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의 겨울은 '비'입니다. 아주 가끔 눈이 오기도 하고, 우리나라처럼 추운 그런 때는 매우 드물고, 가끔 맑은 날도 없는 건 아니지만, 10월 말부터 4월 정도 까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는 비를 예상하는 게 현명한 거죠. 그러다 보니 우산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비가 가져오는 우울함 때문에 겨울엔 자살률도 무척 높아집니다. 그러다보니 그 우울함을 이겨보려 커피들을 그리 마셔대는 것이지요.
이런 날이면 국밥이 땡깁니다. 지난해 이맘 때 한국에 다녀온 후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한국 다녀와서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동대문과 을지로 일대에서 먹었던 순대국밥 생각이 그렇게 나더군요. 몇년 전 우리나라 갔을 땐 실감을 못했던 부분이긴 한데, 적어도 먹는 것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미국을 이미 넘어서는 선진국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선택의 폭, 가격, 서비스, 이 모든 것이 미국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젠 한국의 '옥동식'이 뉴욕 타임즈 선정 최고 맛집 중 하나가 되어있을 만큼, 우리 음식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시애틀에도 한국식 포장마차나 한국식 치킨집은 물론, 청춘핫도그도 성업할 만큼 이른바 K푸드의 영향력은 제가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와 비교해보면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을만큼 달라져 버렸죠.
이건 순전히 문화의 힘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판데믹 상황에서, 집안에 갇혀 뭔가 재밌는 소일거리들을 찾아야 했던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유튜브와 OTT에서 그 탈출구를 찾았죠. 한국 드라마는 이런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충분했습니다. 그들이 지금껏 봐 왔던 식상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죠. 독특한 아이디어와 동서양의 문화를 녹여 놓은 듯한 우리의 드라마들은 독특한 것과 익숙한 것들이 함께 잘 비벼져 있었습니다.
마치 비빔밥에 길들여진 외국인들이 그렇듯, 그들은 우리의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드라마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드라마 내 고정 소품처럼 늘 등장하는 '녹색 병'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한국에 군인으로 다녀온 미국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들도 있지만, 소주는 꽤나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소주를 마시는 문화 자체에 더 열광한 건지도 모르지요.
미국은 의외로 술에 대해선 매우 보수적입니다. 어디 오픈된 공간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미국인들로서는 터부시 되고 있는 일이기도 하죠. 우리나라에서같으면 공원에서 술판을 벌이는 일은 매우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겠지만, 이곳에선 사람들이 지나가는 퍼블릭 스페이스에선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캔맥주를 종이 백에 싸서 들고 홀짝거리는 건 이런 엄격한 음주문화의 한 단면입니다. 만일 술 용기를 그대로 내보이며 노상에서 음주를 하면 경범죄로 딱지를 먹거나 심지어는 체포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라스베가스는 알중이들의 천국이죠. 베가스의 스트립 지역은 술을 들고 다니며 마셔도 누가 뭐라고 안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원리주의에 충실한 미국의 보수적 개신교 신자들은 이곳을 보통 고모라(예, 그 소돔과 고모라, 성경에서 의인이 없어 불의 심판을 당한 두 도시 중 하나)라고 부를 정도인데, 아무튼 이곳에선 그 음주의 문화가 다른 곳과는 전혀 다릅니다.
집에 배추국이 있었습니다. 일요일 오후 성당 다녀와서 출출했고, 일요일 낮술이 꽤 당기는 날씨였습니다. 아내와 바닷가에 다녀왔는데 오늘은 바람도 많이 불고 춥더군요. 아무튼 배추국에 밥을 말아 먹는데 이상하게 그냥 먹기는 싫은 그런 날, 진판델 한 병을 땄습니다. 진짜 미국 와인이지요. 카버네 소비뇽, 멀로, 시라, 산지오베세, 그레나슈, 이 정도의 품종이 거의 와인 월드를 점령하고 있는 그런 세상에서 미국의 진판델은 정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요.
이게 미국의 독보적인 와인이 될 수 있었던 데엔 이태리 이민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 자라던 츠를레나크 카슈텔란스키라는 와인은 시실리로 건너가 프리미티보라는 이름으로 키워집니다. 아마 이름으로 짐작컨대, 그 당시에도 와인을 만드는 포도의 원산(프리미티보)은 그쪽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 싶습니다. 아무튼 이 포도는 시실리에서 왕성하게 자랐고, 이것은 미국 이민을 선택한 이태리 인들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포도들은 캘리포니아라는 신세계 낙원에 자리를 잡고 말 그대로 굳건한 뿌리를 내리게 되지요.
