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소백산 아랫자락에 있는 큰 고개 죽령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1. 5. 0:19
소백산 아랫자락에 있는 큰 고개 죽령
6월 초순경이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철쭉제가 열리는 소백산을 지난 백두대간이 하나의 큰 고개를 열었으니 그 고개가 죽령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고개인 죽령은 해발 689미터로 대재, 죽령재라고도 부른다. 백두대간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에 해당하며, 신라 제8대 임금인 아달라이사금이 길을 열었고, 삼국시대 이래로 봄ㆍ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죽령사라는 산신당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문신 서거정이 “소백산은 태백산에서 이어져 서리서리 백 리 길이 구름 속에 갇혀 있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구획하여 하늘과 땅을 이루니 귀신도 인적을 깨우쳤다”라고 노래한 이곳 죽령을 무대로 설치던 도둑 떼를 잡아 수호신이 된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는 곳은 일명 국사당이라고 불리는 대강면 용부원리의 산신당이다. 다자구 할머니(주막집 할머니 이름)가 죽어서 죽령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어 불렀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다자구야 들자구야 언제 가면 잡나이까
들자구야 들자구야 지금 오면 안 됩니다
다자구야 다자구야 소리칠 때 기다리소
다자구야 다자구야 그때 와서 잡아가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역에서 풍기읍 희방사역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가 길이 4500미터의 똬리골(죽령 터널)을 통하여 죽령 산허리를 통과한다. 단양과 풍기 간 국도가 지나는 용부원리 쪽 죽령 터널 입구 부근에 단양제2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령폭포가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를 넘기가 너무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고 해서 죽령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 고개는 예로부터 영남과 호서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1941년 죽령 아랫자락에 터널을 뚫어 중앙선이 개통되었고 몇 년 전에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고개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계립령과 새재, 이화령을 지나면 속리산에 닿는다. 속리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추풍령(200미터)까지 산의 높이가 낮아진다. 그 뒤 백두대간은 황학산(1111미터), 덕유산(1596미터), 지리산 등의 봉우리들을 지나며 크고 작은 고갯길을 열어놓았다. 백두대간은 고려시대 이래로 한반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중부 지방과 인구가 많이 살고 자원이 풍부했던 영남 지방의 경계가 되었다.
백두대간에는 고대로부터 죽령, 계립령, 새재(641미터) 등의 교통로가 발달했는데 영남 지방이라는 말은 새재, 즉 조령(鳥嶺)의 남쪽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죽령과 새재 외에 모래재, 버티재, 저수재, 벌재, 여우고개, 이화령(548미터), 소리터고개, 오로재, 율치, 주치령을 지나 추풍령에 닿는다. 지경령ㆍ월암령ㆍ육십령(734미터) 등도 있고, 그 밑으로 매치ㆍ팔량치 등이 이어진다.
추풍령은 충북 영동군 황금면 추풍령리에서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동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영남과 호남을 이어주던 고갯길이다. 조선시대에 문경새재가 가장 중요한 고갯길이었다면 현재 가장 중요한 고갯길은 추풍령이다. 조선시대에는 해발 200미터인 이 고개 밑에 추풍역이 있었고, 지금은 이 고개로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이 나란히 지나간다. 이 고개는 가을철 단풍이 곱게 물드는 곳이어서 추풍령(秋楓嶺)이라 하던 것이 풍(楓) 자 대신 풍(風) 자로 바뀌었다고 하며, 옛날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려면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하여 추풍령(秋風嶺)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조위는 추풍령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므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지다.
이 말은 그 당시 추풍령을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문경새재의 통행량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평택이 고향인 민세 안재홍이 기행문 『춘풍천리(春風千里)』에서 추풍령을 묘사한 부분을 보자.
