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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묵상글 들 ( 연중 제2주일. - 소박데기가 아닌 그리스도의 신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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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소박데기가 아닌 그리스도의 신부
지난 주일에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신 주님께서는
이제 가나 촌 혼인잔치에 참석하시고 거기서 공생활 최초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왜 공생활의 시작을
혼인잔치에 참석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셨을까 의문이 드는데
제 생각에 그것은 우리 인간의 잔치에 참여하시는 분임을 공현하기 위함일 겁니다.
잔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이고 기쁨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렸을 때 저의 경험을 보면 이 잔치에는 친척들 뿐 아니라
동네사람 모두 참석하고 심지어 다른 동네 거지들도 참석합니다.
혼자서는 기쁠 수 없기에 모두 함께 기쁨을 나누려 잔치를 벌이는 것인데
주님도 이 인간의 잔치에 함께 하심으로써 기쁨을 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과 가르치시는 주님이 떠오를 것이고,
가톨릭 신자들 대다수는 잔치 상의 예수님,
거기서 먹고 마시시며 즐겁고 기쁘게 사람들과 함께 나누시는 주님보다
수난의 주님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요한이 빵과 포도주를 먹지 않자 마귀 들렸다고 하고
당신이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비판하시는데 주님은 분명 크고 작은 잔치에 참여하시고
오늘처럼 혼인잔치에도 참석하셨으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잔치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잔치에 참여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왜 잔치에 참여하십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 임마누엘 주님이요
사랑의 주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고고하게 하늘에서 초월자로 계시려고 하셨다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을 텐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그럼으로써
죄 외에는 모든 점에서 우리 인간과 똑같아지려 하셨으며
그럼으로써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소박데기인 우리를 당신의 아내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참 아름다운 얘기인데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눈물의 웨딩 드레스'라는 영화를 봤을 때입니다.
'눈물의 웨딩 드레스'는 가족을 위해 윤락녀가 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대학생이
가족의 반대에도 그 여자와 결혼한다는 그렇고 그런 영환데 대학생이었던 저도
그 얘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러려고 생각한 적이 있지요.
그리고 제대 말년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진정 사랑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매우 감상적인 생각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일 뿐이지만
주님께서는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아내로 삼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Sponsa Christi 교회론인데
이렇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교회의 구성원들인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잔치에 참여하시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잔치가 인간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잔치가 되고 성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혼인은 본래 두 사람의 서약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교회의 사제 앞에서 서약함으로 성사가 되고,
하느님과 무관한 혼인이 아니 되게 하는 것과 같지요.
아무튼,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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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카나에서의 예수님의 첫 기적을 얘기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기적의 참된 의미를 묵상케 합니다.
성서에서 발견되는 기적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능력과 사랑을 드러내어 보여 주시는 사랑의 손길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농작물의 수확이나 빵을 많게 하신 행위를 모두 신앙의 눈으로 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의 표징을 똑같이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적을 바라보는 차이는 일상안에서 이루어진 동일한 사건들을 습관적으로 그냥 아무런 감흥없이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감사와 경탄으로 받아들이냐입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계시이며 신적 활동이며 효력있는 표징입니다. 즉 기적은 표징이며 상징입니다. 기적적인 표징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기적은 마술사와 거짓 예언자나 점쟁이가 행하는 속임수를 들추어 냅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능력을 계시해 주는 특별한 표징입니다.
기적은 경탄과 더불어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또한 기적은 신앙을 수반하는 신뢰심, 감사하는 마음, 기억할 줄 아는 자세, 겸손, 순명,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희망 등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구마의 참된 목적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장 놀랍고도 완전한 기적은 일상안에서 만나는 사건들, 사람들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하는 상징적인 기적사건은 시기와 질투 불평, 불만, 교만 등으로 완고하진 마음이 사랑과 평화, 기쁨, 감사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일상의 기적이 육신적으로 죽은 이가 되살아 나는 기적보다 위대함을 깨달게 해줍니다.
참된 기적의 원천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자신이 변화되는 회개체험을 하고 복음이 말하는 그분의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는 일상의 기적을 체험하는 한주간 되시길 빕니다.
✝일요일 성체의 날 ✝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만자네다(Manzaneda) 의 전교 강론 중에 나타나신 아기 예수
북스페인 -1903년
아기 예수께서 현현하심으로써 생겨난 광채는 모든 춧불보다도 밝았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강론하는 동안 20분 내내 예수의 현현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성스런 경외심에 사로잡혔었는지 거의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대 앞에 서 계시던 존경하올 로메로 신부님께서는 갑자기 피를 흘리는 심장을 가진 아기 예수를 보고 주님과 하느님을 마주보게 되자 그분의 무릎은 떨렸습니다.
신부님은 더 이상 서 계실 수가 없어서 장백의나 성가대복 같은 성스런 예복을 입고 계신 것처럼 제대의 계단 앞 바닥에 넙죽 엎드렸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바닥으로부터 일으켜드려야 했습니다. 그분은 두렵고도 마음이 홍분된 나머지 온 몸을 부틀부들 떨었습니다.
그 때 나는 아이들에게 나와 함께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을 용서해 주십사고 예수님께 간청하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아이들이 일어서서 그들의 작은 팔들을 펼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틀은 내가 선창으로 기도하는 것을 한마디도 따라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기뻐서 어쩔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어른들은 마치 나의 권유에 대해 한 입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선창으로 기도하는 것을 함께 따라 기도했습나다. 그 옛날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이 사람들은 엄숙하고 진지하게 그들의 하느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계약을 새로이 맺었습니다.
끝으로 나는 보메로 신부넘께 성체로써의 축복을 부탁드렸습니다. 그 분이 성합 속에 다시 넣으려고 성광에서 성체를 집으려 했을 때 몸이 몹시 부들부듬 떨려 성체를 집을 수가 없었습니다.(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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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월 영적 수련 성월 3주간 감사/찬양☨ https://youtu.be/JtbY5rokYUM
☨에페소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난민을 위한 기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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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연중 제2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아들의 “때”가 왔음을 알려줍니다. 그 “때”는 천상잔치를 암시하는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때입니다. 그 날은 부활의 날을 상기시켜주는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 “때”를 미리 알려줍니다. 그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라.”(이사 62,4)
그리고 <제2독서>는 그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말해주며, 오늘 <복음>은 그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참으로 풍부한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때’, 곧 “그리스도의 때”입니다.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 중의 한 명인 바이런이 옥스퍼드 대학 종교학 과목 시험을 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열심히 답지를 쓰는데, 바이런만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감독관이 주의를 주었지만 시험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계속 멍 때리기를 계속하자 화가 난 감독 교수가 백지로 제출하면 영점처리 되고 학사경고의 대상이 되니 뭐든 써 라고 하니, 그때서야 그는 단 한 줄만 써놓고 유유히 빠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달랑 한 줄 답안지는 이 대학 신학과 창립이후 모든 교수들을 감동시킨 전설의 만점 답안지가 되었습니다. 그 한 줄은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이 이야기는 바로 물이 그 주인을 만난 때 벌어진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때”는 우선 혼인잔치가 벌어진 “때”입니다. 구약에서는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당신의 신부라 칭합니다. 그러니 혼인잔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하나로 결합되는 “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마지막 결정적 때가 벌어지는 십자가 아래에서도 아들과 함께 하셨듯이, 지금 공생활의 첫 시작에 함께 계십니다. 단지 함께 계실뿐만 아니라, 바로 이 아들의 ‘때’를 열어 가십니다. 성모님께서 먼저 이 ‘때’를 알아채시고, 예수님께 말씀하신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에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옛 계약이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결핍을 나타내는 숫자인 ‘여섯 개의 빈 항아리’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더구나 모두 비어 있어서 더 이상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늑방에서 흘리신 새 포도주, 새 사랑이 퍼내줄 ‘일곱 번째의 항아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곧 새 계약의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을 잔치 주관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예수님께 알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 포도주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다 떨어진 바로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때”가 왔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때”를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 다.”(요한 2,4)
이는 “예수님 자신의 때”, 곧 “그리스도의 때”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시며, 당신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일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의 원문을 직역은 “당신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는 어머니와 아들에게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때’가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때”를 구실 삼아 아들에게 거절당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조금도 무안해 하시거나 섭섭해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성모님께서는 요청하는 자세에서 순종하는 자세로 태도를 바꾸십니다. 비록 거절당했지만,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닌 아들의 원의에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명령이 있기도 전에, 이미 순명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이미 잉태하고 계셨듯이, 믿음 안에서 이미 예수님께 순명하십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기적을 보고서 믿었지만, 마리아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권능을 믿으신 까닭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명인가? 이 아름다운 일은 이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순명을 불러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로 번져갑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그 ‘그리스도의 때’를 불러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명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명의 3중주곡입니다. 마리아의 예수님께 대한 순명과 그 순명이 불러온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순명, 그리고 마리아와 예수님께 대한 시중꾼의 순명입니다.
