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을 향한 뜨거운 프러포즈
노무현의 파격적인 특검법 수용… 당장 실리에선 잃는 것 많지만 위력적인 명분을 축적한 셈
“수용을 하십시다.”
3월14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의 말을 다 듣고 난 노무현 대통령이 천근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순간 회의 테이블 뒤쪽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의 눈이 커졌고, 회의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고 ‘청와대뉴스’는 전했다.
노 대통령은 말을 이어나갔다. “야당에 신뢰를 주고 약속한 바대로 야당이 법을 수정한다고 하니까, 그걸 믿읍시다. 신뢰를 보내고 또 거기에 화답하고, 그런 것을 국민이 볼 수 있게 합시다. 도박 같은 결단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뢰를 위한 정치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는 특검법을 수용하며 ‘신뢰’와 ‘믿음’을 유난히 강조했다.
주변의 ‘소수의견’을 선택하다
특검법의 정식 명칭은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북 비밀송금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이다. 3월15일 관보에 실림으로써 법적 효력을 발휘하게 됐다. 앞으로 국내 정국은 상당기간 ‘대북송금 특검 지뢰밭’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표현대로 그것은 ‘도박’이었다. 그가 특검법 수용이라는 카드를 선택함으로써 감수해야 하는 위험부담은 적지 않았다. 현대그룹에 대한 조사는 안팎으로 심상치 않은 경제상황에 만만치 않은 파장을 끼칠 수 있다. 대북관계 경색은 아슬아슬한 북핵 위기를 조절할 수 있는 제동장치의 상실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지기반의 핵심인 호남민심의 이반도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지 않아도 검찰 상층부 인사 등에서 호남인사 배제론이 불거지는 상황이었다. 민주당은 또 어떤가. 동교동계 의원들의 불만이 당내 갈등을 증폭시킬 것임은 쉽게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교동계 의원들이 ‘특검제 수용=DJ 죽이기’로 몰아가면서 노 대통령을 공격할 가능성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특검 수용으로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와 특검 수용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특검법 수용은 적어도 민주당쪽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국무회의 직전 열린 의원총회에서 ‘조건부 거부권 행사’를 의결했고, 정대철 대표가 이를 청와대에 전달한 상황이었다. 특검법 수용으로 결론이 나자 신주류에 속하는 김원기 고문과 추미애 의원조차 ‘뜻밖’이라며 놀라워하지 않았던가. 한나라당도 거부권이 행사될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을 경우 떠안아야 할 부담은 두말 필요 없이 대야관계의 파국이다. 당선자 시절부터 공을 들여온 대야 타협의 기조가 송두리째 무너진다. 한나라당은 여차하면 거리로 나설 것임을 ‘협박’하는 상황이었다. 노 대통령도 “한나라당이 (수정을) 약속했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거부권을 행사해버리면 여야 간 타협의 길이 막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노 정권은 어차피 소수여당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법률 개정을 수반하는 개혁과제를 내년 총선 이후로 미룬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토록 많은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귀가 안 맞는다.
노 대통령의 ‘도박’을 설명해줄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들이 있다. 3월6일 청와대 충무실. 노 대통령은 13명의 개혁진영 원로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특검법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함세웅 신부와 김지길 목사, 청화스님 등 참석자 대부분이 특검제를 수용해선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안동과 의성 등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해온 류강하 신부(가톨릭상지대 학장)는 “대구·경북 여론은 특검제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처지가 안타깝지만 특검을 수용해 정면돌파를 하는 게 노무현답다는 여론이 많다”고 수용론을 폈다.
큰그림을 쓰레기통에 버릴 수 없으니…
3월14일 임시 국무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견을 밝힌 장관은 모두 7명. 이 가운데 정세현(통일)·강금실(법무)·한명숙(환경)·지은희(여성)·윤진식(산자)·김영진(농림) 장관 등 6명이 특검법을 수용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부산 동아대 교수 출신인 허성관 해양수산부 장관은 “거부권을 행사하면 정국이 파탄난다. 상생의 정치를 해야 한다”며 특검법을 수용하자고 했다. 허 장관은 초·중·고교를 광주에서 나왔지만 경남 마산 출생이며 부산 동아대를 나와 이른바 ‘PK정서’에 밝은 편이다.
