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에서 남해로 간다. 사이, 하동을 지난다. 광양이 매화의 나라라면, 하동은 4월이면 분분(紛紛)한 벚꽃으로 이름났다.
남해 가천 다랭이 마을에도 파아란 봄은 때를 잊지않고 찾아온다.
남해의 명물은 해안선 따라 굽이치는 해안도로다.
북쪽에서 남진(南進)하는 77번 국도 위에서 남해는 남해 동남쪽 물건항과 미조항을 잇는 물미해안도로는 해안경관의 백미다.
남해군은 멸치 잡는 죽방렴으로 유명하다.
1-옥룡사지와 중흥사 :
남해고속도로 광양나들목 → 우시장 사거리에서 우회전 → 옥룡입구 삼거리에서 옥룡면 방면으로 우회전
→ 8㎞쯤 직진하다 우회전해 직진하면 옥룡사지다. 다시 길을 돌아 나와 옥룡면사무소에서 우회전하면 중흥사다.
2-망덕포구 :
중흥사에서 돌아 나와 첫 삼거리에서 우회전 → 석평삼거리에서 좌회전 → 광양나들목에서 남해고속도로 합류
→ 진월나들목 → 광양 방면으로 우측 방향 → 직진하면 망덕포구다.
3-가천 다랭이 마을 :
돌아 나와 첫 삼거리에서 우회전 → 1002번 지방도를 타고 직진 → 남해대교 삼거리에서 좌회전
→ 19번 국도를 타고 14㎞쯤 직진하다 신전삼거리에서 우회전 → 계속 직진하면 가천 다랭이 마을이다.
광양 다랑밭이 물들었다.
소나무·동백나무·광나무·치자나무 묘목이다.
옥룡사지 동백림(冬柏林)은 1000년 넘게 대(代)를 이었다.원경(遠景)과 근경(近景)을 모두 볼 수 있다.
봄의 색을 맛보고 싶다면 중흥사에 올라야 한다.
절로 가는 길 위에 서면 건너편 구릉 아래로 다랑밭(계단식 밭)이 펼쳐진다.
옥룡사에는 편백나무 숲이 있어서다
광양의 마지막 봄 소식은 망덕포구에서 들을 수 있다. 망덕포구는 섬진강이 남해와 만나는 자리다
하동포구에서 악양들판과 화개장터를 거쳐 구례 산동에 이르는 19번 국도의 봄은
수수한 시골처녀와 세련된 도시처녀의 매력을 함께 품고 있다.
산동면 반동마을에서 지리산의 설경을 배경으로
상위마을을 비롯해 반곡마을, 계척마을, 현천마을 등 산동면 일대의 크고 작은 마을은 콩알만큼 작고 샛노란 산수유가
상위마을 아래에 위치한 반곡마을의 대평교는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곳으로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산수유가 가장 아름다운 마을은 견두산 자락에 위치한 현천마을.
저수지가 아름다운 마을에 들어서면 돌담에 둘러싸인 함석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페인트를 칠한 듯 황홀하다.
마을 안에는 염소를 비롯한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정겹고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는 고향마을을 연상시킨다.
광양시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고사리)
다압면 청매실농원은 영화 <취화선>과 <북경반점>, <바람의 파이터>의 배경이 되었다.
코스 섬진나루터→청매실농원 주차장→왕대나무숲, 영화 <천년학> 세트장→소학정마을→송정공원( 2시간 30분)
벚꽃은 하동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구간은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5㎞.
구례 구례 문수면 벚꽃길과 사성암
구례군 광의면 매천의 신주를 모신 사당 매천사의 전경과 매천사 안에 걸려있는 매천의 영정
매천 황현은 29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2등으로 내려지자,
하향하여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오던 광양의 석사리를 떠나 이웃고을인 구례로 옮겨 살았다.
지리산의 지맥인 백운산 아래 만수동(萬壽洞)이었는데, 지금의 구례군 간전면 효동 양천리이다.