그리하여 과방장은 “좋은 포도주를 이제까지 보관하고 계셨군요.” 라고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묘한 것은 이 혼인잔치에서는 단지 과방장이 새 포도주를 맛보았을 뿐, 아직 그 누구도 아직은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로 지금이 그 ‘때’ 입니다. 과연, 지금이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할 ‘때’ 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함께 혼인잔치를 거행할 ‘때’ 입니다. 그래서 카나의 이 혼인잔치에는 신부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빈자리’로 초대받은 까닭입니다. 곧 우리가 신부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오늘이 신부로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셔야 할 ‘때’ 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찬례를 통해서 이 은혜로운 사랑의 포도주, 새 계약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양의 신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이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몸을 영함으로서 예수님과 결합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건네주신 생명으로 혼인을 맺고 합혼주를 마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혼배 날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 혼인축일을!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주님!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제 안에 당신 사랑이 필요합니다.
당신 사랑에 취하게 하소서.
당신이 나의 님, 나의 신랑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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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원의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통해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기도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바람을 넉넉히 채워주시는 주님과, 늘 옆에 계시는 성모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갈릴래아의 카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혼인잔치를 아주 장엄하게 치렀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주일간 계속됩니다. 그런데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치 중에 필수품인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큰 망신입니다. 요즘 같으면 시장에서 금방 사서 대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미리 예측하여 술을 담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술이 떨어졌음을 눈치 채고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하고 알리셨습니다. 여기서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하지 않고 “포도주가 없구나!” 한 것은 성모님의 시선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난감한 처지에 빠진 신혼부부에게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려 깊고 섬세한 어머니이십니다. 문제가 발생 되었을 때 사랑이 있으면 해결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핑계를 찾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문제만 더 커지고 시끄러워집니다.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모님처럼 접근해야 합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처지도 알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처지를 어머님께 있는 그대로 알려주십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하시며 아들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보이며 주님의 뜻에 순명하도록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지 않고 다만 처지를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주님께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주도권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시고 다시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시며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지 않으셨다고 하면서도 어머니의 말씀을 흘려보내지 않으시고 잔칫집의 곤란함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의 처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말씀 드리는 어머니의 배려, 당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사려 깊은 모습에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기적을 낳습니다. 사랑이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나의 모든 것, 모든 움직임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사물, 모든 행위 속에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관심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마음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기에 아들에게 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어떤 기도든지 생명력이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가 온 삶이 되어야 하고, 삶이 또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함부로 쓰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시든지 당신 혼자서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을 바라시며 우리를 도구 삼아 이루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시는 기적을 이루실 때 물독에 물을 채우고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우리를 위한 은총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의 협력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갈증도 점검해야 합니다. 일꾼들이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항아리에 물을 붓자 비로소 기적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삶의 무기력과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혼의 항아리에 물을 부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려 애쓸 때 틀림없이 새로운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상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그분이 하실 일을 한다.
그리스도는 발이 없다.
하지만 우리 발로 사람들을 그분이 계신 곳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목소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 목소리로
그분이 죽으신 까닭을 말한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풍요로움은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 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 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두셨군요”(요한2,10) 하고 말한 과방장의 말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양에 있어서 풍부할 뿐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최고입니다. 차고 넘치도록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6,38).
포도주의 기적은 단순한 기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표징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분께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에서는 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표징을 말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전해 주고자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표징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그 기적이 전달하려는 핵심메시지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쳐다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면 낭패입니다.’ 카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에서 잊지 말 것은 6개의 물 항아리를 가득 채우시는 완성된 구원을 갖고 오시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잔치의 풍성함을 유지 시킨 것은 성체성사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 풍요로움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삶을 꾸준히 엮어 나갈 때(갈라2,5) 우리의 삶은 또 하나의 표징이 되어 세상을 풍성한 잔치 장소로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진리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임을 깨닫고 그분이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의자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잔칫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초대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어머니께서 그 자리에 계셨기에 그 곤란함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안에도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겠습니다. 기도하되 성모님의 모범으로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성 베르나르도) 성모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견주어 마음을 성찰하고 그분을 담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 그리고 어머니처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모님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인간사이의 중재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특별한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단순한 말로 청하십시오. 무엇인가 다른 것을 청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것을 찾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단순하게 바라는 것을 청하고 “다만 내 뜻대로” 가 아니고 “당신 뜻대로” 라고 말하십시오”(샤를로 푸코). 예수님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포도주가 없구나” 하신 것이 다 입니다. 사랑이 담긴 그 한마디가 기적을 낳았습니다. 결국 기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 사랑하는 삶의 기도를 통해 기적을 많이 낳으시길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과목 시험문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내포하는 영적의미를 서술하라” 였습니다.
한 학생의 답입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
이 학생은 영국최고의 시인이 된 바이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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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1. 새 창조의 원동력, 사랑과 믿음
지난 주님 세례 축일의 말씀에서 우리가 선포받은 메시지는 바야흐로 새로운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다는 어마어마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새 창조의 주역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물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이 순간에 새로운 창조에 필요한 징표를 세 가지나 받으셨습니다.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내려오셨으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확증해 주시는 음성을 들으신 것입니다. 인류가 창조된 이래 그 당시까지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을, 그래서 오직 예수님께만 주어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하늘의 징표였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축일에 이어진 지난 연중 제1주간 동안에 우리는 마르코가 보도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대표적인 일상을 들었는데, 이것이 새로이 창조될 세상이 질서를 잡아나가는 과정의 표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선포하시며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그 하느님의 ‘때’를 알려주셨고 믿음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으며,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는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창조하시려는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현실이어서 마귀도 없어야 하고 질병도 사라지리라는 것과, 이 새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창조의 주역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 또 하나의 공현 사건, 포도주의 기적
오늘 연중 제2주일에 우리가 들은 복음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기적 이야기입니다. 나자렛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나 마을에서 있었던 혼인 잔치에 초대받으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께 함께 가자고 제안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침 부르신 제자들을 대동하셨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포도주가 떨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혼주 모르게 아들 예수님께로 다가오셔서 “포도주가 없구나.” 하고 넌지시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대동하신 네 명의 장정이 너무 마셔대는 바람에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모자 간에 약간의 밀당이 벌어지더니 예수님께서 사양을 하시는 데도 성모 마리아께서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시자, 하는 수 없이 예수님께서도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시며 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기적이 일어났는데, 놀라운 것은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이 비로소 그분의 신적 능력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로써 난처해진 혼주를 센스있게 도와주시려던 성모님의 요청과 모자 간의 ‘밀당’을 거쳐서, 어머니께로부터 강력한 로비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발을 빼시려다가 본의 아니게 이 포도주 공현 사건을 일으키신 숨은 의도가 밝혀졌으니, 그것은 제자들이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3. 이사야의 꿈, 메시아의 도래와 그 백성의 출현
이렇듯 제자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 믿음을 간직하게 된 현실, 즉 메시아와 그를 믿는 백성의 만남을 이사야는 진작부터 꿈꾸어 왔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예고하며 아나빔들에게 그분을 기다리도록 희망을 주면서도 메시아 백성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채근했던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 백성으로 변화될 그러한 미래의 현실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이렇게 대단히 서정적인 필체로 묘사하며 전해준 바 있었습니다: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이사62,1).
그러면서 또한 이사야는 하느님의 간절한 심정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도 새롭게 변화될 영광에 대해서도, 자기가 보게 된 비밀스런 미래 사정까지 알려주며 격려하였습니다: “너는 주님께서 지어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이사 62,2). 장차 출현해야 할 메시아 백성이 맞이할 영광스런 미래의 모습은 하느님께 크나큰 기쁨이 되리라는 꿈을 이사야는 아주 감성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이러고 보면, 새 창조의 원동력인 하느님의 사랑과 백성의 믿음을 이사야는 진작부터 준비시킨 셈이었습니다.
4. 교회의 현실, 바오로의 증언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은 훗날 그와 꼭같은 이상을 간직한 바오로에게서 사도적 증언의 형태로 메아리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즉, 첫 제자로 부르신 네 제자로부터 믿음을 얻으신 예수님께서는 바오로에게는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부르시어 믿음을 갖추게 하셨는데 로마 제국 안에서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고 자존심도 무척이나 강했으며 체력도 그에 못지않던 그에게는 그에게 꼭 들어맞는 맞춤형 방식으로 역할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삼으시어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서 로마 제국의 전체 강역에로 믿음이 퍼져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는 이사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이 로마 제국 내에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지를 선교하러 다니며 목격한 바 있는 새로운 창조의 현실, 즉 교회라는 메시아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새 창조의 생생한 신비를 공동선과 은사로 간추려 매우 체계적인 형태로 증언하였습니다. 이 공동선과 은사들은 창조의 에너지이며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힘입니다. 바오로가 철학적으로 간추린 사도적 증언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한 몸이 되셔서 교회라는 메시아 백성을 움직이십니다. 그리하여 먼저, 종종 사회악에 가려져 있지만 대개는 사회악 때문에 드러나기 마련인 공동선의 실체를 알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이를 위하여 각자가 자기에 알맞은 직분에 따라서 받은 은사를 발휘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공동선을 식별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은사를 발휘하게 하시는 두 단계로 새로이 창조되는 하느님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공동의 선을 위해 주어진 은사들은 매우 다양해서, 지혜나 지식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병을 고치거나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며, 예언을 선포하거나 그 예언을 해석하기도 하는 등 사람들이 공동체로 모이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야말로 다양한 은사 안에서도 공동선에로 향하는 일치가 교회 안에서 이룩되는 새 창조의 질서요, 메시아 백성의 현실입니다.
