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 요 11:49~51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요한복음을 주제별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경멸과 조소 및 회의적인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로이 죽, 신약성경신학, 254쪽). 이것을 반어법(反語法)이라고 합니다. 본래의 뜻을 강조하거나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실제 표현하고자 하는 뜻과는 반대되는 말을 쓰는 표현법입니다. 반어법의 대표적인 예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참 잘했다.”라고 비아냥거리는 경우입니다. 잘해서 잘했다가 아니라 잘못했다는 것을 거꾸로 지적한 겁니다(다음 한국어 백과). 반어법은 표현할 내용이 실제의 의미와는 반대로 표현되는 방식입니다. 비아냥(사르카즘, sarcasm)과 비슷한 뜻으로, 반대말은 직설법. 모순어법처럼 불합리한 표현이며, 가장 흔하게는 특수의문문을 활용합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교실 분위기를 흐리는 아이에게 “한 번만 더 떠들어봐라.”라고 호통친다면 떠들라는 뜻이 아니라 조용히 하라는 의미입니다(나무위키). 한화 이글스 응원단이 꼴찌를 하는데도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응원가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아이러니(irony)라고 합니다.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라고 합니다(다음 어학사전).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시는 지를 강조하기 위해 반어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에서 정오에 물을 길어 나온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이 우물을 판 야곱보다 큰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4장 11~12절에서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남쪽의 유대와 북쪽의 갈릴리를 지나는 중간 지점에 있었습니다. 수가 성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있는 ‘세겜’이거나, 아니면 오늘날 ‘아스카르(Askar)’로 알려진 도시로 추정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인종과 관습과 정치와 종교의 차이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여섯 시는 오늘날 정오를 가리킵니다(굿뉴스, 199쪽). 수가 성 근처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도로의 교차점에 있었고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요셉의 무덤 근처에 있었습니다. 이 우물의 깊이는 오늘날에도 31미터였으니 예수님 당시에는 더 깊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남쪽 유대 예루살렘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수가 성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가시다가 피곤하셔서 야곱의 우물에서 쉬고 계셨습니다. 시간은 정오쯤이었습니다. 보통은 선선한 아침과 저녁에 물을 길어 오는데 사마리아 여인이 뙤약볕인데도 물을 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면서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요4:7). 여인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도 하지 않는데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 물건도 함께 사용하지 않는데 어떻게 물을 달라고 하는지 물었습니다(요4:9).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는 분이 누군지 알았다면 여인이 오히려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고 예수님이 여인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생수’는 신선한 샘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교인 안에 거하는 성령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인은 어이가 없어서 이 우물은 깊고 예수님은 물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떻게 생수를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여인은 그들의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사마리아인의 조상이라는 거지요. 여인은 예수님에게 우물을 준 그들의 조상 야곱보다 더 큰지 물었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것이 반어법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인 야곱보다 훨씬 위대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주는 우물은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즉 성령님은 영적인 갈망을 영원히 충족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ESV 스터디, 2,062~2,063쪽)./ 수가 성 여인이 질문한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는 예수님이 그들의 조상 야곱보다 어떻게 더 크단 말인가를 또한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인 물이 사람과 짐승이 마셨던 야곱의 우물보다 어떻게 더 크단 말인가를 묻습니다. 여인의 질문은 회의주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무디주석, 1,833쪽)./ 여기서 ‘생수’는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물 즉 샘물이거나 영적인 물 즉 성령님과 연결된 물이라는 뜻입니다. 여인은 인간적으로 생각해 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도 없으면서 물을 주신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우물을 판 야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인 갈증을 해결하는 분이 아니라 영원한 갈증을 해결해 주는 분이라 야곱보다 우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IVP 성경주석, 1,421쪽). 예수님은 그들의 조상 야곱보다 크며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야곱의 우물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셔서 종교 지도자들(요7:15)과 백성들(요7:20)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지하고(요7:31),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였습니다(요7:40~44).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고,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에게 돌아간다고 하자 경비병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3~35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헬라인 중에’는 ‘헬라 도시들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로마제국 내에 있는 이방 도시들과 이방인들을 뜻합니다(굿뉴스, 207쪽). 새로 교인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오실지라도 이 사람 즉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보다 더 많을지 추론했습니다(요7:31). 예수님이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라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가리키기도 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메시야를 찾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무디주석, 1,847쪽). 유대인들은 헬라인에게 가르칠 것이냐고 문자적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와 자기가 받은 사명을 영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IVP 성경주석, 1,432쪽).
