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역사(Ⅲ-5) : 미국 남부는 왜 그렇게 노예제도 폐지에 강력하게 저항했을까?
세계 역사를 바꾼 50대 사건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의 폭을 넓혀볼 수 있다. 역사의 중심엔 항상 ‘돈’이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그 이면에 있는 ‘돈‘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
남북전쟁(1860~1865)의 승패를 알고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남부동맹이 ‘노예제’에 집착해 분리 독립을 선언했던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노예를 활용하는 강제노동보다는 일용직 근로자들을 고용하는 게 훨씬 이익이 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역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남부 노예제 농장은 매우 높은 생산성을 기록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을 고용해서 일을 시키는 것보다 노예를 부리는 편이 훨씬 더 싸게 먹혔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미국의 경제학자 포겔(Robert Fogel)과 앵거만(Stanley Engermam)은 남북전쟁 직전인 1860년 미국의 지역별 농업 생산성을 비교했는데, 노예 수가 압도적이던 남부가 북부보다 생산성이 무려 35%나 높았다. 특히 노예를 한 명도 쓰지 않은 이른바 ‘자유민의 농장’은 북부 농장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노예를 16~50명 정도 고용한 이른바 ‘중간 규모 노예 농장’은 북부에 비해 생산성이 무려 58%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데이터만 본다면, 노예를 부리는 남부 농장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저해할 것이라고 믿어지는 북부 위주의 정부(링컨의 공화당 정부) 출범에 강하게 저항하고 군대를 일으킨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북부에 비해 남부의 노예 농장의 생산성이 더 높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남부의 기후 조건이 농사짓기에 더 적합했다는 데 있겠지만, 이 외에도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남부 농장이 노예를 매우 효율적으로 배분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 개개인의 생산성이 꽤 높았다는 것이다.
남부 노예 농장주들은 노예를 활용하기에 적합한 작물을 선택했다. 대체로 농번기가 서로 다른 두 작물인 면화와 옥수수를 선택했는데, 옥수수는 파종 시기가 면화보다 빠르고, 수확기는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노예 개개인의 능력을 파악해서 적절하게 일을 배분했다. 예를 들어 값비싼 20~30대 남자 노예는 가래를 이용한 작업에 집중 배치하는 한편, 괭이를 이용한 작업은 소년 노예와 성년 여자 노예에 할당하는 식이었다.
노예 개개인에게 적절한 일을 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 조직도 적절하게 설계했다. 예를 들어 파종 작업과 제초 작업을 각각 다른 작업 집단에게 맡기는 식이었다. 이렇게 조직을 구분해 일을 맡김으로써 ‘더 나은 식사’ 혹은 ‘더 많은 휴식’을 원하는 집단이 다른 집단의 작업을 재촉하고 경쟁하게 했다. 경쟁에서 뒤처진 집단에게는 식사량이나 휴식 시간의 조절은 물론, 가혹한 체벌이 뒤따랐다. 참고로 포겔과 앵거만은 미국 남부의 루이지애나 주에서 노예 농장을 운영하던 농장주의 일가에서 노예 체벌 데이터를 확보했는데, 이를 통해 그가 180명의 노예에 대해 1840년 12월 이후 2년간 총 160회의 채찍질을 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노예 1인당 연 평균 0.7회의 채찍질을 가한 셈이다.
남부가 노예 노동에 힘입어 농업 생산성의 향상을 달성한 반면, 북부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창의력을 자극함으로써 혁신을 지속시키는, 이른바 ‘산업혁명’이다. 특히 당시 미국 북부의 기업가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총을 만들어 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1853년 발생했던 크림전쟁(Crimean War, 러시아에 맞서 프랑스와 영국이 연합한 전쟁)에서 연합군은 막강한 육군을 보유한 러시아를 쳐부쉈는데, 제해권을 가진 영국 해군이 흑해(黑海)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신형 라이플 소총을 끊임없이 보급한 게 결정적 요인이었다. 러시아군은 구식 머스킷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부싯돌을 장착해 사격하는 재래식 총으로, 숙련된 총사는 1분에 2발 내외를 발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머스킷 총은 총대 안에 강선(鋼線, rifle, 파이프처럼 생긴 긴 총대 안에 새겨진 홈)이 없어서 상대를 살상할 수 있는 유효 사거리가 180미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이 보급 받은 신식 라이플총은 강성이 있어서 유효 사거리가 약 900미터에 달했다. 또한 머스킷총은 9단계에 달하는 구분 동작이 필요할 정도로 조작이 힘든 반면, 신형 라이플총은 표준화된 탄환을 장전하는 것만으로 바로 사격을 가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런데 크림전쟁에 사용된 신형 소총을 제조한 곳이 바로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미합중국 조병창과 코네티컷 강 유역의 민간 기업들이었다. 미국 북동부의 제조업자들은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성과를 신속하게 받아들였고, 1820~1850년에 걸쳐 이른바 ‘미국식 제조 시스템’을 개발해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자동 또는 반자동 선반(旋盤)을 사용하여 정해진 모양대로 부품을 깎아내는 것이었다. 이런 공작 기계 덕분에 다른 기계에서도 사용 가능한 부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개개인의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신속하게 그리고 대량으로 라이플소총을 조립할 수 있었다.
물론 선반은 비쌌고, 재료의 낭비도 심했다. 그러나 크림전쟁처럼 총기가 대량으로 필요한 경우에는, 이런 식의 자동식 생산이 충분히 채산성이 맞았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보여준 역사적 기회가 되었다. 이때 총기 제조업자 새뮤얼 콜트(Samuel Colt)는 자기 회사의 리볼버 권총을 분해하여 부품들을 뒤섞은 다음, 집히는 대로 부품을 모아 다시 권총을 조립하더라도 제대로 발사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북부의 생산력이 이렇게 높은 수준에 도달한 데다, 전쟁 초기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Fort Sumter)를 선제공격하여 중립적 입장을 지키고 있던 애팔래치아산맥 사람들을 북부 지지로 돌림으로써 팽팽했던 균형이 북부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애팔래치아산맥 사람들은 북부의 양키와 남부의 노예 농장주 모두를 싫어했지만, 누군가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분노하며 떨쳐 일어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애팔래치아산맥 사람들이 북부의 편을 들지 않았더라도 승패는 이미 갈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부는 제조업뿐만 아니라 수송 체계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30년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가 부설되는 등 북부는 거미줄 같은 철도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65년 워싱턴에서 암살당한 링컨 대통령의 시신이 2,575킬로미터 떨어진 고향 스프링필드로 신속하게 이동한 바 있다. 시속 35킬로미터의 속도록 2천 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를 쉬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운송 수단을 가지고 있는 군대가 전쟁에서 패하기는 쉽지 않은 일 아니겠는가?
홍춘욱.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The History of Money). 로크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