5. 공동체 운동을 위한 사도직, 믿음의 공현
따라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써 당신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시고 하느님 아들로서의 정체를 나타내어 주신 것처럼, 메시아 백성은 공동선을 위한 은사를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각자 세상에 공현시켜야 합니다. 각자가 사는 자리와 일하는 자리에서, 가족과 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주어진 인간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은사를 드러내되 공동선을 지향하여 발휘하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창조하십니다. 이 모든 노력이 공동체를 위한 사도직이요, 이로써 우리의 믿음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납니다.
6. 믿음은 선물이며, 은총과 자유의 배합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 기적이고 이로 인해 제자들이 믿음을 얻게 된 것이 또한 더 큰 기적이듯이, 우리가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변화 또한 엄연한 기적입니다. 그냥 신기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라마지 않으시는 소중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때는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역사적 위력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믿게 되는 변화 역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이 복음을 믿으라고 요청하셨는데, 제자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에게 믿음이 없으면 대단히 실망하셨고 어쩌다 간혹 믿음이 돈독한 이들을 만나시면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도 그토록 바라시면서도 강요하실 수는 없는 것이었고, 오직 우리의 자유가 선택해야만 간직할 수 있는 특별한 태도라는 사실도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하느님께서 먼저 무상으로 베푸시는 사랑을 선물로 받고 이를 깨달은 우리가 선택함으로써 받는 은총이라는 사실은 더욱 더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우리의 인간적 의지대로 착하게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자유를 선용하게 이끄시는 하느님의 주도권까지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심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키심을 받아들이며, 우리의 활동을 변화시키심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히 의미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믿음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과 우리가 자유로이 선을 향해 결단하는 자유의 배합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사에서 영성체를 하며 축성된 성체를 받아 모실 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제의 말에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인생이라는 잔치에서 우리는 포도주로 변화되어야 할 물입니다.
7. 끓는 물의 비유
우리가 믿게 됨으로써 은총과 자유의 배합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이러한 이치를 끓는 물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상온에서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열을 가해서 물을 99도까지 온도를 높여도 뜨거워지기는 하지만 끓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1도를 더 가열해야 물이 끓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99도로 가열되고 있는 상수(常數)입니다. 마지막 1도의 가열 노력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변수(變數)입니다. 물이 끓는 온도 중에 99%는 하느님의 몫이지만, 이마저도 우리가 노력해서 가열해야 할 1%의 열이 없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의지와 선택 그리고 노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8. 인생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 같다
카나의 혼인 잔치는 세상과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포도주는 준비되어 있지만 언제라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면 비상사태입니다. 이때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센스있게 아들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하고 전구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성모송을 바치면서,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이유요 근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려는 노력입니다. 그렇게 되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메시아께서 우리의 마음도 믿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이사야가 내다본 대로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펼쳐질 영광스런 미래를 함께 공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우리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99도로 물을 가열하는 열정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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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인간의 운명을 바꿔주신 예수님
주님께서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셨습니다. 어둠이 영광으로, 치욕과 고통받은 민족이 하느님 손에 든 면류관이 되었고 버림받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백성들과의 혼인을 통해 인간의 지위를 높여주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인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온세상을 통제하시는 하느님이지만 우리 인간들이 너무나 작기에 아주 작은 모습으로만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그 크신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성령을 받아들이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술이 떨어지자 물을 아주 맛있는 술로 만드는 기적을 베푸시어 영원한 혼인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결혼식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루어진 이사야의 예언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에 내재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사람들의 혼인 잔치에 오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꿔주심으로써 완벽한 기쁨과 성령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자신보다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겨야 합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균형되이 발전할 수 있도록, 온 세상이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결혼은 사람과 환경 삶, 많은 것을 변화시킵니다.
카나 혼인잔치를 통해 하늘나라의 결혼식을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 결혼식이라면 이땅에 내려오신 주님 덕분에 우리도 이제 하늘과 하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 인간의 본성도 하느님의 본성에 더 깊게 일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랑 신부는 둘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입니다. 예수님 안의 성신과 인성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의 신분은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될 때만이 신성하고 고귀한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맹물처럼 지루하고 따분한 인생이 향기를 머금은 진한 술처럼 삶의 깊이가 짙어집니다. 하나로 결합했지만 신랑 신부는 여전히 둘입니다. 아내의 건강을 남편에게 나누어 줄 수 없고 남편의 지식을 아내의 지혜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안에서만이 인간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성령으로 일을 하는 고귀한 인류의 운명이기에 시골처녀가 왕실에 시집가서 궁중의 예식을 배우고 그에 따라 처신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자녀로서의 지위에 맞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배반하지 말고, 성령의 은총을 받았으니 육체의 삶을 살지 말아야합니다. 하느님이 들고 있는 면류관을 진흙탕에 빠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시고 우리 삶의 행복이신 주님, 주님께서 우리 집에 오래도록 영원히 머무시도록 초대합시다. 모든 일을 주님의 뜻대로 주님 안에서 이루고 그저 맑은 맹물이 주님의 성령이 깃든 맛있는 술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을 모셔야합니다. 지루하고 의무적인 일상이 즐거운 나날이 되고 하챦은 모든 일들이 가치있고 기쁨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을 사랑하듯 사랑한다면 지금 이 세상이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께서 내 옆에 오래, 영원히 머무실 수 있도록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2.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3. 매일의 일상이 맹물처럼 지루하다면 맛있는 술이 되도록 주님을 초대하십시오.
말씀의 실천
1. 모든 일을 시작할 때 진심으로 성심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2. 성령께서 주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을 행동으로 옮겨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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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마야 안젤루는 40대 초반이었던 1970년에 첫 소설을 발표한 후, 2014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시나 소설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수, 배우, 작곡가, 극작가, 프로듀서,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변함없이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에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의력은 고갈되지 않습니다.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2001년에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3년은 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전혀 다른 내용으로 매일 다른 글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의 창의력도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20년 넘게 쓰고 있습니다. 창의력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쓰면 쓸수록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 맞나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좋은 것을 더 많이 쓸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야 좋은 것들이 더 새롭게 생성되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사랑은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집니다. 평화도 쓰면 쓸수록 더 넓어집니다. 믿음은 쓰면 쓸수록 더 깊어집니다.
좋은 것, 필요한 것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쓸수록 새롭게 생성됩니다.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사랑을 계속해서 새롭게 생성해주십니다.
유다인들의 혼인 잔치는 보통 여드레 동안 열린다고 합니다. 친척과 친지들이 모여서 축제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종종 잔치에서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카나에서도 이런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남의 곤경을 돕기 위해 예수님께 부탁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자 간의 대화는 어머니와 아들 간의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공적인 대화로 비칩니다.
성모님은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시지요. 그러자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들에 대한 깊은 신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더군다나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사적인 대화가 아닌, 공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여인이란 ‘교회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의 이런 모습에 ‘기도의 전달자, 곤경에 빠진 모든 사람의 해결사인 어머니, 그에게 달려드는 모든 사람의 인자하신 어머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어서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간청으로 그 일이 앞당겨졌습니다. 사랑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어 줍니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내 마음의 크기가 더 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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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훌륭할 필요는 없지만, 훌륭해지기 위해선 시작해야 한다(지그 지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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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판단을 하는 방법
우리가 남을 평가하는 것은 은연중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등산을 좋아한다면 “등산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어.”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등산하는 사람을 치켜세우지요. 결국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등산을 싫어한다면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라면서 자신의 등산 싫어함을 등산 자체를 평가절하해서 드러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모두 자기 입장에 따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자기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요?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없습니다.
내 기준을 옳음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준을 사랑에서 찾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기준만이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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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청년 도배사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도배를 하는 과정에서 발판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선배는 “누가 발판을 잘못 폈어!”라고 말했습니다. 현장 소장은 “발판을 잘못 펴면 위험하니까 앞으로는 잘 주의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듯 다른 말입니다. 선배는 과거를 이야기했습니다. 소장은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선배는 책임과 평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소장은 예방과 주의를 이야기했습니다. 주변을 보면 선배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카롭게 평가하고, 비판합니다. 그 평가와 비판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늘 회색의 흐린 날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을 보면 소장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안을 제시하고,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대안과 희망을 들으면 먹구름 뒤에 태양이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습니다.
노래방에 가면 18번이 있습니다. 늘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가수들도 18번 노래가 있습니다. 조용필의 노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입니다. 이선희의 노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아 옛날이여!’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이 무명의 시대를 벗어나 인기가수로 발돋움한 노래입니다. 아 옛날이여는 제가 군대에서 듣던 노래입니다. 군대에서 기상음악으로 선임들이 ‘아 옛날이여’를 틀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알 수 있게 해 준 노래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잘 될 거야!”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책임하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고, 넘어야 할 산도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의 18번은 무엇인가요?
