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지금 내가 나인가? 예전에 이런 광고도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참 좋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만족스럽게 여기며 사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몇 %나 될까요? 아무튼 우리 모두 ‘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에 대하여도 스스로가 잘 모릅니다. 오죽하면 ‘너 자신을 알라’ 하는 철학적 명령도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살면서도 과연 이게 나인가? 하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하기야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하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질문 자체에 우리 모두 섬뜩할 때가 있는 것이지요.
연극배우나 영화배우는 일반 사람들보다는 많은 다른 사람을 살아보는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연극이나 영화 제작이 끝나고 상연이 끝나고 나서 정체성의 문제를 안을 때가 종종 있는 줄 압니다. 얼마간 다른 사람을 연기했기에 그 사람을 살았던 것이니까요. 그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통스럽다든지 비극적인 삶이었다면 그 기간을 견뎌내는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빨리 다른 작품에 매달리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다른 자아를 이겨내며 본래의 자기를 찾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와 또 다른 자기를 가지고 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실 그런 일은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 하나를 살기도 벅찬데 여럿의 자기를 산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문제는 인간이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가 접촉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어떤 사회적 반응이 생길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다지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리라 짐작합니다. 바로 그 점을 부각시키는 이야기입니다.
‘다중인격자’라고 하지요. 그런데 자기 안에 23명이 있답니다. 그리고 이제 또 새로운 24번째 존재가 등장합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본인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그 때마다 그 사람을 살면 그만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마주하는 사람은 혼란에 빠집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왜 이러는가, 사전 지식이 없다면 그야말로 정신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공포의 대상일 뿐이지요.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듭니다. 대책도 없습니다. 오로지 이 사람에게서 빨리 벗어나고만 싶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니 대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을 오히려 폭력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어느 날 두 자매가 친구 하나와 함께 파티를 마치고 돌아갑니다. 아빠가 주차장에서 물건을 다 싣고 떠나려 합니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소녀가 이상한 낌새를 느낍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친구들의 아빠가 아닙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자매가 놀란 듯 말해줍니다. 차를 잘못 탄 것 아닌가요? 그 순간 남자에게서 분무기가 발사됩니다. 그리고 자매는 쓰러집니다. 도망치려는 친구도 결국은 한 무리가 되어 납치됩니다. 그리고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 갇히지요.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친절한 듯하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단 납치를 했으니까요. 수시로 드나들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 똑같은 사람인데 다르게 등장하는 겁니다. 자매는 어떻게든 도망치려 발버둥 칩니다. 그러나 번번이 발각되어 결국 더 어려운 처지에 몰립니다. 한 아이는 눈치를 챕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때그때 달리 나타나는 사람들 가운데 만만한 사람을 상대해보려 합니다. 또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자들로 서로 혼란을 부추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될 듯하면서도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이용당하는 듯 느끼면서 그 속의 새로운 괴물이 등장하려 합니다.
연구의 대상으로 그 사람과 꾸준히 상담을 진행하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만나 상담을 진행합니다. 누구보다도 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구 분야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치료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가 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고객이면서 환자이고 마땅히 치유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나타난 인격에 대한 예측이나 대비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나타난 상태대로 분석하고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불행하게도 미완의 작품으로 끝납니다.
한 남자와 세 소녀의 전쟁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납치되어 공포 속에서 지내며 탈출할 길을 찾습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상대는 폭력적으로 바뀝니다. 더 힘들어지고 그만큼 더 무서워집니다. 다중인격자,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 사회가 그 사람에게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기대를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치료가 가능할까요?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처우해야 하는지 숙제입니다. 영화 ‘23 아이덴티티’를 보았습니다. 이런 환자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귀한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