그곳에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서재 연구와 강학에 열중하던중
부모님의 간절한 요구로, 다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 34세인 생원시에 장원하여 진사(進士)의 지위를 얻었다.
나라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자, 구례로 낙향하고 말았다
1898년 평생의 동지이자 문우였던 이건창이 세상을 떠나자 600리 먼 길을 걸어서 강화도의 조문.
만수동 생활을 청산, 월곡으로 이사. 지금의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시를 지어 망해가는 나라의 서러움, 매국노를 성토하고 애국지사들을 애도.
조선의 마지막 최고 시인임은 물론 탁월한 역사가이고 시대적 진운에 눈감지 않았던 큰 지식인
광의면 수월리, 월곡이라는 마을은 매천이 48세에서 56세까지 생애를 정리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20년 전에 찾아왔을 때에도 초옥의 허름한 사랑채가 남아있었다.
그 사랑채의 왼쪽 방이 매천이 거처하던 서실로, 바로 그곳이 매천이 운명했던 방이었다.
화엄사(華嚴寺)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에 있는 절.
〔창 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대화엄사사적 大華嚴寺事蹟≫ 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진흥왕 5)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
그리고 ≪구례속지 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한다.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당우와 문화재〕
이 중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은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황전 앞 석등(石燈)과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이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석등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甁)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3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전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동탑(東塔)은 보물 제133호인 서탑(西塔, )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 해체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만수천점에 달하는 이들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진감국사비(雙磎寺眞鑑國師碑)를 닮았다.
〔산내 암자〕 지금은 거의 모든 암자가 없어지고, 구층암(九層庵)을 비롯한 금정암(金井庵)과 지장암(地藏庵) 등만.
구층암에는 탑신 전면에 여래좌상을 조각한 3층석탑과 석등․배례석 등이 있고,
천불을 모신 천불보전(千佛寶殿), 선실(禪室),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1
562년 설응(雪凝)이 창건한 금정암에는 조선 고종 때에 세운 칠성전(七星殿)과 요사가 있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셨다. 1959년 원응(源應)이 창건한 지장암의 본전인 보광전(普光殿)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 동오층석탑(華嚴寺東五層石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보물 제132호. 남향한 대웅전과 동향한 각황전의 높은 석단 아래 서탑과 대립하여 건립되었다.
서탑은 각 면에 조각상의 장엄이 가득한 데 비하여 이 탑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또, 서탑이 2층기단임에 비하여 이 탑은 단층기단이다.
여러 장의 석재로 지대석을 짜고 그 위에 4매의 하대석과 함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모각(模刻)된 여러 장의 판석을 세워 중석을 구성하였다.
갑석은 4매석으로 덮었고, 밑에는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으며 상면에는 완만한 경사와 함께 중앙에는 1단의 각형 굄으로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가 각각 1석이며, 옥신에는 매층 우주를 모각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편평하여 낙수면(落水面)의 경사는 극히 완만하며 전각에도 반전이 매우 약하다. 추녀 밑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 층 4단이다. 2층 이상의 옥개석은 옥신을 따라 체감률이 많은 편이다.
화엄사 서오층석탑(華嚴寺西五層石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보물 제133호. 동탑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이 탑은 기단과 탑신부에 장식이 가득하다.
탑의 구조는 2층기단 위에 5층의 방형 탑신을 건립하였다.
기단은 수매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같은 돌로 붙여서 만들고,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다. 십이지상은 각 면 3구씩 북쪽의 중앙에 자상(子像)을 배치하여 각기 방위에 따라 순서대로 놓았다.
하층기단의 갑석은 4매 판석이고 상면에는 호형(弧形)과 각형의 굄이 있어 상층기단을 받게 하였다. 상층기단 중석은 4매로 짜였고 각 면은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함께 탱주(撑柱 : 받침기둥)로 구분한 다음
각 면 2구씩 팔부신중(八部神衆) 입상을 조각하였다.