2000년 전입니다. 가나에는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하객들은 많이 왔는데 잔치에 준비한 포도주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를 많이 준비하지 못한 것을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혼인잔치의 주인을 탓하였습니다. 그런 비난과 평가는 혼인잔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혼인잔치에 필요한 포도주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에게 이야기합니다. ‘혼인잔치에 필요한 포도주가 부족합니다.’ 마리아는 지난 과거에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들 예수님에게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은 포도주로 만들었습니다. 혼인잔치는 성대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혼인잔치에 대해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는구나!” 정말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저의 큰 형은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글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음악도 잘해서 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형의 예술적인 재능이 부럽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작은 형은 운동 신경이 좋았습니다. 체격도 좋았고 양복을 입으면 잘 어울렸습니다. 싸움도 잘해서 형과 다니면 걱정이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30분을 통화하는 가족은 동생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동생에게 이야기하시고 좋아하십니다. 큰 형처럼 예술적인 재능이 없었기에, 작은 형처럼 좋은 체격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처럼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미운오리새끼’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도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꽃밭을 꾸미는 아름다운 꽃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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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 주님 영광으로 빛나는 표징의 삶 -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여러 차례 인용한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는 말마디입니다. 나이 30까지 살고 나머지 40년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구별이 안되는 존재감 없는 삶을 풍자하는 말마디입니다. 정말 참으로 살았다면 나이 70에 죽어 70에 묻혀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참으로 하루하루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오늘 연중 제2주일 말씀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오늘 복음이 주는 답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참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포도주 같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탄력 좋은 기쁨의 삶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참으로 무미건조한 물같은 삶에서 기쁨 넘치는 포도주같은 신바람나는 삶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바꿔 말해 슬픔을 기쁨으로, 불안을 평화로,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불평불만의 삶을 찬미감사의 삶으로 끝없이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부정적 소극적 비관적 삶에서 긍정적 적극적 낙관적 삶으로의 부단한 전환을 뜻합니다. 방금 우리는 흥겹게 화답송 후렴을 노래했습니다.
“당신의 기적을 만 백성에게 두루 알리라.”
우리 몸소 주님 영광으로 빛나는 표징의 삶을 통해, 주님의 기적을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깊이 잘 들여다 보면 우리 하나하나의 삶이 주님의 기적이자 영광의 표징입니다. 바로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가 제시하는 새 예루살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새 예루살렘 비전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너는 주님의 손에 있는 화려한 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과 하나된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파스카 예수님이자 주님과 하나된 우리들입니다. 바야흐로 주님과 함께 물이 포도주로 변한 영광의 표징을 살아가는 새 예루살렘인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첫째,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배웁니다. 카나 혼인잔치가 상징하는 바, 바로 오늘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 곁에는 늘 성모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포도주가 바닥 난 곤경의 사정을 아신 주님은 아드님께 알립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우리를 대신한 얼마나 위로가 되는 성모님의 말씀인지요! 이처럼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아드님 곁에서 아드님께 전구하고 계십니다. 아드님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반응이지만, 이심전심, 성모님은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셨고, 그대로 아드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 말마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이 함축된 말씀이요, 우리 모두 철석같은 믿음으로 묵묵히 한결같이 주님께 순종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바야흐로 예수님께서 개입하기 시작하셨고 순종의 기적이 발생합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일꾼들이 순종하여 물을 채우자,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시자 일꾼들은 곧 그것을 옮겨 갔고,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본 과방장은 신랑을 불러 말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모두가 과방장과 같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표징의 기적을 알아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와 순종했던 일꾼들만이 그 영광의 표징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믿음으로 묵묵히 순종의 삶을 살 때 물같은 무미건조한 삶에서 포도주같은 흥겨운 삶으로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과방장처럼 믿음의 눈이 없으면 일상에서 펼쳐지는 표징의 기적을 도저히 알아챌 수가 없다는 진리입니다.
일련의 기적의 과정을 체험하지 못한 과방장이나 손님들은 이런 표징의 비밀을 알아채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믿음의 눈’에만 계시되는 표징의 기적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제자들은 달랐으니 바로 주님께서 드러내신 표징의 영광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다음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리하여 제자들은 믿게 되었다.’
참으로 한결같은 믿음과 순종의 삶 역시 주님 영광의 빛나는 표징이 됨을 깨닫습니다.
둘째,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각자 받은 성령의 은사에 충실할 때 공동체란 항아리의 물같은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분위기는 활력 넘치는 기쁨의 포도주가 가득 담긴 분위기로 바뀌니 이 또한 그대로 주님 영광의 표징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를 명백히 밝힙니다. 말그대로 성령에 의한 영광의 기적이자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이어지는 모든 은사가 성령의 선물임을 드러냅니다. 믿음의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기적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등 도대체 은사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받은 모든 갖가지 재능들 모두가 성령의 은사임을 알 때 참으로 겸손한 삶이요 자랑할 것은 성령이신 주님뿐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모두가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고 신비롭고 고마운 진리를 깨닫습니다. 전에 가끔 인용했던 부패인생과 발효인생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부패할시에는 악취가 나지만 발효시에는 향기가 납니다. 바로 성령의 효소가 물같은 인생을 포도주같은 기쁘고 흥겨운 인생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무슨 식물의 잎이나 열매나 뿌리든 효소만 넣으면 참 신비롭게도 모두를 발효시켜 술로 변하게 하는 이치와 똑같은 역할의 영적 효소가 성령입니다. 주님 성령의 효소가 들어가지 않을 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도 변질되어 십중팔구 부패인생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과연 성령의 효소로 각자 받은 은사에 충실한, 잘 익어가고 있는 향기로운 발효인생인지 살펴보게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노년인생은 ‘잘 늙어가는’ 인생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효소로 ‘잘 익어가는’ 발효인생이라 함이 맞습니다. 세상에 성령의 영적 효소가 없어 부패인생으로 변질되어 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우리를 믿게 하는 것도, 회개를 부추기는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성령에 따른 삶 역시 주님 영광 빛나는 표징의 삶입니다.
셋째,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바로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은총입니다. 이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로 매일 평생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계속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은총이 우리의 물같은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포도주 같은 기쁨과 평화 넘치는 분위기로 바꿔줍니다. 부단히 부패인생을 향기 은은한 아름다운 발효인생으로 바꿔줍니다. 간혹 예전 신자분들과 주고 받은 문답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수사님, 하루 이틀도 아닌 평생을 이 무미건조한 물같은 분위기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갑니까?”
“하느님 찬미의 맛으로, 찬미의 재미로,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물맛이 아니라 기쁨의 포도주 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 맛으로, 하느님 재미로, 하느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일언지하에 대답하고 만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느님 찬미의 영적 효소가 우리 물같은 마음을 기쁨 은은한 포도주 마음의 영적 분위기로 바꿔줍니다. 새삼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삶 역시 주님 영광으로 빛나는 표징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시편 화답송이 우리를 고무시킵니다, 우리 갈망에 불을 붙이고 물같은 무미건조한 마음을 기쁨 은은한 포도주맛 같은 분위기로 바꿔줍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이사야의 입을 빌어 주님은 또 새 예루살렘인 우리 하나하나를 격려하시며 찬미의 기쁨을 살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니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종말론적 기쁨의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성체성혈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패인생을 부단히 향기 은은한 발효인생으로 바꿔 주시고, 물같이 재미없고 맛없는 삶을 포도주 같은 새롭고 재미있고 맛있는 기쁨의 삶으로 바꿔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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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의 첫 번째 표징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카나의
어느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잔치에 쓰던 포도주가 떨어지고 맙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이 상황을
알아채시고 예수님께 전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어머니의 말씀에는 아들 예수님께서
이 위기를 잘 해결하실 수 있다는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모호합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하느님의 뜻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십자가 위의 죽음의 때, 곧 예수님의 영광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십니다.
마리아께서 일꾼들에게 이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말씀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한목소리로 한 대답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24,3).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에
가득 채운 물을 모두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물독 하나가 두세 동이들이고 한 동이가 40리터가량이니,
모두 합치면 적어도 480리터가 넘는 ‘많은’ 양입니다.
