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평양신학교와 대한예수교장로회 조직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한국신학교의 태동이 요구되었습니다. 특별히 부흥운동의 발원지인 평양에서의 신학교 설립은 사경회를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화 함으로서 한국신학의 정립과 지속적인 부흥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는 지도자 양성의 필요성이 현실화 한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되어 온 한국장로교는 부흥운동의 결과로 한국적 장로교회의 발족시기를 앞당겨 왔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독립이 아니라 선교사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며 자립을 세워가는 기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1) 평양신학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발원지에서 7명의 한국인 장로교회 목사가 배출되었습니다. 1890년 10월, 언더우드 선교사는 “신학반”(Theological Class)을 설립하여 백홍준, 김관근, 서경조, 최명오, 서상륜, 정공빈, 홍정후 등에게 기포드, 헤론과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1892년, 김이련, 김관근 등 12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주에서 최초로 신학사경회가 개최되었고, 마펫과 게일과 한국인 최초로 백홍준 조사가 교사로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1893년, 마펫이 중심이 된 평양에서 여름과 겨울에 “신학사경회”가 개최되었습니다. 1900년, “평양공의회위원회”는 마펫의 제안으로 평양신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장대현교회 방기창, 김종섭 장로를 목사 후보생으로 선정하여 5년 교과과정에 참여하였습니다. 1901년 10월, “신학교육위원회”는 수업연한을 5년으로 잠정 결정하였습니다. 1902년,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를 목사 후보생으로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마펫은 신학일반과 소요리문답, 베어드는 구원론과 모세오경, 스왈른은 유대사기와 모세오경, 리는 목회학, 헌트는 마태복음과 고대사, 번하이셀은 산수를 교수하였으며, 이들 선교사는 모두 미국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습니다. 1903년, 신학교육위원회는 조사들을 위한 3년과정과 목회자를 위한 5년 신학교육 과정을 채택하였습니다. 초기 1년 교육과정중 3개월은 집체 신학교육을 하였고, 9개월은 개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며 교회사역 기간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그 후 신학 교과과정이 향상되어 신학교육은 6개월로 연장되었습니다. 1904년, 3월과 12월에 6명의 신학생들이 2년과정을 졸업하였고, 지방 공의회위원회에서 한석진과 서경조 등 19명이 목회자 후보생으로 선정되어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1904년, 평양공의회위원회가 마펫을 임기 2년의 신학교장으로 임명하고 언더우드(북장로교), 전킨(전위렴,남장로교), 엥겔(왕길지,호주장로교빅토리아선교회)을 교수로 임명하였습니다. 1905년, 상급반 8명, 하급반 14명이 재학하였고, 1906년, 1학년 29명, 2학년 14명, 3학년 7명이 재학하였습니다. 1906년의 교수진은 무어(서울), 스미스(부산), 레이놀즈(남장로교), 전킨(남장로교), 엥겔(호주장로교)이 헌신하였습니다. 1907년, 75명의 재학생이 있었고, 1909년, 5개반 138명으로 급증하였습니다. 1901년부터 초기 5년간은 북장로교 선교회가 주도하였으나 1906년 이후 남장로교 선교부와 호주장로교 빅토리아선교회와 캐나다선교부가 참여하는 장로교신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1901년, 초대교장에 취임한 마펫은 1924년까지 24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평양신학교를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교로 정착시켰습니다. 1907년 6월20일, 평양신학교를 “장로교회신학교”로 지정하고 길선주(40세,평양), 양전백(39세,구성), 서경조(58세,의주), 한석진(41세,의주), 송인서(40세,평양), 방기창(58세,평양), 이기풍(40세,평양) 등 7명의 졸업생이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07년 이후 1916년까지 171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230명이 재학중에 있었으며, 1916년에는 230명의 재학생이 있었습니다.