갑석은 2매석으로 덮였고 밑에는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을 나타냈으며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가 각각 1석으로, 옥신에는 층마다 우주를 모각하였으며,
초층옥신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을 배치하였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각 층 모두 5단이며 추녀 밑은 수평이다.
옥개의 경사도 적당할 뿐 아니라 전각(轉角)의 반전 역시 경쾌하다.
상륜부(相輪部)는 상부에 갑석형의 2층단이 있는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과 함께 그 위에 보주(寶珠)가 있다.
화엄사대웅전(華嚴寺大雄殿)
조선 중기의 불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299호.
화엄사 경내에서 각황전(覺皇殿) 다음가는 큰 건물이며
그 전면에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대석단(大石壇)과 대석계(大石階)가 있는데,
이 대웅전은 이 대석단 위에 남향으로 서 있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모두 동일하게 하고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주열(柱列)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전면 주간(柱間)에는 각각 세짝식으로 된 문짝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 : 창문 위에 다는 작은 창)을 만들었다.
공포(慊包)는 내외3출목(內外三出目)의 갖은포작으로 외부에서는 쇠서〔牛舌〕를 윗부분에 조각한 장식적인 요소가 증가되고,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친 공포의 살미첨차〔山彌首遮〕가 한몸으로 합쳐져서 장식판처럼 변형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인조 14)에 각성이 재건하였다고 한다.
지붕의 가구(架構)를 위하여 건물 내부에는 불단(佛壇) 후면 좌우에 2개의 고주(高柱)를 배치하여 대들보를 받쳤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주위의 외둘레간(間)을 중앙부분보다 한층 낮게 만들었다.
불단 위에는 각각 J자형의 처마를 이룬 정교한 닫집을 3개 달았는데 전체가 매우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건물은 규모뿐만 아니라 외관도 훌륭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으로서는 가장 우수한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을 수 있다.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조선 중기의 불전.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多包系) 중층팔작지붕건물.
국보 제67호.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대석조기단 위에 선 웅장한 건물로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끼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돌리고 있다.
평방 위에는 기둥 위와 주간(柱間)에 공포를 올렸으며,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되었다.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되었고 초층은 짧은 툇보로 고주(高柱)와 변주(邊柱)가 연결되었다.
천장은 고주를 끼워 井자천장이 가설되었으나 그 주변이 굽어 경사지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적은 수법이다.
공포양식(慊包樣式)은 외부첨차의 곡이 매우 심한 쇠서〔牛舌〕로 시대가 떨어짐을 나타내며,
전체적인 느낌은 복잡한 공포가 처마 밑에 꽉 차 있어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현재 건물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佛壇)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수장되어 있으며
각황전은 그 거대함과 아울러 이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조선 중기의 불전.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 중층팔작지붕 건물.
화엄사각황전앞석등(華嚴寺覺皇殿─石燈)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높이 6.36m. 국보 제12호.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큰 이 석등은 신라석등의 기본형인 8각을 따르고 있으나 간석(竿石)을 고동형(鼓胴形)으로 만들어 전라도지방 석등간석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석등의 간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8각 하대석 각 면에는 예리한 안상(眼象)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귀꽃이 있는 복련8엽(覆蓮八葉)이 크게 조각되었으며
상면의 얕은 굄 위에 운문(雲文)이 조각된 하단과 8각 소로형〔小累形〕인 상단에 2단의 높직한 간석 굄이 마련되었다.
간석은 얕고 배가 불러서 일견 장구를 연상하게 하며 중앙에 2조 횡대(橫帶)가 있고,
8각의 면마다 화형(花形)이 횡대 위에 장식되었다.
이 중간부 상하는 일단 가늘어졌다가 다시 넓어지면서도 8각의 기본형을 지키고 있다.
상대석은 평박한데 밑에는 거의 수평에 가깝게 복련8엽이 조각되고 위에는 소로형의 8각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 굄이 있다. 화사석은 8각 1석인데 화창(火窓)을 네 곳에 내었을 뿐 우주(隅柱)의 표현이나 화창 주위의 구멍이 없다.