예수님은 북쪽 갈릴리 출신이지만 남쪽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나신 줄 몰랐기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40~42절에서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7장 12절과 미가서 5장 2절은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굿뉴스, 208쪽). 유대인들은 갈릴리에 사시는 예수님이 태중에 있을 때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반어법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유대 베들레헴에 가셔서 태어나셨기에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ESV 스터디, 2,075쪽)./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말했습니다(요7:41). 또 어떤 사람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기에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무디주석, 1,848쪽).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선지자다,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IVP 성경주석, 1,433쪽).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오지 못한다고 하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살하려는 걸로 오해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1~22절에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라고 궁금해했습니다. 여기서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라는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죽는다는 말씀입니다(굿뉴스, 209쪽).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가는 곳’은 성부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가리킵니다(ESV 스터디, 2,076쪽)./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 33절과 8장 14절과 21절에서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찾을 것이지만, 그들은 죄 가운데서 죽고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겁니다(무디주석, 1,851쪽). 여기서 ‘죄’를 단수형으로 보면 메시야를 배척한 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 죄 때문에 메시야가 주시는 혜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IVP 성경주석, 1,435쪽).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성전과 유대 민족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요11:53, 굿뉴스, 216쪽).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여야 유대민족이 평안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9~51절에서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는 가야바가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과 결과에 대해 진리를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목적의 진리를 말한 겁니다. 그의 직위가 그에게 예언 능력을 주었습니다(굿뉴스, 217쪽). 가야바는 무려 18년 간이나 대제사장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이 죽어야 유대 나라가 평안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반어법입니다. 예수님이 죽는 것은 유대 나라의 안정을 가져오는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는 죽음이었습니다(ESV 스터디, 2,084쪽)./ 가야바는 모든 유대인이 로마인의 손에 죽기보다 예수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게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부지불식간에 말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백성들을 살리시려 한 대속적인 의도를 말한 것이 되었습니다(무디주석, 1,863쪽)./ 종교 지도자들은 모든 백성이 예수님을 믿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백성들이 몰려들면 로마제국이 소요가 일어날까 봐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 한 사람만 없으면 로마제국도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백성들도 다른 사람을 추종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말한 ‘우리 땅’은 성전과 도성을 가리킵니다. ‘민족’은 행정권을 말합니다.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 죽어서 유대 민족 전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말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여서 모든 사람을 살리려 하셨습니다(IVP 성경주석, 1,446쪽)./ 가야바는 예수님이 계속해서 표적을 행하면 민심이 거기에 쏠려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 민족을 망하게 할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가야바는 한 사람이 죽어서 유대 민족 전체를 살려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의 정치적인 발언은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임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성전을 지키려 했지만, 로마인은 주후 70년에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가야바는 자신도 모른 체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예언한 겁니다(요한복음 요한서신, 264~265쪽). 가야바는 유대 민족이 불확실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로마제국에 위협이 되는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가야바는 자신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일을 예언했습니다(베이커 신약, 226쪽).
요한복음은 신문 기사 같은 직설적인 언어가 아니라 문학적인 기교인 반어법을 사용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보다 큰 자냐고 물은 것을 통해 예수님은 다시 목마른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수를 주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가야바가 자기도 모르면서 한 말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반어법을 통해 성경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죽이려고 해서 죽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이셨습니다.
첫댓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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