평양신학교 졸업생 이기풍목사(1907)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윤명식(1909), 최태진(1912)이 추가로 파송되었습니다. 길선주(1907)가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고, 양전백(1907)이 평안북도 선천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한석진(1907)은 총회신문 편집장으로 봉사하고, 김필수(1909)는 총회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박태로(1912), 사평순(1913), 김영훈(1913)이 중국 산동지방선교사로 파송되었고, 최성주(1910), 김덕선(1911), 차형준(1911), 김내범(1913), 최봉석(1913), 한경위(1914)가 만주 한인들을 위한 목회를 담임하였습니다. 최관홀(1909)은 시베리아의 한인을 위해서 목회하고, 주공삼(1910)은 일본 동경에서 열악한 환경 가운데 한인목회를 하였습니다.
1908년 5월, 시카고 맥코믹 여사의 지원으로 신학교 교사가 2층규모로 건축되었고, 맥코믹기념 기숙사(맥코믹) 알렉산더기념 기숙사(남장로교), 마르다기념 기숙사(북장로교), 빅토리아기념 기숙사(호주장로교) 등 6동의 기숙사가 건축되었습니다. 1916년, 평양신학교는 6명의 정교수와 7명의 협동교수진이 참여하여 1918년부터는 “신학지남”을 발간하고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생들에게 배포하였습니다. 한편 레이놀즈의 책임하에 “성경사전”을 발간하여 성경공부 학습자들을 위한 중요한 부교재가 되었습니다. 1921년, 5년 신학과정이 1년2학기 3년과정으로 개편되었고, 교회지도자 과정으로 6주 2년과정이 개설되었습니다.
장로교신학교는 한국장로교 선교회 사역의 “사경회제도”의 성장에 따라 제도화 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캘빈주의를 배경으로 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을 수납하고, 장로정치를 수용한 성경중심의 학교로서 개별적 연합에서 총회로 이관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장로교신학교는 구학파 신학을 계승한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와 맥코믹신학교의 전통과 맥을 잇고 복음주의와 보수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을 다시 후대에 까지 연결해야 하는 중요한 오늘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신학생들은 신구약 전권을 공부해야만 하고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우고 가르치며, 성경을 진실로 신앙하고, 바르게 이해하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탄생,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희생, 육체적 부활, 기적의 역사성과 역사적 재림 등 전통적인 교리를 계승하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신학교육은 계속되었습니다. 평양신학교는 목회자, 설교자, 전도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이러한 복음주의적 신관과 사관은 매우 엄격하고 정확하게 교육 되어야 하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1910년, 백만인구령운동은 마펫(마포삼열)과 알렌(곽안련)과 레이놀즈(이눌서) 선교사 등과 같은 맥코믹신학교 출신자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평양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은 지속적인 부흥과 성장에 갈망하며 한국교회를 일깨웠습니다. 1934년, “선교50주년 희년기념예배”에서 마펫은 한국교회에서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고, 그 십자가의 도가 한국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켰다고 전하였습니다. 마펫은 평양신학교 교장으로서 행정과 탁월한 지성을 겸비하며 평양신학교가 한국신학교의 정통성과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알렌선교사는 신학교 교재인 설교학과 예배학을 발간하고, 레위기, 민수기, 사무엘, 에스라, 느헤미야, 욥기, 시편, 소선지서 6권, 공관복음에 이르는 표준성경주석을 편찬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유니온신학교의 존경받는 신학도로 45년간 한국의 순회선교사와 성경번역가와 신학교 교수로 헌신하였습니다. 1907년, 개교에서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기 까지 평양신학교는 한국최초의 남궁혁교수(1927)가 초빙되고 그 후 이성휘교수(1930)와 박형용박사(1930)가 교수에 초빙되는 등 점차로 한국인 교수들이 확대되었습니다.