옥개석은 얇은 편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위에는 귀꽃이 크게 표현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사다리꼴의 노반과 8각 앙화(仰花)를 얹고 그 위에 보륜(寶輪)을 사이에 두고 귀꽃이 달린 보개(寶蓋)를 얹었으며,
정상에는 연화가 장식된 보주(寶珠)를 얹어 완형을 이루었다. 간주(竿柱) 이하가 상층부에 비하여 빈약한 감을 주나
당당한 위풍을 보이며 뒤의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큰 석등으로 신라 석등의 기본형인 8각을 따르고 있다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5.5m. 국보 제35호. 전체 부재를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사자탑은
경주의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 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수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화엄사 가람 중심에서 서북방의 ꡐ효대(孝臺)ꡑ라고 불리는 높은 대지에 건립되어 있는데
이 탑의 바로 앞에는 석등 1기가 배치되어 있어서 본래부터 이 장소가 석탑을 세우기 위하여 마련된 곳임을 알 수 있다.
기본조형은 2층기단 위에 3층탑신을 얹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놓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각형과 원호와 또 하나의 각형 굄 순서로 높직한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하층기단을 받고 있다.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각출되었을 뿐 중간에는 탱주가 없다.
그러나 각 면에는 고식(古式)의 큼직한 안상(眼象)을 3구씩 오목새김하고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1좌씩 12구를 돋을새김하였다.
보관과 영락(瓔珞)으로 동체(胴體 : 몸체)를 장식하고 천의(天衣)를 공중에 휘날리며 앉은 자세는 모두 같으나,
연화대 위에 앉은 법석과 지물(持物)은 각기 다르다.
어떤 좌상은 악기를 들어 연주하고 있고 혹은 팔을 벌려 춤을 추고 있으며 어떤 천인은 꽃을 바쳐 공양하고 있어
이 여러 천인상들이 모두 불천(佛天 : 부처의 존칭)을 찬미하고 있는 자세로 보인다.
상층기단은 우주를 대신하여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두 쌍의 사자를 한마리씩 지주(支柱) 삼아 네 귀에 배치하고
정상에도 하대와 대칭되게 연화대를 얹어 널찍한 갑석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또한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 대신 연화대 위에 합장한 대덕(大德)의 입상을 안치하고
갑석의 하면 중앙에도 연화문을 장식하여 천개(天蓋)를 삼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네 귀에 앉은 석사자상과 중앙에 서 있는 대덕의 모습인데, 네 마리의 석사자는
상하 앙복련화대(仰覆蓮花臺) 위에 앞발을 뻗고 뒷발을 구부려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곧 불국사다보탑의 석사자상을 연상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원각한 대덕의 입상은 얼굴의 인상이나 몸에 걸친 가사의 문양과 균형 잡힌 체구 등이
당시의 불상과도 같은 조성수법을 보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대덕은 사자상과는 달리 머리가 갑석에 붙지 않고 있으므로 갑석은 4구의 사자만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
그러므로 네 마리의 사자를 일반형 석탑의 상층기단 부재에 비한다면 곧 각 면의 양쪽 우주로 볼 수 있고
혹은 불국사다보탑 기단부의 방형4주(方形四柱)와도 비유할 수 있는 구실을 하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은 1매석으로 만들어지고 그 상면에는 2단의 굄을 각출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곧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서 일반형 석탑의 탑신부와 같으나 초층옥신석 4면에 각기 문비형(門扉形)을 새기고,
그 좌우로 여러 가지 존상(尊像)을 조각하였다.
즉 정면에는 인왕상, 양측면에는 사천왕상, 그리고 뒷면에는 보살상을 돋을새김하여 장엄하였다.