두 가지 사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노 대통령은 특검제에 대한 주변 의견 가운데 소수의견을 선택했다. 그 소수의견은 부산·경남과 대구·경북 등 영남지역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특검법 수용을 ‘영남에 대한 손내밀기’로 해석해볼 수는 없을까. 거부권 행사는 대야관계 파국을 뜻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제 막 통로가 열리기 시작한 영남지역과의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은 당선 이후 영남과의 소통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내각과 검찰 인사에서 영남에 대한 배려는 섭섭하지 않았다. 청와대의 상층부뿐 아니라 행정관급에도 영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진출했다. 경부고속철 금정산·천정산 관통노선 재검토 지시도 공약사항이긴 했지만 매우 신속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 직후 제시한 화두는 지역정당 구조의 타파와 민주당의 전국정당화, 이를 통한 내년 총선승리였다. 이를 위한 대야 협상방안으로 중대선거구제가 이뤄지면 다수당에 총리를 넘기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는 노 정권 초반기 정국운용의 밑그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그림을 그리려면 무엇보다 영남지역과의 교감이 필수적이었다.
노 대통령의 그동안의 행보는 이런 큰 틀의 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이 밑그림은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특검법을 수용함으로써 기존의 정국구상을 수정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노 대통령은 처음부터 거부권을 행사할 뜻이 별로 없었다고 청와대의 한 측근은 전했다. 제한적 특검여론이 높아지면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배수진을 친 것도 전술적 고려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노 대통령이 “내가 신뢰를 존중한 만큼 이제 한나라당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다그친 대목은 영남사람들에 대한 촉구이기도 한 셈이다. “자, 여러분을 믿고 여러분이 하자는 대로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노 대통령은 영남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남은 문제는 호남
남은 문제는 호남이다. 특검법 수용으로 동교동계 의원들과의 거리는 더욱 벌어지게 됐다. 자칫하면 호남민심이 멀어질지 모른다. 이 부분에서 노 대통령은 동교동계 의원들과 호남민심을 분리해 판단한 것 같다. 동교동계 의원들이 호남민심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해준 호남민심이 특검수용으로 대번에 등을 돌리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천정배 의원은 “개혁파가 한국의 중심세력이 됨으로써 개혁을 떠난 순전히 벌거벗은 낡은 지역주의에 기반한 세력이 호남에서 발붙일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신기남 의원 등 민주당의 ‘탈호남’을 강조해온 신주류쪽 의원들이 특검법 수용에 대해 대체로 “불가피했다”는 의견을 내놓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바둑으로 비유하면 정권 초반인 지금은 포석단계다. 노 대통령은 차근차근 명분을 쌓으며 세력을 형성하는 세력바둑을 두고 있다. 특검제 수용으로 국회를 존중하고 상생의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영남에 대한 소통의 통로를 더욱 넓혔다는 점이다. 이런 명분으로 튼튼한 포석을 짜면 엄청난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 물론 핵심 지지기반의 동요 등 당장의 실리에서는 잃는 것이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의 지난 정치역정은 정치의 바둑판에서 실리를 잃더라도 명분을 축적하는 것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잘 보여줬다. 그의 세력작전이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계가는 내년 총선에 이뤄진다.
첫댓글 달마샨님, 이름을 콕 찝어서 부르면 부담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님께서 추천해주신 기사라서 또 님의 추천이라고 코멘트 답니다. 다음부터 이름부르지 않을게요^^; 이 기사에 의하면 문재인님이 주도하여 특검을 수용했다는 내용은 없는데요.. 그리고 노대통령께서 당시 거대야당이던 한나라당과의 상생의 큰 정치, 중선거구제를 통한 총선 승리를 위한 커다란 정치적 밑그림에 의한 결단이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정치에 문외한이라 독해력이 부족한지 님께서 쓰신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신동아기사는 주소를 입력했는데 페이지가 보이지 않아서 못 읽어봤습니다. 어쨌든 님 덕분에 몰랐던 기사도 읽게 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고
그냥 문재인의원의 운명을 읽어보세요
신동아 기사는 주소는 여깁니다 제가 기계치라 핸펀에선 url복사를 어케하는지 몰라서...글구 저는 문재인이 특검을 주도했다고 하진않았고 문재인을 비롯한 참모진은 수용의사가 주였다고 글을 쓴듯한데요
만약 특검을 청와대 참모진에서 주도했다면 문희상 비서실장 유인태 정무수석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죠 당시 언론에선....
특검을 주도한것이 아니라 수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와 결단을 생각해보는 좋은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통 생전에는 그분에게 관심도 없었고 정치에도 관심없었는데 지금에서야 그분의 고뇌를 되새기니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이제는 시사인 읽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할려구요~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