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파리 그리고 뉴욕. 오늘날 내로라하는 패션 브랜드라면 쇼핑백 위에 이 세 도시를 꼭 새겨 넣는다. 그만큼 세 도시는 패션의 꼭지점이다. 묘한 인생행로일까. 아니면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 Liberman) 특유의 운명이자 행운이었을까. 후에 패션 잡지 <보그(Vogue)>의 아트디렉터로 일하게 되는 리버만은 러시아 태생이었으나 어렸을 적부터 런던 그리고 파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후 뉴욕에 정착한다. 이러한 리버만의 인생 경로는 우연치고는 <보그>의 초창기 모습과 지나치게 흡사하다.
1892년 뉴욕에서 창간된 <보그>는 1909년 오늘의 잡지 재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콘데 나스트(Conder Nast)에 인수되면서 새로운 활기를 띄게 된다. 나스트는 <보그>를 단순히 미국의 잡지가 아닌, 세계적으로 도약할 잡지로 보고 영국으로 날아가 영국판 <보그>를 성공적으로 출시한다. 이후 프랑스로 날아가 프랑스판 <보그>를 실현시킨다. 오늘날 전세계 18개국에서 발행되는 잡지 <보그>는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국제적으로 바쁘게 움직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미국과 유럽의 상류층 패션을 다루는 ‘내용’에 어울리는 ‘시각적 품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사진과 디자인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보그>는 당대 경쟁지인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와 함께 최고의 패션잡지로 미국 출판과 그래픽 디자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3년 리버만이 <보그>의 아트디렉터가 될 당시 이미 <보그>는 알렉세이 브도로비치(Alexey Brodovitch)와 함께 미국 일세대 아트디렉터로 평가 받고 있는 메헤메드 페미 아가(Mehemed Fehmy Agha)에 의해 독자적인 시각적 향을 풍기고 있었다. 아가는 잡지 디자인에서는 최초로 펼침면과 ‘스냅 사진’의 초기 형식을 도입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냈으며, 무엇보다 에드워드 스타이컨(에드워드 슈타이켄, Edward Steichen)과 같은 사진가 등을 동원하여 사진이 대중 매체 안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 매김하는 데 일조했다.
아가가 <보그>의 아트디렉터로 일할 당시 리버만은 그의 조수로 <보그>와 첫 인연을 맺었는데 오히려 아가는 리버만을 해고시킨다. 해고당한 리버만을 다시 <보그>로 인도해준 이는 나스트였다. 결국 리버만은 아가가 사임한 1943년에 아트디렉터로 임명되면서 1944년부터는 콘데 나스트 출판사의 책임 아트디렉터로, 그리고 1962년부터 편집 디렉터로서 명실상부 <보그>와 나스트 출판사의 핵심 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보그>에 취임하면서 리버만은 무엇보다 사진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보그>를 <하퍼스 바자>와 함께 당대 최고의 사진가들이 집결하는 잡지로 만들어낸다. 이미 파리에서 <뷰(Vu)>라는 포토저널리즘 잡지를 통해 브라사이(브랏사이, Brassaï), 앙드레 케르테즈(André Kertécz) 등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던 리버만은 <보그>에서는 어핑 펜(Irving Penn)과 함께 우아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사진들로 <보그>만의 인상을 만들어 나갔다.
어빙 펜과 리버만은 긴밀한 작업 방식과 소통으로 유명했다. 어빙 펜은 리버만의 지시 없이는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이와 반대로 리버만은 사진의 대략적인 콘셉트만을 이야기할 뿐 그 밖의 디테일은 모두 펜의 상상력에 맡겼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들은 당시 패션 사진이 지니고 있었던 연출 사진을 벗어나 다큐멘터리적인 자연스러움을 패션 사진의 새로운 스타일로 정립시켰다. 이 밖에도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을 영입한 리버만은 어빙 펜과는 또 다른 여성상을 사진을 통해 그려냈다. 펜과 달리 도발적이고 과감한 앵글이 특징이었던 클라인은 <보그>에 변화해 나가는 여성의 활동상을 담기에 적절한 작가였다. 그의 사진으로 인해 패션사진은 경직성에서 벗어나 한결 더 가벼운 소재와 주제로 독자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이후 데이비드 베일리(David Bailey), 헬무트 뉴튼(Helmut Newton) 등 여러 사진가들이 리버만의 손짓에 <보그>의 현대화에 일조했고, 급기야 1965년에는 당대 최고의 사진가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 애버던(리차드 아베든, Richard Avedon)도 <보그>의 스태프로 합류하게 된다. 오래 전부터 브로도비치의 전속 사진가나 다름 없었던 애버던을 흠모해왔던 리버만은 브로도비치의 <하퍼스 바자> 은퇴 이후 결국 아베든을 <보그>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12년 러시아 키에브 태생이었던 리버만은 32년간 <보그>에서 활동한 뒤 1999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세상을 뜬다. 한편 소설과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1988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보그>의 편집장으로 있는 안나 윈투어(Anna Wintour)를 주인공으로 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