이 위의 2․3층 옥신석은 초층과는 전혀 달리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을 뿐 아무런 장식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초층부터 3층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서 처마의 받침이 5단씩이고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을 각출하여
그 위에 부재를 받게 되어 있다.
네 귀에 앉은 석사자상과 중앙에 서 있는 대덕이 표현된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건립 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신라의 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하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 전각의 반전이 예리하여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음은
신라 성대(盛代)의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며, 상륜부는 노반석 위에 복발만이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의 건립연대는 각 부의 조각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성대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신라시대의 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하다.
구례운조루(求禮雲鳥樓)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중요민속자료 제8호.
1776년(영조 52)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冑)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환낙지(金環落地)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사랑채는 4칸의 몸채에 뒤쪽으로 꺾여 이어진 2칸의 날개가 달려 있다.
몸채 왼쪽 끝의 1칸은 내루형(內樓形)으로 기둥 밖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이 사랑채의 구성은 궁전 침전에서와 같이 완전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여기에 일반 대청이 연립하여 있다.
또, 사랑채에는 보통 큰 부엌이 없는 법인데,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더구나 본 사랑채와 직교한 누마루가 또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조선 중기 주택. 양택이 잘 된 집이다.
사랑채의 오른쪽은 안채로 평면이 트인 형인데, 중행랑채를 형으로 만들어서
전체 윤곽이 몸채 뒤쪽의 날개부분까지 합쳐 형이 되어 아주 독특한 평면이다.
중행랑채는 一자형 곳간채의 왼쪽 끝에서 2칸이 앞쪽으로 돌출하여 있다.
이 2칸은 내루형으로 처리되어 1칸은 방이 되고 1칸은 판상(板床)을 높이 설치한 다락이 되었다.
머름을 드리고 문짝을 달았으며, 서벽 밖으로는 쪽마루와 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누하주(樓下柱) 서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나 있는데,
죽담에 오르는 것을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또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안채의 중심부분은 대청으로 주간(柱間)이 개방되어 있다. 대청 좌우로는 안방과 건넌방들이 자리잡고 있다.
운조루 누정은 향리의 모정은 논 · 밭뚝에 있다.
단칸이기도 하고 여러 칸 넓이를 지니기도 한다.
구례 운조루(雲鳥樓)앞 모정 처럼 팔각정도 있으나 드문 예이다.
모정은 특히 호남지방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농사짓는 이들이 필요로 하던 시설이다.
모정은 처마가 기와지붕에서 처럼 날카롭지 않다. 귀에서도 뾰죽하지 않도록 둥글게 궁굴린다.
방구매기법이라 하는데 기와집에서도 이 방식을 답습하여
달성의 하목정(霞鶩亭), 청도 선암서당의 득월정(得月亭)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모정 중에는 다락으로 높직하게 지은 것도 있다.
연곡사(拍谷寺)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뒤 태능(太能, 1562~1649)이 중창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연곡사가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을 봉납하는 곳을 선정되었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절은 왜병들에 의하여 방화를 당하였다.
그 뒤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뒤로 사찰분규와 교통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하여 세워졌고,
1981년에 1억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새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이어서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4년에 요사를 증축하였다.
199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는 종각과 수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연곡사 동부도(拍谷寺東浮屠)
연곡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높이 3m. 국보 제53호.
연곡사에는 동부도․서부도․북부도가 있는데 그중에서 형태가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이 이 동부도이다.
팔각원당(八角圓堂)을 기본형으로 삼은 부도로서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 (塔身部), 상륜부(相輪部)를 쌓은 일반형이다.
하대석(下臺石)은 8각 2단이며 하단에는 운룡(雲龍)을,
상단에는 각 면의 좌․우․상부 윤곽을 둥근 테로 두르고 그 안에 각기 형태가 다른 사자를 1좌씩 조각하였다.
윗면에는 각형(角形)으로 된 3단의 굄을 마련하여 중대석(中臺石)을 받았다.
