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p><p>피아노 건반 위로 또르르르 액체를 굴려라</p><p>피도 좋고 물도 좋고 술도 좋다</p><p>건반 틈새에서 바람이 불어도 좋고 용암이 솟구쳐도 좋다</p><p>소리의 날개는 잿더미에서 피어오른 연기 같은 것</p><p>세상을 망각한 손길이든</p><p>세상을 다 삼킨 눈길이든</p><p>발아래 진동이 땅을 달래는 해의 어스름 몰고</p><p>척추를 타고 오를 때</p><p>쏟을 수 있는 건 이 몸을 다 담고 있는 공간보다 더 바깥의 진공</p><p>괴롭다면 눈물 흘리고</p><p>아프다면 피 흘릴 것이고</p><p>더 아프다면 술에 취할 것이다</p><p>가장 높은 음으로 올라가면 문득 이 세상이 저세상이고</p><p>가장 낮은 음으로 떨어지면 저세상이 오늘의 무지개다</p><p>일곱 개의 색</p><p>일곱 개의 음</p><p>다 훑어 다시 한 음으로 멈추면</p><p>갑자기 열리는 머리 끝 흰 구멍</p><p>거기 꽃을 던져 폭파시키는 눈길과 손길은 귀머거리들의 요동</p><p>흑과 백 사이를 건너뛰며</p><p>흑도 백도 잊을 뿐, 다시 한 음으로 모이면</p><p>흑이나 백이나 둥글게 굽은 하나의 물방울일 뿐,</p><p>터뜨리면 색도 형체도 없는</p><p>시간의 구멍 속에서</p><p>건반 위로 또르르르 굵게 짜낸 액체를 흘려라</p><p>피도 좋고 물도 좋고 술도 좋다</p><p>손가락이 없어도</p><p>발목이 새의 부리처럼 구부러졌어도</p><p>매일 앉아 피아노를 친다</p><p>흑도 백도 없이</p><p>누군가 앉았다가 소리 없이 죽어간 18세기 낡은 책상 같은</p><p>소리 없는 피아노를 친다</p><p>눈물이든 피톨이든 애액이든</p><p>액체가 닿으면 또 그대로 커다란 물방울이 되는 피아노를 친다</p><p>매일 매일 매일 자라나는 어떤 묘종의 최초의 형태에 입김을 넣는다</p><p> </p><p> </p><p> </p><p> </p><p>[웃어라, 용!],문학동네, 20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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