추풍령을 넘는다. 일대 산악이 뱀같이 길게 이어져 북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오히려 만만한 기세를 보인다. 추풍령은, 즉 속리산으로부터 서행하는 과도 지대다. 석자(昔者) 임진(壬辰)의 역(役)에 흑전장정(黑田長政)이 서로군(西路軍)을 거느리고 추풍령을 지나 청주, 죽산 등지를 거쳐 북상하니 오인 독서자(讀書子)의 두뇌에는 이러한 인상이 때때마다 스러질 수 없다. 조선의 기후가 추풍령을 분계로 삼아 남북이 수이(殊異)한 바 있거니와 추풍 이북에는 북류수(北流水)를 보고 추풍 이남에는 남류수(南流水)를 보는 것도 매우 흥미 있다.
추풍령을 지난 백두대간은 괘방령에 이른다. 괘방령은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에서 경북 김천시 봉산면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인데, 관원들과 과거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많이 다녔다. 추풍령은 과거 시험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넘지 않았고 괘방령을 넘으면 급제한다 하여 이 고개로 즐겨 넘었고 인근 고을에 부임하던 관리들까지도 한사코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서양의 격언에 ‘여럿이 있으면 안전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고갯길이 하도 험해 60명은 모여야 함께 넘었다는 남덕유산 자락의 육십령을 지난 산줄기는 팔량치에 이른다.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팔량치는 경남 함양과 전북 남원의 접경지에 있는 고개다. 송나라 때의 문인 소식은 “서남 지방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이 변하여 길가에 쭉쭉 뻗은 대나무, 졸졸졸 흐르는 소리”라고 노래했으며, 청나라 때의 시인 공자진은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하늘은 빛이 다르고 땅은 기운이 다르며, 사람들의 인정도 다르다”라고 읊었다.
또한 장자는 『산수』편 335에서 “그 고장에 가면 그 고장의 풍속에 따른다”라고 하였고, 중국의 속담에는 ‘강남의 귤이 회수(淮水)를 지나면 탱자로 변한다’고 하였다. ‘10리 간에 말이 다르고 100리 간에 풍속이 다르다’는 말도 있고,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물은 사람들이 소통되게끔 해주고, 산은 사람들이 단절되게 해준다”라고 하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기후 풍토가 자연에 끼치는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말이 제대로 실감 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의 함양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팔량치로 가로막혀 팔량치를 사이에 두고 말씨부터가 달랐고 생활양식까지도 달랐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해 서로 오가게 되면서 비슷해지고 있다. 하지만 말씨는 여전히 다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죽령, 새재, 육십령, 팔량치 등을 대재라 부르고 나머지 고개들은 소령(少嶺)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교통량을 참고해서 부른 것이다.
팔량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해발 513미터다. 삼봉산(1187미터)과 연비산(843미터) 사이에 자리한 이 고개를 24번 국도가 통과한다.
백두대간의 고갯길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랜 것은 계립령과 죽령이다. 삼국시대 초(156~158년)에 개척된 이 영로들은 고려시대까지 활발하게 이용되었으나 조선 초에 계립령 왼쪽의 새재를 이용함에 따라 계립령의 기능은 점차 쇠퇴하였다. 근대 교통기관의 도입 이후 추풍령으로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통하게 됨에 따라 영남과 중부 지방을 잇는 교통로의 중심은 새재의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11~1915년 도로 개수 사업으로 새재 이웃의 이화령이 자동차 도로로 개발되었다. 그 밖에 죽령ㆍ화령(청주~상주), 팔량치(남원~함양) 등으로 확장되었다. 새재를 비롯한 영로들은 국지적으로 이용되는 소로로서 명맥이 유지되거나 또는 폐도화하였다.
죽령 장승
백두대간의 고갯길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랜 것은 계립령과 죽령이다. 삼국시대 초(156~158년)에 개척된 이 영로들은 고려시대까지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백두대간을 벗어난 고개 중 충청도 지방에서 이름난 고개가 충주와 제천 간의 박달재다. 소 장사 나간 아들에게 주기 위해 끓인 묵을 가지고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와 기다렸다는 눈물겨운 사연을 지닌 고개가 박달재이고, 장호원과 충주 간의 임오치, 안성과 병천 간의 부수문이고개, 천안과 공주 간의 차령, 공주와 청양 간의 한치가 이름난 고개다.