(2)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
1889년, 데이비스 선교사는 븍징로교회와 호주장로교회는 “연합공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892년, 남장로교회가 한국선교에 참여한 후 1893년 1월28일, “장로회 정치를 쓰는 선교공회”를 새롭게 조직하였습니다. 이들 3개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신앙과 장로교 정치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단일 장로교회 설립을 결의하였습니다.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이러한 연합운동을 구체화 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1895년, 장로교 선교사 친교교류단체로 설립한 “선교사공의회”는 산하에 “공의회위원회”를 설치하고 “서울위원회”와 “평안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898년, 캐나다장로교선교회가 한국선교에 조직되면서 1901년,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빅토리아선교회, 캐나다장로교 등 4개 장로교선교회는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장로회공의회는 장연군 송천교회 서경조와 평양 판동교회 김종섭을 장로로 임직하고, 1901년 9월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서경조, 김종섭, 방기창 등 3명의 장로와 양천백, 송순명, 최홍서, 천광실, 고찬익, 유태연 등 6명의 조사와 25명의 선교사들이 회집하여 “제1회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공의회는 “스왈른”(소안론,William L. Swallen)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서기에 “서경조” 장로가 선출하였습니다. 공의회 산하에 “전라위원회”(남장로교선교회), “경상위원회”(호주장로교선교회), “함경위원회”(1902,캐나다장로교선교회)가 각각 조직되었습니다. 각 지방선교지부에는 장로교공의회 직할 “당회위원회”가 설치되어 장로교 정치제도를 정착시키는 구체적인 기본모델을 갖추었습니다. 장로회 공의회는 장로교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선교공의회와 한국교회의 장로와 조사회가 함께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장로회공의회는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교회정치 규정을 명시하고 한국교회가 독노회 조직근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1901년, 장로회공의회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제안으로 “조선자유장로회”설립을 결의하고 1902년, 조선자유장로회 설립방침의정위원에 의한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장로 1인이상의 지교회 12교회와 임직목사 3인 이상이 상시 존재할 때 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하되 선교사는 본국과 한국에 이중적 회원권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본국 4개장로교 선교부에 설립과 인허가권이 있고, 그것을 근거로 1907년,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노회 조직의 위상과 권위가 가능하였습니다.
장로교공의회는 한국장로교의 신학을 제공하였습니다. 1903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소요리문답과 1905년, 교회신경을 신학사상으로 채택하였습니다. 한국장로교는 모체가 되는 미국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한국장로교의 신앙고백으로 존중하고 미국의 복음주의 보수주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서 장로교공의회는 1901년, 김종섭, 방기창, 1902년,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를 피택하여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이수하도록 하였습니다. 한국인 장로와 조사들이 신학교육을 졸업하고 목회자로 양성하여 한국신학교육의 기초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장로교공의회는 장로교 전통을 유지하면서 타교단과의 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협력하기로 하였습니다. 1901년, “갱정교회 총칭명호 의정위원”은 장로교 감리교의 교회명칭을 “야소교회”로 통일하고 교단명칭은 야소교회에 추가하여 사용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1905년, 찬송가 공동편찬을 위해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 외에 장로교 감리교 선교지 분할협정은 감리교감독 포스터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조직되면서 선교지 분할협정은 잠정적으로 추인되었습니다.
1888년, 언더우드가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를 조사로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1905년, 80명, 1906년, 105명, 1907년, 170명으로 증가 하였습니다. 장로교선교회는 원활한 교회지도를 위해 조사외에 조사협조자로 “영수”(Leader)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1894년, 마펫 선교사가 영수제도를 도입하고 평양에서 “이영언”을 영수로 임명한 것을 계기로 1920년대까지 시행하였습니다. 1887년, 정동장로교회에서 “서리집사”제도가 시행되었고, 1907년, “안수집사”제도가 시행되어 1908년, 서울 새문안교회에 1명, 평양 장대현교회에 8명의 안수집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자립, 자전, 자치의 교회로 성장할수 있는 토대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1905년 마펫은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미국 북장로교 총회에서 한국인 목사안수에 관한 인준을 요청하였습니다. 미국 남북장로교회 총회가 각각 인준과 승인을 하였고 1907년, “독노회” 조직을 결정하였습니다.
