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와 라자로 -
☆ 2014년 가해 3월20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수도회] 하늘 동향인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 신부
† 제1독서 : 예레 17, 5 - 10
† 복음 : 루카 16, 19 - 31
★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의 행복을
전한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에도
그 잎은 푸르고,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자신만
호의호식한 채 그 집 앞에서 비참하게 고생하던 라자로를 외면한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는다. 그 반면 죽은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위로를
받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으면, 대칭적인 무늬를 만드는 회화
기법인 '데칼코마니'가 생각납니다. 데칼코마니의 한편은 현세이고, 다른
한편은 죽은 뒤의 삶입니다. 현세에서 부자가 겪는 즐거움과 라자로의
비참함이 죽은 뒤의 삶에서는 서로 역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 한쪽을
보면 다른 한쪽을 그려 낼 수 있습니다.
죽은 뒤의 삶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가련한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라자로를 가르는 메울 수 없는 골짜기입니다. 반대편에 있는, 현재의 삶에서
죽은 다음에 만나게 될, 건널 수 없는 골짜기에 대응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수신자는 바로 부자입니다. 저승에 있는
골짜기는 부자가 살아 있는 동안 현세에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뜻이
이 비유에 담겨 있습니다. 그 골짜기는 다름 아니라 스스로를 다른 이의
고통에서 분리시켜 놓는 무관심하거나 무정한 마음을 통하여 서서히
생겨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리'라는 포콜라레 성가가
생각났습니다.
"온 세상 곳곳에 수많은 강이 흐른다/ 길고 깊게 흐르는 강 우리를 가른다/
서로 물 건너 마주 바라보지만 만나지 못한 채/ 그 눈빛은 불신으로 가득 차/
어찌 강 위에 다리를 우리 놓지 않는가/ 어찌 강 위에 다리를 놓아 서로 만나지
않는가/ 어찌 다리를 놓지 않나."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은 자신을 쉽게 남들과 구별 짓고 그들이 닿지 않는
곳에 있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불행의 골짜기를 만드는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강을 이어 주는 다리를 놓아 서로 진솔하게 만나는 삶,
서로의 짐을 덜어 주며 돌보는 삶,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십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교만이
2014년 가해 3월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 16,19-31
서른일곱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회사를 그만두고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던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전의 직장이 안정적이기는 했지만, 보다 더 도전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이 보낸 지원서에 대한 답변을 세
군데에서 받았지만, 불행히도 세 통 모두 불합격이라는 통지였습니다. 이
자매님은 크게 실망을 했고 또 좌절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친구와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면서 친구에게 말합니다.
“지원서를 쓸 때 난 내가 직업을 구한다는 데만 신경 썼을 뿐, 그들의 관점과
그들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어. 즉 나는 그들과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지. 다시 지원해봐야겠어.”
이 자매님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지원서를 받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며 그
조직이 목표를 달성하는데 자신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썼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좋은 조건으로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 자신이 어떤 모습과 생활을 해야 할 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다보니
상대방의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기는 어렵고 대신
무관심과 부정적인 마음만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은 부자는 복음 내용만을 봐서는 그리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다.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고, 남의 재물을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간음을 비롯해서 특별히
무슨 잘못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죽어서 지옥 불의 고통 속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비참한 신세의 라자로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못
봤다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라자로가 있었던 곳은 누구나 잘 볼 수 있는
부자의 집 대문 앞이었기에 못 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동물인 개조차
부자의 종기를 핥아서 고통을 가라앉히는 도움을 주고 있는데, 사람인 부자는
철저하게 외면했던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 지옥 불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청하지요. 여전히 라자로를 무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라자로에게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라자로를 자기가 부리는 하인 취급하듯이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교만이 그를 지옥 불의 고통 속으로 인도했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지요. 그래서 가난한 남자에게는 라자로라는 이름을 쓰지만, 부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에 이름이 기록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 철저히 의지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지옥 불에서 겪는 고통을 우리 역시 피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하도록
합시다.
미소 한번 짓는 것, 격려의 손길을 건네는 것, 칭찬하는 것은 자신의
양동이에서 한 국자를 떠서 나에게 주는 것과 같다. 희한한 것은 이렇게
주도고 제 양동이는 조금도 줄지 않는 것이다(윌리엄 미첼).