게다가 과방장의 표현대로 ‘좋은’ 포도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이와 같이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사용되는 물이
예수님의 현존과 함께 새로운 포도주로 태어납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아모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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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카나의 혼인잔치: 첫 번째 기적
오늘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즉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부부관계처럼, 당신의 교회를 아내처럼 사랑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마리아의 역할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사야서는 키루스의 칙령(BC 538/37) 후에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재건되는 새로운 예루살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혼례식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하고 있다.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 이야기는, 즉 그 표징은 혼인에 대한 축복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맺으실 혼인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께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때’는 아버지의 뜻을 결정적으로 이루시는 십자가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열려 있다. 원문에 보면 ‘그 때에’는 본래 ‘사흘째 되던 날’이다. 이 ‘사흘째 되던 날’은 부활에 대한 어떤 암시적인 것이 있다고 본다. 또한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에서, 그 포도주가 그때까지 마셨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다는 사실에서 메시아가 와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의미를 알 수 있다. 많은 예언서에서 이 종말에 대해서 모든 결실이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쳐흐르게 되리라고 한다(참조: 아모 9,13-14; 호세 14,7; 이사 25,9-10; 55,1). 카나의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구원의 장이 열리고 그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신비스러운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그 가나 혼인 잔치에 마리아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모습은 들러리의 모습이 아니라, 결정적이고 능동적이다. “포도주가 없구나.”(3절)는 말로 예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시도록 하셨다.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되든지 간에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동참하는 사랑과 나아가 아드님까지도 그 일에 개입시키려는 그 노력이다. 즉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신뢰심의 태도이다. 이 신뢰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그 믿음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완전히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는 것은 거절의 의미로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그 ‘때’이며, 당신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가 있다. 당신이 끝까지 따르고 일치해야 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절의 뜻이 아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5절). 이 말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이 응답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탈출 19,8).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야 한다. 그때 우리는 구원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메시아적 포도주'를 얻는다.
이 메시아적 포도주는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기쁨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함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세상을 위해 봉헌되는 잔치가 벌어질 갈바리아에 오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신비가 오늘 복음에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11절) 하였다. 이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권능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기적 즉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딱딱한 침대 위에서 혼인식을 치르게 되는 십자가의 기적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절). 그 기적은 신앙을 불러일으켰고, 그 기적을 더 큰 기적에 대한 ‘표징’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신앙은 참된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드님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신뢰심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우리가 만일 형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하여 그들의 기쁨 또는 고통까지도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각자가 받은 성령의 크고 작은 은총의 선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선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하여 쓰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1코린 12,7). 이 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가나에서 예수님이 잔칫집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신 자신의 신적 모성의 ‘은총’을 사용한 마리아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총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치르실 거룩한 혼인 잔치에 합당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갖고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총을 잘 사용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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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
혼인은
잔치중의
잔치이다.
만남과
결합의
잔치이다.
혼인잔치에
포도주는
마음과 마음
사람과 사람을
기쁨으로
이어준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기쁨의
포도주가
다시
필요하다.
좋은 포도주는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채워지고
일어난다.
무엇이든지
변화시키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포도주의
주님이시다.
다시 카나의
혼인잔치가
기쁨의 맛으로
흥겨워진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맛나게
살길 바라시는
분이시다.
채워야할 것은
우리 마음의
물독이다.
삶이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관계도
기쁠 수 없다.
떨어진 것은
혼인잔치의
좋은
포도주이듯
우리 삶의
좋은 마음이다.
좋은 마음을
다시
채워주시고
살게하시는
마음의
주님이시다.
끝내
이루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만난다.
마음을 만나는
첫번째 마음은
변화의 기쁨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포도주는
다시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변화된다.
삶의 변화는
함께하시는
주님의
기쁨이다.
기쁘게 청하고
기쁘게 내려놓고
기쁘게 맡기는
이 믿음의 여정을
카나의 첫기적에서
다시 배운다.
믿음이란
두 개의 가치가
아프게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포도주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기쁨이다.
믿음의 선택
그 시작과 끝
모든 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요한 2, 7)
삶의 자리에
물을 채웠을
뿐인데
물독마다
가득 차는
좋은 포도주의
기쁜 행복이다.
좋은 포도주가
되고 좋은
삶이 되는
믿음의 잔치이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른다.
좋은 포도주의
향기와 맛처럼
다시
흥겨워지는
삶의 잔치이다.
삶의 잔치에
함께하시는
가장 큰
기쁨을 맛보는
기쁨의 주일이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말씀과 삶을
다시 만나는
기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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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카나의 혼인 잔치>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1-5).”
“포도주가 없구나.” 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예수님께 맡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기적을 일으켜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원래 ‘기도’는 이렇게 하는 법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할 때, 자기의 어려운 사정만 말씀드리고,
그 상황을 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뒤의 11장을 보면,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을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라는
말만 전했습니다(요한 11,1-3).>
‘여인이시여’ 라는 말은, 특별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존칭입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씀에서 ‘저의 때’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공적으로 계시되는 때입니다.
그 ‘때’는 십자가 수난 때입니다(요한 17,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라고 말한
어떤 백인대장은(마르 15,39),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공적 계시를
첫 번째로 받아들여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요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으로 보이는데,
예수님께서 곧바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거절은 아니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로 해석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라는 성모님 말씀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무엇을 시키든지 아무것도 안 시키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잔치를 그만 끝냅시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웃집에 가서 포도주를 얻어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해결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것인지,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실 일입니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요한 2,6-8).”
이 이야기에는 기적의 과정은 나오지 않고 기적의 결과만 나옵니다.
‘빵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언제 어떻게 많아졌는지는
언급되지 않고 수천 명의 군중이 배불리 먹었다는 말만 나옵니다(요한 6,9-12).
‘기적’이란, 인간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복음서 저자의 입장에서는 과정과 방법을 세세하게 기록할 수도 없었고,
기록할 필요도 못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어머니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때’를 앞당기셨는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인간의 사정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는가?
그 ‘때’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때이고,
지금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은 ‘사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그 ‘때’를 앞당기신 것은 아니고,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어서 하신 일이 아니라
이웃의 딱한 사정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자비’로 응답하신 일입니다.
‘사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성모님과 제자들과
일꾼들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9절-10절).
(예수님은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융통성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원칙대로만 해야 한다고 고집부리지 않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안 믿고 있다가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더욱’ 깊이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꾼들은
원래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적을 보았어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적은 믿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은 성모님의 믿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알아보더라도 믿음으로 곧바로 연결되지도 않습니다.
제3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사소한 일’로 보이는 일입니다.
물론 신랑 입장에서는 대단히 난처한 일이지만,
사람의 목숨이 위독한 일도 아니고, 집안이 망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성모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일로 보이는 일이라도 성모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분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도 내용에 대해서, “당신은 왜 그런 하찮은 일까지
기도해서 주님을 귀찮게 하는가?” 같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찮은 일은 있어도 하찮은 기도는 없습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말씀드리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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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이사 62,1-5)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혼인적 일치를 노래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을 재건하는 예루살렘에게 과거의 잘못을 훌훌 털고 일어나서 구원의 기쁨이 시작되는 새날을 준비하라고 외칩니다. 바빌론 유배생활 동안 “소박맞은 여인”처럼, “버림받은 여인”처럼 살았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제는 하느님께 대한 불성실과 배신을 청산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여인”처럼, 하느님과 “혼인한 여인”처럼 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재건되는 예루살렘과 하느님의 관계를 마치 혼인한 젊은 남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제껏 감추어졌던 새로운 일을 유다인들에게 시작하실 것이니(42,9; 43,19; 48,6)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한다면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도록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는 것입니다(65,17; 66,22). 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을 재건하면 다시 주어질 사랑의 기쁨과 축복을 선포하는 희망의 소리입니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예루살렘)이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면 신랑이신 하느님의 화려한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아가 3,11). 마치 재결합하는 부부의 혼인서약처럼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이 될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느님을 배신하지 않아야 하며, 하느님 역시 예루살렘을 포기하지 않고 돌보아주신다(60,18; 61,11)는 선언입니다.