특히 고개는 도둑들의 근거지였다. 여덟 명이 조를 짜서 넘었다는 대구의 팔조령, 길이 하도 험하고 도둑이 들끓어서 60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남덕유산 자락의 육십령, 100명이 모여 넘었다는 구미시 장천면의 백곡고개, 1000명이 모여 넘었다는 인천의 천명이고개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넘었던 고개가 도둑이 많기 때문에 만 명이 모여서 넘었다는 부여 홍산의 만인재가 도둑에 얽힌 재미있는 유래를 가진 고개들이다.
영남 지방에서 이름난 고개는 대구 분지 북쪽에 자리한 소야고개, 영천과 청도 간의 성현(省峴), 삼랑진과 물금 사이의 작천도(鵲遷道) 등이 있다.
주령(珠嶺)은 영양군 수비면과 울진군 온정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일명 구슬재 또는 구실재라고도 부른다. 금장산과 백암산 사이에 있는 이 고개의 꼭대기에 오르면 멀리 동해가 바라보이고, 맑은 날에는 울릉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영양군 북부에서 동해 방면으로 통과하는 유일한 도로인 이 고개는 예로부터 크고 작은 관행(官行)과 상인들의 통행이 잦았으므로 수비면에는 신원(新院)이 있고, 울진군에는 천미원(川彌院)이 있어서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고갯길 가에는 산신당과 옥녀총(玉女塚)이라는 무덤이 있다.
교통의 요지였던 주령이 그때까지는 강원도 울진군에 속했는데, 1963년에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편입되면서 주령은 군의 경계로 바뀌고 말았다. 현재는 영양군 북부 지방과 강원도의 영동 지방 그리고 동해 방면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호남 지역은 산이 높지 않아 높은 고개는 흔치 않지만 호남평야와 나주평야 사이에 입암산, 방장산, 문수산, 불갑산 등이 있고 이 산들이 무안의 승달산까지 이어지면서 그 들목에 갈재(276미터)가 놓여 있어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갈재에 호남선과 호남고속도로의 호남 터널이 놓이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다 보니 얼마 전 걸어 넘어본 결과 갈재 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서울 경기 지역은 어떠할까? 높고 험준한 고개는 아니지만 널리 알려진 고개들이 많은데, 이러한 고개들이 서울의 발달에 일정 부분 장애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름난 고개로는 무악재, 아현, 미아리고개 등이 있고 서울을 벗어나면 경원국도상의 축석령(123미터), 경의국도상에 있는 혜음령, 경춘국도상의 망우리고개, 과천 방향의 남태령, 양재 부근의 다리내고개 등이 유명하다. 특히 혜음령은 조선시대 서로(西路)의 요충지로, 고갯마루에는 벽제관(碧蹄關)이 설치되었고, 다리내고개는 영남대로상의 요지였으나 한동안 폐도 되었다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도로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고개는 사람이 다니거나 그 일대에서 가장 편리한 교통로였기 때문에 그 아랫자락에는 관문취락(關門聚落)이 발달하였다. 그 일대의 정치, 교통, 문화의 복합적 기능을 담당해온 도시들을 예로 들면 대관령 동쪽의 강릉, 새재 북쪽의 충주와 남쪽의 상주, 점촌 등을 들 수 있다. 관문취락보다 작은 규모를 영하취락(嶺下聚落)이라 한다. 대관령 서쪽의 하진부, 죽령 일대의 단양과 풍기, 새재 부근의 수안보와 문경 등도 높은 고개를 배경으로 발달한 곳이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지역 또는 국가 간의 경계가 되므로 예로부터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큰 고개 부근의 요지에는 책(柵), 성(城) 등의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관방에는 관문을 만들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동시에 고개를 들고 나는 통행자들을 감시하였다. 관방 가운데 유명한 곳이 죽령, 계립령, 새재, 관갑천, 소야고개, 작천, 자비령, 철령, 혜음령 등이다.