레안드로 바사노의 '부자와 라자로' 성화입니다.
푹 자야 하는 이유
며칠 전에 어떤 일이 있어서 아주 늦게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두 시간 정도밖에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낮에 조금도 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점점 더 피곤함이 몰려들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눈을 감고
싶었고, 이러다보니 누군가가 부탁을 하면 괜히 짜증이 나더군요.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수면이 부족하면 상대방보다 내 우선순위를 먼저
생각한다.’고 합니다. 정말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피곤하니, 다른 사람을
향한 여유는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실천도 결국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 말은 곧 이웃을 위한 사랑에
우선순위가 아닌, 나를 향한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간다는 또 다른 말임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사순 제 2주간 목요일
2014년 가해 3월20일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 16,19-31
예전에 대학 다닐 때, 민중가요를 많이 배웠습니다. 방학 때는 ‘농촌
봉사활동’을 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예천의 농촌에도 갔었고, 낙동강 근처의
나환자 마을에도 갔었습니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지식을 배우면서 현장에서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억울한 이, 불쌍한 이들과 함께 했습니다.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본인의 출세와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임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오늘은 예전에 불렀던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입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자로는 현실의
삶에서는 병들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현실의 삶에서는 부유하게, 편안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부자이면서 가난한 라자로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재물의 십일조, 노력의 십일조,
봉사의 십일조, 재능의 십일조, 시간의 십일조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코
내가 가진 것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결코 썩거나 상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곳간에 우리의
마음을 쌓아 놓는 것입니다.
‘두려워 마시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근심과 걱정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주님! 이 사람이 이렇게 장애인이 된 것은 그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조상의 죄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장애인이 된 것은 본인의 죄도 아니고, 조상의 죄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술과 담배로 찌들어가던 한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 가니,
간경화라고 하였습니다. 의사는 아내에게 6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은 아내와 본당의 구역에서 함께 기도하였고, 어느 날
하느님을 믿으면 나을 것이라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의 간경화는 기적처럼 치유되었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고난과 고통 중에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모두 고난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2014년 가해 3월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복음 : 루카 16,19-31
<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
요즘 사순절이 사순절 같지가 않습니다. 너무 풍요하게 지내기 때문입니다.
어제가 축일이었는데 며칠 전부터 또 앞으로도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약속이 계속 잡혀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많은 선물도
받고 있습니다. 한 아이는 자기 용돈을 모아서 양말을 사서 보냈고, 한
자매님은 몇 달 동안 기도와 정성으로 십자수를 놓아서 그것으로 제의가방을
만들어 보냈고 어떤 분은 나름대로 고가의 시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두와
양주, 홍삼, 화분 등도 보내주셨습니다. 사제가 되고는 이렇게 받는 것들에
매우 익숙해졌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다른 이들의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빨아들이는 못된 부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성의를 거절하면 더
마음아파 하심을 알기 때문에 받기는 받지만 받는 기쁨이 있는 동시에 마음도
편치는 않습니다.
축일 당일이었던 어제는 점심 후에 잠시 쉬고 있는데 교구청 직원으로부터
한 자매님이 찾아와 한 시간째 가지 않고 계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자매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신 적도 있고 정신장애로
나라에서 돈까지 받는 그런 나름대로 본당과 교구에서까지 유명한 자매입니다.
제가 내려갔더니 제 사무실에 약간 냄새가 났습니다. 가난한 이들이게 나는
냄새, 저에게서는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그런 냄새였습니다. 그분이 사온
선물로는 딸기 한 박스와 비닐봉지에 싸 가지고 오신 약간은 무르게 돼 버린
작은 바나나들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신 것이 분명할 텐데 그것을 들고
오시느라고 고생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내려오기를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저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미안하셨는지 당신 이야기만 계속
하시더니 갑자기 가야겠다고 하시며 도망치듯 가버리셨습니다.
그분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본당에서도 외톨이이시고 세상에서도 가난하고
힘없는 소외된 분이지만 왠지 오늘 복음의 ‘거지 라자로’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반대인 배부른 부자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단순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다.”