복음(요한 2,1-11)은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첫 번째로 이루신 표징에 대해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표징”이라 부르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혹은 “구세주”로 믿을 수 있게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나타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그리고 제자들이 당신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고 나타나엘의 고향(21,2) 카나로 직행하셔서 첫 번째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거기에는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입장을 잘 이해하게 된 어머니 마리아도 함께 계셨습니다. 마르타가 앓고 있던 오빠 라자로의 치유를 주님께 간접적으로 말씀드렸던 것(11,3)처럼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이루시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한 처지임에도 잔치집의 곤란함을 생각해서 잔치 집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소박맞고 버림받은 여인”처럼 살던 시온(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었던 하느님과 똑같은 마음으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마리아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6,55)가 필요한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신 것입니다. 종말론적 혼인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생명의 양식을 찾던 이스라엘,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던 이스라엘과 예수님 사이에서 마리아(교회)는 혼인의 중재자 역할을 하십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섰으니 천상잔치를 베풀어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게 해달라고(이사 55,1-3) 간청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어머니의 간청에 예수님의 대답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입니다. 아주 모질게 들리는 대답 같지만 어머니일지라도 인간이 하느님의 일에 개입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깨달으신 어머니 마리아는, 그 옛날 파라오가 이집트인들에게 했듯이(창세 41,55), 신랑(구세주)의 어머니로서(시편 45,10)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십니다. 하필이면 왜 여섯 개의 물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것인지, 일꾼들이 물을 어디에서 퍼왔는지 말하지도 않습니다. 여섯이라는 숫자는 부족함이고, 일곱은 충만함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여섯 개의 물독은 예수님께서 아직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다 드러내실 때가 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시면 그때에는 참된 음료인 피를(6,55-56) 흘리는 일곱 번째 술독으로 바뀌시면서 마리아가 간청한 일에 하느님께서 본격적으로 개입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기 때문에 과방장이 물로 빚어진 포도주를 제일 먼저 맛본 사람(사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물을 물독에 부었다가 과방장에게 퍼간 일꾼들(신자들)은 잘 알고 있었으나 과방장은 남겨두었던 좋은 포도주가 아직도 남았느냐고 합니다. 성실한 일꾼들이 퍼온 것을 맛보았을 때에는 물이 이미 포도주로 바뀐 기적은 과방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고, 단순하게 잔치 집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랑 친구들을 위한 것입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며,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3,29)고 했듯이, 바로 구세주이신 신랑의 신부인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옆구리에서 흘릴 피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신부를 기쁘게 해주는 사랑의 선물인 포도주(참된 음료)가 떨어지면 안 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일치하려는 이들을 당신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부르신다는 사실을 잘 아셨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께 진지하게 종말론적 혼인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일곱 번째 술독(예수님)에서 생명의 피가 흘러내릴 때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십자가 밑에 계실 것입니다(19,25-27).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잔치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더 좋은 포도주의 독특한 맛을 즐겼었음에도 제자들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2독서(1코린 12,4-11)는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인 은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킨”(2코린 11,2) 코린토 공동체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여인”이 되었기에 다양하게 받았던 아홉 가지(8-10절) 영적인 선물들에 대해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많은 은사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자신의 은사이지만(11절), 동시에 공동체의 선익을 위한(7절) 것입니다. 코린토 공동체 안에 이미 직분과 활동과 은사가 여러 가지이지만 모두 “같은 성령”(4.11절)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성장시키기 위해(에페 4,12) 주신 것인데 지혜의 말씀에 따라 잘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다양한 은사들 때문에 자기가 가장 잘났고, 자기가 모든 것을 해야 하고,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에 젖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파벌로 갈라져서 “소박맞은 여인”, “버림받은 여인”처럼 살았습니다. 사랑이신 성령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주신 선물을 잘못 사용한다면 공동체를 파괴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가운데 “으뜸은 사랑이라.”(13,13)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시는 분은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하느님, 우리와 혼인한 주님으로도 불리는 성령이십니다. 우리 사랑의 짝이신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지혜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 따라서 공동체와 하느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버림받아 유배를 갔던 이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의 사랑받는 신부가 되었으니 하느님을 신랑처럼 사랑으로 맞이하라고 일깨웁니다. 우리 역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마음에 드는 여인처럼, 당신과 혼인한 여인처럼 사랑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은 이들을 위한 잔치(미사)에서는 감칠맛 나는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기에 기쁨이 넘칠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당신 마음에 드는 신자들 때문에 기뻐하실 것입니다. 혼인 선물로 각자가 받은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써야 합니다. 하느님은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우리를 당신 사랑의 짝으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적 혼인을 한 사랑의 짝입니다. 혼인의 기쁨이 있듯이 모든 신앙인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시는 성령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마리아처럼 잔칫집에 필요한 포도주를 청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영혼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차려주시면서 술잔 넘치도록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시편 23,5).
마리아와 일꾼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었던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자기 몫을 해냈습니다. 일꾼들이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신 마리아의 말씀을 거역했다면, “물을 채워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거절했다면 기쁨을 주는 포도주를 퍼다 손님들에게 나눠주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물을 퍼간 일꾼들처럼 공동체 안에서 자기 몫에 충실하면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퍼 날라야겠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다면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지혜와 지식으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물독에 맑은 물을 채울 수 있을 때 성령께서는 은총의 포도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술에 취해 분위기를 깨뜨렸다는 소리는 없듯이, 우리도 성령께서 주신 은사에 취해서 자기만 생각하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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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인생의 물독에 주님을 가득 채우며♣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요한 2,1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십니다(2,1-2). 그분께서는 사랑과 일치, 창조와 생명이 시작되는 기쁨의 잔치에 함께 참여하신 것입니다. 그 잔치에는 혼인 당사자뿐 아니라 세리와 어부 등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제자들, 예수님의 어머니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 해서 혼인이 성사되지 않는 일은 없겠지만 기쁨의 분위기가 식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단지 흥이 깨지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감으로써 혼인 잔치집이 텅 비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나서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고 말합니다(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4) 하며 거절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메시아로서 와 계시므로 이미 구원의 때가 와 있음에도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루시는 그때는 지금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마리아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2,5). 마리아는 이미 잉태 고지를 받을 때부터 아들이 구세주로 왔음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음을 믿으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시고(2,7),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물을 신랑이 처음에 내놓았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로 바꾸어주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십니다(9-11).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교회, 가정, 수도공동체는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분께서 함께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삶의 축제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과 부자, 권세가와 사회적 약자들 모두가 차별 없이 초대받았습니다.
포도 없이 물이 포도주가 될 수 없듯이 이렇게 함께하는 것은 불편하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분과 함께한다면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 기쁨과 축제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정관념과 선입견, 사고의 틀을 벗어버리고 영혼의 빈자리에 그분을 모셔야 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이 표징에서 물과 포도주 사이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 세상사, 일상의 만남 등 우리의 모든 일이 일종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포도주 곧, 모든 이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선을 불러일으키는 선물과 의미로 바꿔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개인과 사회라는 물독에 사랑과 관심의 물, 정의와 평화의 물, 공감과 공생의 물을 가득 채워 모든 관계를 기쁨과 생명이 꿈틀거리는 축제로 바꿔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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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시계바늘까지 앞당겨버리신 성모님!
아직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나자렛에서 북동쪽으로 6킬로 떨어진 카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누군가가 정말 난감해하고 있었습니다. 혼인잔치의 혼주, 다시 말해서 신랑의 부모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일주일간 계속되는 혼인 잔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즉시 분위기 파악을 하신 성모님의 측은지심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혼주가 처해있는 딱한 상황을 도저히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본격적인 공생활을 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은 나자렛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시작하지! 하실 때까지 조용히 지내셔야 했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주 처지가 하도 딱하다 보니 성모님께서 그냥 한번 내질러버리셨습니다. 사고 한번 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많은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딱 한 마디?
“포도주가 없구나!”
당시 예수님 입장에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님께서 기적을 하라고 몰아붙이시니, 살짝 빈정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말투는 분위기를 긴장 구도로 몰고 갑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복음 2장 4절)
예수님께서 좀 생뚱맞게도 어머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여인이라는 호칭을 쓰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완곡하게 기적을 거절한다는 의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혼주의 딱한 사정을 보면서 다시 한번 밀어붙이십니다. 지혜로우신 성모님이셨기에, 이번에는 예수님께 말씀하지 않으시고,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
막무가내 성모님 앞에 예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모님의 놀라운 파워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 때문에 그냥 밀어붙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연민의 마음 때문에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시계 바늘까지 앞당겨버리셨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성모님의 힘입니다. 오늘도 성모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큰 측은지심으로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결핍과, 우리의 상처와, 우리의 눈물을 바라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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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녀에게 사랑받는 법: 어머니는 자녀에게 물을 줄 수도 있고 포도주를 줄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카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여기에서 진짜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을 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성모님의 말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입니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기적을 하시게 만드십니다.
감히 저를 성모 마리아라 비유하자면 여러분은 누구이실까요? 바로 저의 글이나 동영상을 퍼서 날라주는 봉사자들입니다. 사랑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흐르는 것을 받아서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포도주를 얻어내야 할까요? 성모님은 예수님을 ‘한 없이 좋은 남편’으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대표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부인’이란 의미의 “여인이시여!”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성모님이 어머니셨지만 이제 아버지의 아드님 위치에 선다면 성모님은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가장 사랑받는 신부로서 신부가 신랑에게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낼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성모님이 왜 우리에게 공경을 받으실까요? 성모님이 예수님께 포도주를 얻어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물만 마셔야 합니다. 물은 사랑이 빠진 음식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음식에 사랑이 더해지면 양식이 됩니다. 자녀는 양식을 먹어야 온전히 성장합니다. 음식만 먹으면 여전히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이것을 알기에 사랑의 주인이신 신랑에게 당신의 ‘피’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징이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야곱의 축복을 얻어내는 장면입니다. 레베카는 사실 이사악의 모든 축복을 받을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의 축복을 야곱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도 에사우가 레베카에게 해코지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머니이기도 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야곱도 사랑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것입니다.