계립령은 신라 아달라왕 3년(158)에 개통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로 알려졌고, 죽령은 아달라왕 5년에 개통된 고개라고 알려졌지만 신라의 영토가 그 부분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져 확실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 고개를 개척한 사람들은 남한강 상류 지역에 거주하다가 신라에 합류한 옛 진한계가 아닌가 여겨진다.
문경새재 제3관문
문경새재는 영남에서 소백산맥의 준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세 개의 관문이 있었다.
문경새재는 5세기경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되었다. 문경새재가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 직후였다. 신립이 천혜의 요충지인 문경새재에 진을 치지 않고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가 왜적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뒤 유성룡은 새재의 어류(御留, 일설에는 고려 태조가 행차를 쉬던 곳)성에 목책을 두르고 군사를 배치하였다. 숙종 때 이르러 3개의 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조곡관(鳥谷關), 조령관(鳥嶺關)을 설치하고 동시에 문경읍 남쪽 20여 리 지점의 관갑천잔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고모산성을 보수하였다. 그때 대구의 북쪽 소야고개에 제2방어선을 두어 칠곡의 가산산성을 쌓았으며, 물금과 삼랑진 사이의 작천잔도(鵲遷棧道)에 작원관(鵲院關)을 설치하여 왜의 침입을 대비하는 제1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고모산성
문경 고모산에 있는 산성으로, 470년경에 처음 축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옛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문지와 북문지, 동쪽 성벽의 일부분만 남아 있다.
이러한 관문에는 대개 기찰이 배치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였다. 새재의 관문, 작원관 등과 비슷한 기능을 가졌던 곳은 혜음령의 벽제관, 자비령의 절령관이다. 이 관방들은 대륙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고개의 기능은 전략적인 면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중요하였다. 고대로부터 영로 부근에는 각지의 상인이 집결되어 상업 요지로 발달한 취락이 많은데, 영서 지방의 대화ㆍ횡성, 죽령 일대의 풍기, 새재 일대의 충주ㆍ점촌, 화령 일대의 보은ㆍ상주, 추풍령 아래의 김천 등이 좋은 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해안 지방의 어염(魚鹽), 산지의 임산물, 평야 지대의 곡물과 가축이 교역되었다.
물론 문화적인 면에서도 고개는 중요하였는데, 일반적으로 큰 산줄기는 사투리를 비롯하여 가옥 구조 및 생활양식 등 문화권 설정에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갯길은 여러 가지 제약을 완화해주는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큰 산줄기에 의하여 갈라지는 양 지역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죽령 북쪽의 단양과 남쪽의 풍기, 화령 동쪽의 상주와 서쪽의 보은, 팔량치 동쪽의 함양과 서쪽의 운봉은 예로부터 혼인 관계, 주민의 이동, 기술과 정보의 교환 등 문화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해왔다.
큰 산줄기는 지역 간의 자연적인 방벽을 이루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정치적 또는 행정적 경계로 이용된다. 그러나 산맥을 가로지르는 고개는 산맥의 양편에 있는 주민들을 정치ㆍ경제ㆍ문화적으로 연결해주는 통로 구실을 하였다.
사연 없는 고개가 어디 있으랴만, 조선 후기인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두 곳의 고개는 묘한 대조를 보인다. 황톳재라고도 불리는 황토현은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가정 북쪽에서 도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이긴 고개이고, 우금치고개는 공주시 금학동에서 이인면 주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동학농민군이 크게 패한 고개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전에는 이곳에 도둑이 많았으므로 저물게 소를 몰고 다니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이곳 우금치에서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크게 패했는데 적게는 만여 명, 많게는 10만여 명이 죽었다”라고 한다.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이 있는 고개로 계룡면 월암리에는 수유령, 늘티, 판티라고도 불리는 무너미고개가 있다. 효포에서 공주시로 넘어가는 이 고개도 그렇지만 전봉준이 붙잡힌 전북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무너미마을에는 무너미에서 피노리로 넘어가는 무너미고개가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우연인가.
