 있네요.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역시 파워블로거는 뭔가 다르단 느낌을 받았네요.
자주 글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주 글 올리려면 제가 자주 와인을 마셔야 하겠지요 ^^
그러려면 즐거운 일이 많아야 합니다. 최소한 우울하진 않아야...
아무튼 제대로 된 정치는 사람을 춤추게 하고, 엉망인 정치는 사람을 한숨 쉬게 만드는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나락으로 보내버리지요. 아무튼 용산 멧돼지 퇴진이 빨리 이뤄지면 그만큼 와인 글을 더 많이 쓰게 될 것 같기는 하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