‘좋은 것들을 받았다.’ 정말 저는 좋은 것들을 너무나 벅차게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돈 걱정 없이 가난이라는 말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 자매는 저에게 연락도 못하고 한 시간씩이나 기다렸고, 그분의 삶
또한 그렇게 정신이상이 생기게 될 정도로 온갖 고난을 다 겪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정신장애로 받는 돈이나 나라에서 다른 이유로
나오는 돈들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고아원이나 이태석 신부님 수단 선교를
위해 매달 고스란히 봉헌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는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온갖 나쁜 것을 받으며 일생을 살아온 세상에서 누구도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이 없는 거지 라자로와 같은 냄새나는 자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는 모습, 하늘나라에서는
이 분이 저보다 훨씬 더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 자매를 위해 무언가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안 그러면 정말
구원받지 못하는 부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침 사무실에 홍삼 선물이
들어온 것이 있어 가져가라 드렸더니 말은 안 가져간다고 하시는데 얼굴은
약간 원하시는 듯이 보여 계속 권유했더니 그것을 가져가셨습니다. 그랬더니
제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부자가 왜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사랑하면 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돈이 없으셔서 가난하게 사셨겠습니까? 다 나누어 주셔서 스스로
불편해짐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난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부자가 될 것인지, 거지 라자로가 될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참된 행복으로의 길...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이 삶이 그저 덧없는 시간이라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에
들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2014년 가해 3월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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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삶이 전부이고,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삶이 그저 지나가는 가치 없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역시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하나의 길로 이어진 두 공간이라고 말씀하시며,
사랑하라 하셨고,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나누라 하셨고, 유혹에 빠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지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최선을 다해서 이 삶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삶은 참 많은 불평등과 불공평의 시간으로 이루어진 듯이 보입니다. 사실
세속적 가치로 본다면 세상은 결코 평등하거나 공평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시각을 바꾼다면, 즉 복음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세상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시대, 좋은 환경에 태어나 건강과 호사를 누리고 살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해 보입니다. 그리고 암울한 시대, 열악한 환경에 태어나 가난과 병과
온갖 어려움과 싸워야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불행해 보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눈으로 보는 판단입니다.
아니, 우리의 솔직한 욕심으로 보는 세상이고 그에 대한 판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의 기준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기준인가를 알게 됩니다. 비록 가난하고 불편한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알고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 보아도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이들의 얼굴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반면, 모든 조건을 갖춘 듯 보이는 이들에게서 썩은 냄새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가련한 얼굴을 보게 됩니다.
결국, 복음이 말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던지, 참된 행복으로의 길을 찾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시고자 했던 길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삶의 매 순간이 잘 살아 행복할 수 있는 기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이 사회를 파괴하는 요소들
2014년 가해 3월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 16,19-31
이 사회를 파괴하는 요소들
옛말, 격언, 명언들 그리고 어르신들의 말씀 등 앞선 말들이 많습니다.
이런 옛 상식들이 사람 성숙에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거지요.
세대 차이를 이런 명약이나 영양소에까지 해당시키면 절대 안 됩니다.
지금에는 모든 명약 자양분이란 바로 돈 명예 재물 등이라 생각합니다.
또는 기술 실력 학벌 전문 고등직업종사자면 완전한 사람으로 보고요.
지진 홍수 따위보다 이 사회를 훨씬 더 파괴하는 요소들인데도 말입니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1)”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하늘 동향인/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순 제2주간 목요일(2014년 3월 20일): 하늘 동향인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 16,19-31
옛 수도 교부들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 이기심을 경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기심은
자기 눈 앞에 있는 현세적 지상적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꼭 물질에 대한 것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집착도 탐욕입니다. 자기한테 보탬만 된다면 물질이든
사람이든 물불을 안 가립니다. 탐욕이 자기 자신을 집어 삼켜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기심의 종살이를 해방인 양 즐깁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부자 집 대문 앞에는 가난한 나자로가 헐벗고
굶주렸지만 부자의 눈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탐욕이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땅의 부자는 땅속에 묻히고, 나자로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기적
탐욕에서 해방되려면 우린 이 땅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깊은 자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참 고향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참 고향을 아는 사람만이 옆에 있는 가난한 사람도 하늘 동향인임을 압니다.
여기서 상생의 꽃이 핍니다. 이런 사람이야 이미 하늘을 이 땅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각자를 땅을 살아가지만 하늘의 사람으로
살도록 호소하십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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