선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전파를 통한 “교회설립”이었습니다. 교육과 의료, 사회와 복지사역은 복음사역에 부가적으로 사용여부가 결정되지만 교회설립은 반드시 해야할 선교사의 핵심적 사명이었습니다. 문제는 새롭게 설립되는 교회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어떤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고 어떤 말씀이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설립이 선교지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이지만 세심하고 중요하고 수많은 절차와 과정속에서 설립되어야 하고 특히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에 대한 문제는 더욱더 신중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한 교차적인 테스트가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의 교회설립은 한국적 요소를 가진 토착교회도 아니고, 선교사들이 다녔던 미국교회도 아닌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모델인 초대교회의 발자취를 따라 설립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제일주의와 성경말씀을 통한 진리구현과 복음전파를 가장 큰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한국에 설립되는 교회는 복음적 사명을 가장 헌신적으로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상 유래없는 성령의 역사와 임재하심이 한국교회에 나타났고 그것은 매우 큰 은혜였습니다. 오순절성령사건이후 제자들의 복음전파가 급격히 증가하여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었던 것처럼, 한국교회도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도록 교회의 역할과 사명이 중차대한 것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치”(self-government)의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선교지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지역의 대표자들이 함께 복음을 전하고 제자양육과 성례를 거행하고 개교회로서 임시 직분자들을 세웠습니다. 세례교인이 증가하면서 지도자들이 선출되었고, 장로를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설립과 절차 또한 사도행전의 교회들과 동일한 맥락에 있고 선교사들이 당회장 목사가 되어 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전”(self-propagating)의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헌신적으로 열심히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인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주이심을 선포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학습과 세례문답을 통해서도 가장 강조되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직무라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사경회 기간중에 아침경건회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말씀을 배운 한국교인들은 오후에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가서 전도를 하였고 저녁전도집회에 사람들을 인도하여 말씀을 함께 듣고 믿음의 자리에 이르도록 강권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인들의 복음전도가 한국교회를 자전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09년, 스왈른은 6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남녀선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07년, 독노회가 설립되면서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며, 1912년, 7개의 노회로 총회가 조직되고 중국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자치하고 자전하였던 한국교회는 1933년, 24개의 노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자립”(self-supporting)의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대기근과 전쟁이라는 환난속에서 자립의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한국교인들은 스스로 책과 전도지와 성경을 구입하고, 서로 힘과 정성을 모아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의 전도자들에게 사례를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나라와 환경에 관계없이 처음부터 교회에는 자립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1894년, 26명의 세례교인과 20여명의 학습교인의 힘으로 소래교회를 건축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1908년까지 설립된 188개의 교회가운데 186개 교회가 자립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건축헌금을 위해 끼니를 굶고, 새옷을 팔고, 반지를 헌금함에 넣으며 자립의지를 키워갔습니다. 이러한 자립은 교회사역과 함께 초등학교, 야간학교, 어린이성경학교, 유치원에 이르는 교육사역에서도 자립을 강조하였고 한국교인들은 기적적으로 그 일을 해내었습니다.