중대석은 낮은 편이며 각 면에는 보통 양식의 안상(眼象) 속에 무기를 잡고 있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여졌는데 중대석 굄대와 대칭을 이루며,
측면에는 중판앙련(重瓣仰蓮)이 상․하 2열에 16판씩 장식되었는데, 연판 안을 다시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윗면의 탑신굄대에는 모서리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가릉빈가(迦陵頻伽 : 불경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 1구씩을 조각하였다.
굄대 윗면에는 낮은 3단의 굄단을 각출하고 그 위에 8각탑신석을 받고 있다.
탑신의 각 면에는 문비(門扉)․향로․사천왕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목조건축의 옥개부를 모방하여 2중의 연목(椽木 : 서까래)과 기왓골을 모각하였고
끝에는 막새까지 나타내고 있으며 아랫면에는 구름문양을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앙화(仰花) 위에 사방으로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을 조각한 석재를 얹고
다시 연화문석(蓮華文石)의 보륜(寶輪)을 얹었다. 신라시대의 다른 부도보다 기단부가 높아지는 경향이나
아직 안정된 비례를 잃지 않았다. 각 부의 조각수법은 정교하고 섬세하다.
이 비는 현재 비신석(碑身石)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賂首)만이 남아 있다.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있어 마치 납작하게 엎드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귀부는
정상에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있는데, 비좌의 네 측면에는 구름무늬를 고부조(高浮彫)로 장식하였으며,
그 윗면 주위로는 복판(覆瓣)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그런데 이처럼 비좌의 측면에 고부조로 구름무늬를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똑바로 세우고 있는 귀두(龜頭)는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놓은 것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용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성이 결여되어 신라시대의 귀부에 비하여 기량이 뒤떨어짐을 볼 수 있다.
거북의 등 문양 또한 신라시대와는 다르게 6각의 갑문(甲文)이 아니고
파상곡선(波狀曲線)으로 이루어진 새의 날개깃 모양의 조익형(鳥羽形)무늬를 하고 있는 새로운 것이다.
귀부 위에 얹혀져 있는 삼산형(三山形)의 이수 역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수와는 달리 운룡(雲龍)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고
고부조의 구름무늬만으로 조식이 되어 있으며, 그 정상에는 화염보주(火炎寶珠)의 형태를 조각해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규모면에서는 보다 작고 아담해지고,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이 부도비는
신라시대와는 다른 고려시대의 한 새로운 양식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연곡사 북부도(拍谷寺北浮屠)
연곡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 높이 3m. 국보 제54호. 연곡사에 남아 있는 3기(基)의 부도 중
이 부도는 경내에서 북쪽이 되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한 장의 돌로 된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상륜부(上輪部)를 차례로 쌓은 일반형이다.
하대석(下臺石)은 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단에 구름문양이 조각된 8각 대석을 놓았고,
그 위에 복엽(複葉) 16판의 연화문(蓮華文)을 두른 복련대를 놓았는데 여덟 귀퉁이에는 귀꽃무늬를 조식(彫飾)하였다.
윗면에는 3단의 굄단이 있어 중대석(中臺石)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낮고 잘룩한데 각 면의 안상(眼象) 안에는 조식이 있다.
상대석의 아랫면에 있는 3단의 받침은 밑의 중대석 굄 3단과 대칭을 이루었다.
옆면에는 단엽 중판의 앙련(仰蓮)을 둘렀고 상․하열의 판 안에는 화판장식이 있다.
윗면에는 높은 굄대가 있는데 모서리에는 둥근 마디가 있는 난간을 세우고
그 사이의 안상 안에 가릉빈가(迦陵頻伽 : 불경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를 1구씩 조식하였다.
이 굄대 윗면에는 낮은 3단굄을 각출하여 탑신석(塔身石)을 받고 있다.
8각 탑신 각 면은 문비(門扉)․향로․사천왕상 등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조식은 균형이 잡혀서 단아하다.
