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盧天命, 1912~1957)
약력1912년 황해도 장연 출생 1941.7.8 시국과 소하법 매일신보 노천명 시인 ( 시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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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합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lily
女心
새벽하늘에 긴 강물처럼 종소리 흐르면 으레 기도로 스스로를 잊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해 주십시오.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며 하루를 반성할 줄 아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슬플 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女性으로살게 해주십시오.
드릴줄 아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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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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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진 않겠소.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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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畵像(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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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늘타리 따는 길 머리엔 학림사 (鶴林寺)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등글레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장구채 범부채 마주채 기륙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룹 개두룹 혼닢나물을 말 끝마다 꽉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직이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던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 (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꺽어 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 원이더니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꺽다 나면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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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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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 나오는 고가가 보였다.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손길이 흰 사람들은
사슴을 이야기했다.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몸을 소스라침을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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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으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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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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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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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
전승의 날
거리거리에 일장깃발이 물결을 친다 아세아민족의 큰 잔칫날 오늘 싱가폴을 떨어뜨린 이 감격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남양 형제들에게 꽃다발을 보내자 비둘기를 날리자
代代로 너희가 섬겨온 상전 영미는 오늘로 깨끗이 세기적 추방을 당하였나니
종려나무 잎사귀를 쓰고 나오너라 오래간만에 가슴을 열고 웃어 보지 않으려나
일장표의 비행기 은빛으로 빛나는 아침 남양의 섬들아 만세 불러 평화를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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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송 ( 悲戀頌 )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연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그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
임 오시던 날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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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노래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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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언덕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곱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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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해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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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같이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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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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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
밤의 찬미 |
눈 보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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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盧天命, 1912~1957)
약력1912년 황해도 장연 출생 1941.7.8 시국과 소하법 매일신보 노천명 시인 ( 시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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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합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l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