1907년 9월17일, 한국인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찬성위원 9명 등 78명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회집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펫, 게일 등 장로교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타교파 선교사가 참여한 독노회의 설립설교는 장로회공의회 회장인 “배유진” 목사가 사도행전 1장8절을 주제로 설교하였습니다. 배유진 목사가 집례한 성례식이 끝난 후 마펫 선교사가 남북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의 허락을 받아 노회를 설립하게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어진 선거에서 제1대 노회장에 마펫 선교사, 부노회장에 방기창, 서기에 한석진, 부서기에 송인서, 회계에 그레이험 리(이길함) 선교사가 선출되었습니다. 독노회는 경기, 충청, 평북, 평남, 함경, 전라지방에 7개의 대리회를 조직하여 노회 위임사무를 처리하도록 하여 총회로 가는 제도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1회 노회에서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 등 7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07년, 한국교회는 785개 교회에 목사 49명, 장로 47명, 조사 160명, 남전도인 58명, 여전도인 38명, 세례교인 18,061명 등 전체교인 75,968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독노회 결성과 함께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초로 하여 그 내용을 축약한 “12신조”를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영국장로교회의 신조를 1904년, 인도교회가 채택하였고, 한국장로교도 서언을 수정한 후 사도신경과 함께 한국장로교회의 신조로 채택하였습니다. 12신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수납하고, 성경을 정확무오의 절대진리와 하나님 말씀으로 하는 신앙고백과 삼위일체와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대속물과 사망과 부활과 승천과 예정론 등을 담고 있으며 장로교회의 이념적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조직
1907년 독노회 조직 후, 산하에 50개 교회의 경기충청(1893), 160개 교회의 평북(1907), 89개 교회의 평남(1893), 78개 교회의 함경(1902), 47개 교회의 황해(1907), 127개 교회의 전라(1901), 186개 교회의 경상(1901)대리회 등 7개의 대리회에 737개 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1911년 9월17일, 대구 남문교회에서 회집된 제5회 독노회에서 7개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하고 승격된 7개 노회가 총회를 결성하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1911년 10월15일, 전라대리회가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목사 12명, 장로 21명이 노회를 조직하였고, 12월4일, 경충대리회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목사 12명, 장로 21명이 노회를 조직하였으며, 12월8일, 황해대리회가 봉산 모동교회에서 목사 10명, 장로 34명이 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12년 1월28일, 경상노회가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28명, 장로 96명이 노회를 조직하였고, 남평안노회가 평양샹슈구밧신학교에서 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2월15일, 북평안노회가 신천북교회에서 목사 26명, 장로 15명이 노회를 조직하였으며, 2월20일, 함경노회가 원산 상리교회에서 목사 14명, 장로 16명이 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12년 9월1일, 7개노회에서 파송한 목사총대 96명(목사52,선교사44), 장로총대 125명 등 221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여자성경학원(경창리)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조직되었습니다.
1회 총회선거에서 총회장에 언더우드, 부총회장에 길선주, 서기에 한석진, 부서기에 김필수, 회계에 윌리엄 블레어(방위량) 선교사, 부회계에 김석창목사를 각각 선출하였습니다. 1913년 9월7일, 제2회 총회는 서울숭동교회에서 개최되었으며 평양신학교와 숭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호주장로교 엥겔(왕길지,Gelson Engel) 선교사가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제3회 총회는 재령남성현교회에서 개최되었으며 전남선교의 아버지이며 남장로교 유진벨(배유지,Eugene Bell) 선교사가 총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15년에 개최된 제4회 총회장 김필수목사로부터 1952년, 37회 총회장 김재석 목사에 이르기 까지 1919년, 제8회 총회장 마펫 선교사(북장로교,마포삼열)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인 목사가 총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평양을 세계최대의 선교지부로 성장시킨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영적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사가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예수교장로회의 위상을 높여주는 사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1916년, 5회 총회장 양전백, 1917년, 6회 총회장 한석진, 1918년, 7회 총회장 김선두, 1919년, 8회 총회장 마펫(마포삼열), 1920년, 9회 총회장 김익두, 1921년, 10회 총회장 이기풍, 1922년, 11회 총회장 김성택, 1923년, 12회 총회장 함태영, 1924년, 13회 총회장 이자익, 1925년, 14회 총회장 임택권, 1926년, 15회 총회장 김석창, 1927년, 16회 총회장 김영훈, 1928년, 17회 총회장 염봉남, 1929년, 18회 총회장 차재명, 1930년, 19회 총회장 홍진필, 1931년, 20회 총회장 장규명, 1932년, 21회 총회장 남궁혁, 1933년, 22회 총회장 장홍범, 1934년, 23회 총회장 이인식, 1935년, 24회 총회장 정인과, 1936년, 25회 총회장 이승길, 1937년, 26회 총회장 이문주, 그리고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27회 총회장 홍택기에 이르기까지 일제와 6.25전쟁중에서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교단의 정신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민해 왔고, 어두운 역사도 지우지 않은채 반성의 기회로 삼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