넓은 옥개석(屋蓋石)은 목조건축의 양식을 따라 이중의 서까래․기왓골․막새 등을 모각하였고,
아랫면에는 비천(飛天)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완전하여 앙련의 대석 위에 날개를 벌린 네 마리의 봉황이 얹혀 있고 다시 연화석․보륜(寶輪) 등이 놓여 있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몰라서 북부도라 하고 있으나 높은 스님의 묘탑일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나 각 부의 조각 등이 이곳의 동부도와 같이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를 대표할 만하다.
즉, 크기․형태․조식 등에서 세부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거의 같아서 연대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 부도가 동부도를 모방하여 건조된 것임에 틀림없다.
연곡사현각선사탑비(拍谷寺玄覺禪師塔碑)
연곡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탑비. 979년(경종 4) 건립. 귀부높이 112㎝, 이수높이 75㎝. 보물 제152호.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賂首)만이 남아 있다.
조각수법은 당대의 탑비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데, 몸체에 비해 큰 귀두(龜頭)나 비좌(碑座) 4면에 새긴 안상(眼象)과
귀꽃이 특색이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ꡐ玄覺王師碑銘ꡑ이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다.
기록이나 옛 탁본에 의하면 비문은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었고, 동정주국(同政柱國) 장신원(張信元)이 썼다고 전한다.
글씨는 2㎝ 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바탕으로 하면서 자형을 바르게 하여,
고박한 서형태미(書形態美)를 나타내고 있다.
연곡사삼층석탑(拍谷寺三層石塔)
연곡사에 있는 석탑. 높이 6m. 보물 제151호. 연곡사의 법당을 비롯한 여러 목조건물들은 6․25동란 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넓은 옛터에 석조물만이 몇 개 남아 있는데 이 석탑은 남쪽으로 약간 거리를 두고 건립되어 있다.
3층기단의 전형적인 일반형 방탑(方塔)으로, 각 층의 기단은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하고 있다.
지대석(地臺石)에 해당하는 석재 밑에 약간 넓이를 좁혀서, 또 한 층의 석재가 놓여 지대석은
최하층기단의 갑석(甲石)같이 되었고, 상면(上面)에는 하대석(下臺石)을 받기 위한 낮은 1단이 있다.
하대석과 중대석(中臺石)을 붙여서 한 돌로 만들고,
각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 1주가 모각(模刻)되었다.
갑석 상면에는 완만한 경사가 보이고 중앙에는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몰딩(moulding : 테두리장식)이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훨씬 작아졌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1주가 있다.
이상의 기단부는 모두 여러 개의 석재로 각 부가 구성되었는데, 상층기단 갑석만은
1석으로 밑에는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고,
상면은 급하지 않은 경사를 이룬 가운데 각형 2단의 몰딩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 1석씩으로 조성하여 겹겹이 쌓았는데,
각 층 옥신(屋身)에는 우주형(隅柱形)이 표시되었을 뿐이고 2층 이상의 옥신은 줄어들었다.
옥개석(屋蓋石)은 받침이 각 층 4단이고 추녀 밑은 수평이다.
옥개 상면의 낙수면의 경사는 경쾌한 곡선을 그렸고 모퉁이로 흘러내린 전각(轉角)에서의 반전(反轉)도 우아하다.
상륜부(相輪部)는 전부 결실되어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 석탑의 3층 옥개석은 떨어져나갔었는데 1967년 현재의 상태와 같이 복원하였다.
당시 해체에 따라 상층기단 내 자연판석상에서 높이 23.5㎝의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1구가 발견되었다.
이 석탑은 기단부가 매우 광대해졌으며 이에 비하여 탑신부는 축소된 감이 있다.
그러나 매우 안정감을 보여 주며 최하기단부터 탑신부에 이르기까지 체감비율도 온화한 아름다운 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모든 부재를 다듬은 방법과 각 부의 구성양식 등으로 미루어보아 건립연대는 통일신라시대 말기로 추정된다.
첫댓글 아~ 대단합니다.좋은 정보 잘 챙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