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개 비
최원돈
오늘도 는개 비가 내린다.
이른 봄날 새벽이면 강촌 집은 어김없이 안개로 자욱하다. 안개는 동네 어귀로부터 길을 따라 나 있는 개울에서 올라온다. 스멀스멀 올라온 안개는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로 퍼진다. 들을 지나 산마루까지 희뿌연 안개가 온 세상을 뒤덮어 아직도 어둠을 머금고 있다. 이윽고 안개는 방울이 굵어져 아래로 늘어져 거미줄 같은 줄이 되어 땅으로 내려앉으며 는개 비가 된다. 이런 날이면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 오른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 조용히 읽어본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기행》 8p 김승옥 2017 민음사
안개는 무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호반의 도시 춘천은 안개의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오늘같이 는개 비가 자욱한 날에는 자동차를 몰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선다. 호반길 곳곳에서 만나는 풍경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그윽하다. 공지천 에티오피아기념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호반길을 걷는다.
호수 넘어 중도에 있는 미루나무 숲이 실루엣처럼 어렴풋이 보인다. 운무에 쌓인 호숫가엔 오리배들이 섬처럼 떠 있다. 길모퉁이를 돌아 소양강 쪽으로 나오면 더 넓은 호수에는 멀리 삼악산이 물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뚝 솟아 있다. 간간이 청둥오리가 떠다닌다. 청둥오리는 좀처럼 혼자서 노는 법이 없다. 언제나 둘이 함께 놀고 있다. 어쩌다 한 마리만 보여 좌우를 두리번거리면 또 한 마리가 노닐고 있다.
한참을 소양강 강가를 걷다 보면 춘천 대교가 나타난다. 지금이야 모두가 호수지만 그 옛날에는 이곳 소양강 건너엔 또 다른 마을이 있었다. 커다란 미루나무 숲 섬 앞 강물 위에 철새 떼들이 줄을 지어 길게 늘어져 있다. 얼핏 보니 오작교 다리를 놓은 듯하다, 곳곳에 시비들이 서 있고 겨울연가 연인이 서로 안고 있는 그림판도 세워져 있다. 그래서인가.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철새 떼가 오작교를 만든 걸까. 하얀 철책 위에서 산 비둘기 한 마리가 오작교를 바라보고 앉아있다.
멀리 ‘소양강 처녀상’이 보인다. 치맛자락을 드날리며 서 있는 모습이 씩씩하다. 소양강 처녀는 한 손은 치맛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갈대를 잡고 옷고름과 치맛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서 있다. 아내가 받침돌에 적혀 있는 노랫말을 읊조린다.
달 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 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 나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 아 그리워서 가슴 태우는 소양강 처녀 ⃫ <소양강 처녀> 1969년 반야월 작사
함께 노랫말을 따라 읽어본다. 아내는 노랫말 중 이 구절이 제일 가슴에 와닿는다고 했다. 아마 처녀 시절의 추억이 그리워서 일까. 아내는 달 뜨는날 소양강 처녀를 보러 다시 오잔다.
우리는 는개 비를 맞으며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 모자를 벗어 옷자락에 묻은 빗방울을 툭툭 털고 커피숍으로 들어가 ‘스카이워크’ 너머 ‘쏘가리 동상’을 바라보며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아내는 는개 비 속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산다는 게 무엇일까. 우리 부부도 서로에게 그윽한 그리움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오늘 아내와 함께 는개 비를 맞으며 걸어 온 이 길을 감히 ‘춘천 제일경(第一景)’이라 불러본다. (2024. 0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