수분이고개는 장수읍과 번암면 경계에 있는 해발 660미터의 고개로, 물줄기는 금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섬진강이 된다. 말재 또는 비행기재로 불리는 매치봉은 장수읍 대성리와 산서면 노성리 경계에 있고 해발 762미터다. 또한 진안군에서 완주군 소양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모래재이고, 만덕산 지나 임실군 관촌면에서 완주군 상관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슬치재다.
경기도 금사면 상품리에서 광주시 실촌면 진업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남이고개다. 남이 장군이 어렸을 때 군사 훈련을 하는데, 백마를 타고 이곳에서 활을 당겨 후리에 있는 고양이바위에 활을 쏘고 백마를 달려 그곳에 가보면 화살보다 말이 먼저 도착했다고 한다.
강릉시 입암동에서 청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도적고개다. 소나무 숲이 빼곡해서 도적들이 들끓었다 하고, 고성군 간성읍 광신리 광평에서 어룡으로 넘어가는 어룡고개는 옛날 호랑이가 신랑과 신부를 물어다가 이 고개에서 잡아먹었다는 사연이 있어 신행길에는 이 고개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강릉시 강동면의 안인진리(安仁津里)는 조선시대 안인포에 수군만호가 있었기에 안인날기, 안인나룻말, 안인진, 안인날개(마을)로 불렸는데, 그곳에 있는 큰물재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서려 있다. 조선 정조 때 다산 정약용과 함께 수원성을 축조했던 채제공이 강릉 경포대로 놀러 가는 길에 이 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 밑에서 큰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었다고 해서 큰물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인제군 남면 어론리의 거니고개는 두촌면 건남리의 원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건이치 또는 건이현으로 불렸는데, 고개가 낮아서 “놀기 좋기는 합강정(인제읍 합강리에 있음), 넘기 좋기는 거니고개”라는 노래가 남아 있다. 인제군 북면 원통리에 있는 세거런이(삼가현)고개는 세거리에서 용대리의 남교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옛날에는 잇따라 세 개의 고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50년 전에 돈 많은 과부가 돈을 내어 두 고개를 없애고 하나의 고개만 남겼다고 한다. 인제군 인제읍 가리산리의 하구고개는 젓바치에서 덕전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옛날 두 사람이 싸우다가 원님에게 소송하러 가던 길에 화해를 했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
인제의 고개들
남면 어론리의 거니고개는 두촌면 건남리의 원거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세거런이고개는 세거리에서 용대리의 남교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하구고개는 젓바치에서 덕전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다.
정선군 북면 유천리의 가물재는 양짓말에서 갓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고개가 하도 가팔라서 재 밑을 내려다보면 정신이 가물거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와 비슷한 사연을 지닌 고개가 정선읍 광하리에서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로 넘어가는 마전치다. 이 고개는 일명 비행기재로 불리는데 재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편 석파령은 춘천시 서면 당림리와 덕두원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옛날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큰 고개였다. 춘천부사가 갈릴 때마다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이 고개에서 돗자리 한 장을 펴놓고 마주 앉아 이취임을 했다고 한다.
“정선읍내 150호 몽땅 잠들여놓고서 이호장 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라고 「정선아리랑」에서 노래한 성마령은 벨팻재 또는 벽도령으로도 불리며, 평창군 도남면 하암마리에서 정선읍 수통매기로 넘어가는 고개다. 이 고개는 높이가 943미터인데 벼슬하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 벼슬에서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고, 횡성군 청일면 속실리의 눈물고개는 황정골에서 벌막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원님이 피난길에 눈물을 흘렸다는 고개다. 또한 영월군 영월읍의 절운재는 거운리에서 문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의 경사가 하도 심해서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으려면 절을 하는 것처럼 허리를 구부린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서울과 과천을 잇는 남태령은 서울 남쪽의 제일 큰 고개라는 뜻이고, 성동구 약수동의 바람 맞는 고개는 산이 높고 물이 좋아서 장사가 많이 나므로 그 기운을 없애기 위해서 이 고개를 끊었다고 한다. 또한 적유령이라고도 불리는 미아리고개는 되놈이 이곳을 넘었다고 해서 되놈이고개라고도 부르고,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아리랑고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