원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의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은 하느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자녀들을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얻어서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에덴동산의 그 많은 은총을 보며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반대하시는데도 레베카처럼 우리 교회를 위해 은총의 중재를 감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교회에서 공경받는 이유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불완전했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통해 물만 마실 것이고 우리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렇게 해주지 못한 어머니인 성모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의 마리아는 사제이고, 가정에서의 마리아는 어머니입니다. 사제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평소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면 신자들에게 사랑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주는 것들은 양식이 되지 못하고 음식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기대한 것을 받지 못한 신자들은 사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이 되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자녀에게 잘하려 해도 자녀에게 원망만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자녀가 그냥 어머니이니까 억지로 존중하는 척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 어머니가 자초한 일입니다. 자녀 앞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믿지 못하게 하여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처럼 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무시하는 아내는 자녀에게도 절대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물은 줄 수 있지만, 포도주는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미움을 받는 어머니는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닮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4회에 이유 없이 엄마를 싫어하는 딸 한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하는데 딸은 핸드폰에 엄마 전화번호도 없습니다. 딸의 가장 큰 위로자는 할머니입니다. 엄마가 밥해주는 것은 맛이 없다고 하고 엄마만 나가면 할머니와 아빠 편을 들면서 엄마를 이유 없이 미워합니다. 이유라도 알면 좋겠지만 이유가 없습니다. 전문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이가 지금 힘이 강한 할머니와 아버지 쪽에 붙은 것이라고 해석해줍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엄마가 주는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빠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딸이 엄마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레스토랑에 가서 포도주를 시키고 기다렸는데 물만 나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화가 날 것입니다. 한별이는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남편이 나와서 지금 아내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자신은 무시만 당한다고 말해도 전문가는 아내도 힘들다고만 할 뿐입니다. 물론 아내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남편의 말도 귀담아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데 제가 느끼는 가장 큰 핵심은 뭐냐면 (아내가 나에게) 공감을 못 해줘서 이 사람이 싫은 건 아니지만 14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함께하며 감정 교류가 안 된다는 게 생각보다 매우 힘들더라고요. 혼자 있어서 외로운 건 당연한 건데, 같이 있는데도 외롭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제가 많이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전혀 공감을 안 해주고 나는 죽겠는데 옆에서는 쳐다보지도 않고 남 이야기처럼 말합니다. 내가 좋은 일이 있어서 집에서 함께 기뻐하고 싶은데 대답한 한결같은 무덤덤함이었습니다. 이걸 한별이가 똑같이 엄마에게 하거든요. 한별이도 ‘엄마 나 좀 사랑해줘’라고 말하는 거 같아요.”
전문가는 엄마 또한 남편이 감정을 나누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남편의 감정을 무시하는 듯한 엄마의 문제는 실제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에게 해주는 조언들이 항상 실패하기 때문에 아내도 남편에게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내는 항상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해주는 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빠의 피땀과 엄마의 피땀이 다 섞인 ‘포도주’의 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아내도 이 노력을 해야만 자녀에게 사랑받습니다. 혼자 자녀를 위해 하는 노력은 포도주를 기대하는 손님에게 물만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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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2 주일-묵상과 기도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 오심의 미래의 이스라엘의 영광, 교회의 영광에 관하여 말합니다.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구원의 횃불이 타오를 때까지 다른 민족들이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본다. 주님께서 친히 지어주시는 새 이름으로 불린다. 주님의 손에 들려있는 화려한 면류관, 하느님 손바닥에 있는 왕관이 된다. 고 예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신자들에게 각가지 은사를 열거합니다. 그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다. 직분도 여러 가지이나 같은 주님께서, 활동도 여러 가지지만 모든 활동을 일으키는 분도 같은하느님이시다. 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의 첫 기적,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카나의 혼인 잔치를 전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기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이사 62,1-5
형제 여러분,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1코린 12,4-11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2,1-11
실천
예수님은 카나 혼인 잔치에서 공생활의 첫 기적을 행합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기적의 때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통하여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그 사업에서 성모 마리아의 협력과 역활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 구원의 기쁨에 함께 하시고 아드님 그리스도의 일을 더 풍요롭게 하십니다. 성모님은 인류와 구원자 아드님 그리스도를 중재하시며, 모든 사람들의 눈과 방향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고 나아가게 하시는 구원의 협력자이십니다.
카나 혼인 잔치의 예수님께 대한 요청과 기적의 결과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들의 성모님께 대한 전구의 믿음의 자세를 새롭게 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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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일어난 최초의 기적,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잔치도 여러 잔치가 있습니다만 혼인 잔치는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만남을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축하의 자리에 빠질 수 없는 게 술입니다. 술이라는 게 건강이라는 관점에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술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왜 첫 번째 기적을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셨을까 하는 걸 묵상해봤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잔치에 초대가 되면 그냥 형식적인 초대에 응할 수도 있고 초대를 한 사람과의 어떤 관계가 있으면 그 관계 때문에 단순히 초대를 넘어서 잔치에서 일어나는 일을 거들며 도와줄 수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음에서 일어난 배경을 보면 그냥 단순히 형식적인 초대에 응하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초대를 한 사람과의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집 잔치에 물론 잔치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술이 떨어졌을 때 술이 떨어진 상황을 보고서 단순히 이 집 잔치에 이제 술도 다 떨어져가는구나 하고 말은 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남의 잔치집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린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런 걸로 봐서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성모님이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셨을 겁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그냥 성모님께서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걱정하시는 마음으로 잔치집에 술이 있어야 하는데 없게 되자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하고 걱정하는 듯한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때'를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예수님의 때'라는 말씀을 하시는 건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봤을 때 조금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냥 "네, 어머니. 그렇네요. 어쩌면 좋을까요."하고 공감하며 말씀을 드리는 게 자연스런 반응이실 겁니다.
혼인잔치는 기쁜 날입니다. 기쁜 날에 여흥을 즐기게 해 주는 술인 포도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포도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혼인잔치는 세상 종말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거룩한 주일입니다. 주일은 하느님과 저희가 만나는 날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우리가 만나는 날입니다. 단순히 만나는 날이 아니고 혼인하는 날이라고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혼인은 한 번만 하는 것이지 미사가 열릴 때마다 또 주일마다 매주 혼인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혼인은 한 번만 하면 그게 가장 아름다운 혼인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는 걸 상징하니까 말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현존이 실종된 상태라고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지상에서 계속 계실 상황이 아니셨고 또 승천을 하셔야 하는데 그때를 상징하는 게 바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다고 저는 묵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아도 우리는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는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이 재료였던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시점은 언제인가요? 바로 물독에 물이 가득 채워진고 난 후였습니다. 물은 정결례에 쓰이는 물이기 때문에 깨끗한 물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왜 정결례에 쓰이는 물과 물독이 등장했는지 그 이유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물독은 우리 인간의 몸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 물독에 들어 있는 물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깨끗하게 됐을 때 그것도 가득찼을 때 그때 비로소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 바로 우리의 몸이 예수님과 같은 신성으로 변화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였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었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과방장이 한 말을 보면 포도주는 계속 있어야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 포도주는 바로 예수님의 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바로 우리의 마음의 그릇에 담긴 물을 가지고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육신인 인성이 예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게 미사이고 그 만남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혼인잔치가 아닐까요? 미사 때 물과 포도주를 봉헌하게 되면 섞는 과정이 바로 인성과 신성이 만나는 것을 상징한다는 걸 처음 영세를 받고 난 후에 궁금해서 신부님께 복사를 서면서 여줘보니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천상 잔치를 미리 이 세상에서 재현해 우리가 그걸 맛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포도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지만 그 피가 떨어지면 되지 않으니 그 피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재료가 바로 우리의 정결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정결한 마음이 가득찰 때 우리의 인성이 하느님의 신성으로 변화가 되어 완전히 한몸으로 될 것입니다. 바로 물이 포도주로 변화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 기적의 단초는 성모님께서 정보를 알려주셨고 또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때 성모님의 이런 모습이 무엇일지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수님과 하느님을 만나는 혼인에는 반드시 성모님이 그렇게 되도록 조력을 해 주셔야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암시도 해 주는 것 같다는 걸 묵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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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연중 제2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이사야62,1-5)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을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4)
시온이 주님의 축복을 온전하게 회복함을 예언하는 이사야서 62장 2-5절 가운데서, 62장 4절과 5절은 시온에 대한 주님의 축복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축복된 순간인 혼인에 비유되어 묘사된다.
그 가운데 4절은 과거 시온을 버리운 자로 칭해지거나(이사54,6.7) 스스로 그런 존재로 여겼였지만(이사49,14), 주님의 회복된 은총을 받은 후에는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과거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을 바빌론의 손에 넘겨주고, 또한 약속의 땅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셨지만,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키루스를 통해 당신 백성을 회복시키셨으며, 나아가 그 민족을 통해 메시아가 나오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영원히 버리신 것이 아님을 입증해 주셨다.
본문에는 히브리어에서 가장 강한 의미의 부정어 '로'(lo)와 '다시는'에 해당하는 '오드'(od)가 쓰여 과거와 달라진 시온의 면모를 한층 더 강조해 준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란 표현에도 역시 부정어 '로'(lo)와 부사 '오드'(od)가 사용되어, 하느님의 백성과 더불어 그들의 땅 역시 과거의 황폐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축복을 누릴 것을 강조한다.
본문은 선민 이스라엘이 누리는 축복이 총체적 축복임을 동일한 형식의 문장을 반복 사용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시온 백성이 다시는 버리운 자, 또한 그 땅이 다시는 황무지라 불리지 않을 것임을 언급 한데 이어, 그들이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며 그 이름으로 불릴 것을 선언한다.