일반 양조용 포도는 수령이 3년에서 10년 정도에 최고 품질의 포도를 소출해 낼 수 있다지만, 진판델은 말 그대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좋은 포도가 나옵니다. 문제는 한 가지에 난 포도라도 서로 익는 시간이 달라서 애를 먹는다는 것 뿐, 하지만 그것도 지금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잘 익은 놈들은 따서 레드와인으로 만들고, 조금 모자란 놈들은 그냥 달달한 '화이트 진판델'로 만들면 되니까요.
이런 저런 면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포도는 진판델입니다. 그리고 저는 레드 진판델을 무척 좋아하지요. 일단 포도의 당도가 높아서 도수가 높은 와인을 만드는 게 가능합니다. 오눌 배추국에 밥을 말아먹으며 반주 비슷하게 했던 이 와인은 14.5%의 강건한 놈입니다. 그러나 진판델 와인 중엔 알코올 함량이 거의 20% 정도까지 나오는 놈들도 있습니다. 굳이 강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말이지요. 와인 전문지인 '와인 엔튜어지스트'엔 관련 항목이 이렇게 나오더군요.
"The grape, known as Primitivo in Italy, thrives in warm, dry climates and can produce wines from 12% to nearly 20% alcohol-by-volume (abv). Wines are often made from old vines that have matured in the vineyard for as long as a century."(원문출처: https://www.wineenthusiast.com/varietals/zinfandel/#:~:text=The%20grape%2C%20known%20as%20Primitivo,as%20long%20as%20a%20century.)
Zinfandel Wine Ratings, Reviews and Basics
Zinfandel is a black-skinned grape grown primarily in California that produces red wines, rosés or Port-styled fortified wines.
www.wineenthusiast.com
아무튼, 이 와인은 불고기에도 잘 가고, 잡채에도 잘 가고, 이런 저런 한국음식에 꽤 잘 갑니다. 아주 매운 게 아니라면. 이 포도주는 약간 단맛이 도는 편이고(알코올 도수가 높으면 단맛은 자연스레 나기도 합니다) 후추 같은 느낌도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배추국에 맞춘 이 와인은 몬터레이, 특히 '에덴의 동쪽'의 무대가 됐던 살리나스 지역에서 170년간 운영돼 온 제임스 브라이언트 힐 와이너리에서 만든 겁니다. 이 와이너리는 자기들의 포도밭에서 직접 기른 포도를 사용해 와인을 만들기도 하지만, 여타 다른 와이너리들처럼 저렴한 포도를 다른 포도밭에서 구입해 와인을 만들기도 하지요. 오늘 마신 건 그런 이유로 매우 저렴한 놈이고(병당 6달러 조금 넘는) 별 기대 없이 마셨지만, 제게 '어,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잠깐 갖게 할 정도로 캘리포니아 진판델의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실망 없이 마실 수 있는 놈이었습니다.
아니, 진판델 와인도 이젠 한국 음식을 맞추는 데 사용할 수 있다구요. 그리고 한국 음식은 이곳에서도 엄청나게 핫해졌고 말이죠. 그런데 소주가 15%가 안 되는 놈들이 나온다는 이야길 듣고 참 황당하더군요. 제가 한국에서 살 때는 25%가 대세였고,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20%가 되더니, 점점 더 도수가 약해빠져가지고... 그럼 소주가 아니잖습니까. 증류 안 한 와인도 15%가 넘는 세상이라고! 그저 어떻게 술조차도 물 더 타서 몇병이라도 더 만들어 특히 여성층을 타겟으로 더 마시겠다고 이러지 말고, 굳이 세상사 걱정 없이 술에 기대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아마 그러고 나서야 이제 우리는 술의 향과 맛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저런 잡생각들 하다가 진판델 두어 잔에 녹초가 되어 잠들었다가 일어난 참입니다. 낮잠도 달게 잔 것이, 지난 한 주일동안 거의 매일 오후 8시가 넘어서야 일이 끝났거든요. 하루에 열두시간 넘게 서 있거나 걸어다니고, 계단을 수천개씩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니 지쳤나봅니다. 그래도 지금 운동이라도 가야 하는데... 아내는 그냥 집에서 푹 쉬라고 하네요. 괜히 그녀의 말을 듣는 척 하며 게으름 피우고 있는 일요일 저녁입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