여기서 '내 마음에 드는 여인'에 해당하는 '헤프치 바흐'(hephtsi bah)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My delight is in her)라는 의미이다. '헤프치'(hephtsi)의 원형 '하파츠'(haphats)는 원래 간절히 염원하거나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그리고 '바흐'(bah)는 전치사 '뻬'(be)에 '그녀'라는 여성 3인칭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의 표현이다. 여기서 여성 3인칭은 이사야서 62장 1절의 시온을 지칭한다.
시온이 하느님의 뜨거운 기쁨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주도적 은총에 기인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새롭게 당신의 거처로 세우실 교회가 메시아의 구원사업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될 것임을 나타낸다.
또한 '혼인한 여인'에 해당하는 '뻬울라'(beullah)는 원래 '혼인하여 주인이 되다'는 의미의 동사 '뻬알'(baal)의 수동태 분사 여성형으로서,혼인을 하여 남편의 소유가 된 여인을 의미한다.
위의 '헤프치 바흐'(내 마음에 드는 여인)와 '뻬울라'(혼인한 여인)는 이사야서 62장 4절 후반절에서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와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으로 해설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과거에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 버렸던 땅(이사54,6)에 다시 그 영광이 돌아와 옛 지위를 회복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에제43,2-5).
이 '헤프치 바흐'(빨리 읽어서 '헵시바')와 '뻬울라'(빨리 읽어서 '쁄라')는 이사야서 62장 2절에서 예언되었던 '새로운 이름'과 관련되어 시온의 회복이 완전할 것임을 보여준다.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본문은 왜 시온이 '헵시바'로 칭해지며, 그 땅이 '쁄라'로 일컬어지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마음에 들어 하시고'에 해당하는 '하페츠'(haphets)는 완료 시제로 되어 있고,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에 해당하는 '팁바엘'(thibbael)은 미완료 시제로 묘사되어 있다. 문맥적으로 볼 때 여기의 시제는 미완료가 타당하다.
그렇다면, 완료 시제로 된 '하페츠'(haphets)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주님께서 언제나 시온을 마음에 들어하신다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시온을 돌이키실 일이 비록 미래의 일이지만,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마치 과거에 이루어진 일처럼 표현되었다는 해석이다.
문맥상 여기서 사용된 완료 시제는 예언적 완료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쁨을 표현한 '헵시바'라는 칭호는 시온이 받을 새로운 이름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 얼마의 기간동안 시온은 주님의 기쁨을 잃어버렸지만, 훗날 메시아 구원 사업의 결과로 새로운 이름인 '헵시바'로 칭해짐으로써, 그의 기쁨을 회복하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시온을 마음에 들어하시는 시점은 이 예언이 주어진 시점보다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말하는 것이다.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우리의 삶이 여섯임을 알아야.
(요한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엿새(6), 안식(7)이 없는 곳에 안식을 주시려 가셨다는 뜻이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 행위 신앙에 열심이었던 마르타는 계속 시중드는 일에 열심 한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깨달음의 신앙을 살았던 마리아는(루가10,38-42참조) 그 행위의 신앙이 아닌 주님의 발(길)이 구원의 진리임을 깨달았다.
(루가10,41-42)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얻는 비싼 향유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함을 아는 그 자기 버림(否認)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힘, 안식의 주인(주님)으로 믿는 그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마르타는 자기 열심, 힘으로 살아가기에 그에게는 안식이 없다.
그리고 또 한사람~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 로마(肉)로부터의 해방을 이루려했다. 죄에서 해방, 곧 인간의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주님, 그분의 길, 말씀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도둑인 것이다.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마리아가 한 일이 예수님의 길, 곧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이 진리임을 믿는, 그 진리를 간직한 행위였다는 말씀이시다. 마리아가 슬기로웠던 것이다. 행위에 열심했던, 그래서 기름을 간직하지 못한 마르타가 어리석은 처녀다.
(마태25,3-4.10)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교회)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자신)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 기름, 진리가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준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진리는 곧 성령이시다.
(요한16,13)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로마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 라자로 대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되면 안 된다. 곧 보이는 현상(표징, 기적)이 아니라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인 ‘부활이요 생명, 안식의 주체(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1코린1,22-24)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천주의 성령님! 저희에게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대속이 구원의 진리임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연중제2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2,1~11)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3) 이 여자를 그냥 놔 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7)
요한 복음 12장 3절에 예수님을 위한 잔치의 식탁에서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다가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린다.
요한 복음 12장 5절에는 그 값어치가 300 데나리온어치라고 말한다. 건강한 노동자가 안식일을 제외하곤, 거의 1년 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총수입에 해당한다.
'리트란'(litran)은 '한 근'을 말하는 중량의 단위로 대략 340g(12온스)정도이다. 마르코 복음 14장 3절에는 '한 근'이 들어가는 '옥합'으로 나온다.
그런데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은 향유를 머리에 부은 것처럼 묘사하고 (마태26,7; 마르코14,3), 요한 복음은 향유를 발에 부은 것으로 묘사한다. 왜 그럴까?
마리아는 당시 귀한 손님에게 존경을 표하는 관습따라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그런데 이 기름은 양이 적지 않아 몸을 타고 내려와 두 발까지 적셨다. 이것은 아마도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에서 맨 처음의 기름을 머리에 부은 동작이 시작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요한 복음에서는 기름을 부어 발에 떨어진 결과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요한 복음사가가 언급한 발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체 부위 가운데 발이 가장 천시된 것과도 관련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값비싼 향유와 발을 대비시킴으로 마리아의 헌신을 높이 평가한다.
유대 사회에서 여자가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이 수치로 여겨졌던 당시에, 마리아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다. 희랍어의 'ekmasso'(엑맛소)는 '씻다'(wash)의 의미가 아니라 '닦아내거나 문지르는 것'(wipe)을 나타낸다.
마치 미용사나 우리 자신이 화장품을 얼굴에 골고루 성의를 다해 문질러 주듯이,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를 골고루 문질러 드린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뜨거운 마음과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취한 아름다운 행동이었다.
열 두 사도의 당가를 맡고 있었으나 돈도둑이었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요한 12,6),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12,5)하고 가증스런 발언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사랑으로 한 행위에 쓰여진 기름이 당신 자신의 장례(죽음)날을 위하여 준비되어 온 기름임을 밝히신다(요한12,7).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가장 값진 것을 주님께 드린다. 그래서 향유의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지게 된다.
'이 여자를 그냥 놔 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7)
요한 복음 12장 7절의 앞에 나오는 동사 '그냥 놔 두어라'에 해당하는 '아페스' (aphes; let alone)는 그 원형 '아피에미'(aphiemi; 용납하다, 허락하다)의 명령형이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동사인 '간직하게 하여라'에 해당하는 '테레세'(terese; she has kept)는 그 원형이 '테레오'(tereo; 지키다, 간직하다)인데, 여기서는 가정법의 구조로서 '~하도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명령형이 아니고 가정법 문장으로서 '그녀를 버려 두어라, 나의 장례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할 수 있도록'으로 번역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이미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 그것을 예수님께 부음으로써 다 소비해 버렸다는 문맥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다소 의역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이 구절의 '간직하게 하여라'에 해당하는 '테레세'(terese)동사에 대해서, 가정법을 인도하는 접속사 '히나'(hina; ~하도록)을 생략하고, 이 '테레세'동사 대신에 3인칭 단수 직설법 완료형인'테테레켄'(tetereken)으로 썼다.
이 완료형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간직하여 왔다는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하면, 'Leave her alone; for the day of my burial she has kept this'이고, 번역하면, '그녀를 내버려 두어라. 그녀는 나의 장례 날을 대비하여 이것을 간직하여 왔다.'이다.
당시 마리아는 존경하는 분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지금까지 간직하여 온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었다. 하지만 천주성(神性)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당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큰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평소 돈 도둑이었던 유다가 '가난한 자' 운운하며 그것이 아깝다고 이야기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는 '톤 프토콘'(ton ptochon)인데,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극빈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항상 그들과 함께 있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 보다 당신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평소 강조하신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관심에 반(反)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 시기에 무엇이 더 본질적으로 우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며, 열두 사도단의 당가(살림, 재정)를 맡아 돈을 빼 돌리기 위해 가난한 자의 구제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유다의 사악한 마음의 심중을 찌르는 말씀인 것이다.
지금 이 시대 빈부의 양극화를 보면서 특히 재벌들의 회개가 많이 필요한 시기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자신은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하이 클래스로 살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서민 운운, 비정규직 운운, 절대 빈곤 퇴치 운운'하는 것을 본다.
사랑도, 나눔도, 자선도 자기 밥통 안에서 말보다 행함으로 먼저 나와야 된다.
예수님께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시며, 애덕 실천의 여부가 최후 심판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본이며 목적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제외되어 있으면 안된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한 구속의 효력이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한다. 예수님의 보배롭고 거룩한 피가 가난한 자도 부자도 영혼의 때를 씻어내지 못한다면, 현세적 재화의 나눔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화폐로 환산될 수 있는 외적, 물질적 재화가 그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소위 우리의 나눔이라는 것도 언제가는 없어지고 말 이 세상과 현세만을 위한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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