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그 정원에서 살 자격을 박탈당한 까닭에 그들은 그 정원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식들을 낳고 살았는데 오늘날은 한두 명 낳고 끝나나 당시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700년, 800년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몇백 년 동안 젊은 기간을 유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2년에 한 명씩 나았다고 가정하면 200년이 되면 100명이 되고 400년이 되면 5천 명에 여자가 2500명이니 600년이 되면 25만 명이고 800년이 되면 1200만 명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으니, 아담이 죽기 전 인류의 숫자는 벌써 천만 명이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구가 늘었으므로 노아 시대에는 대단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오래 살았으니 사람들은 엄청 강하였을 것입니다.
20살, 30살에 헬스장에 가서 열심히 운동하면 근육이 매우 커집니다. 그 당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몇백 년 동안 근육을 단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현대와 비교할 수 없는 매우 강한 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셋의 아들들과 카인의 딸들이 결혼한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다른 해석이 있는데 욥기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말하니 하나님께 반역하였다가 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인데 원래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육체, 즉 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 천사들은 사람의 몸이나 동물의 몸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복음서들에 보면 “귀신들린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이런 것입니다. 타락 천사들은 사람들에게 들어갔고 또한 돼지 떼에도 들어간 것입니다.
타락 천사들은 몸이 없으나 사람이나 동물에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인데 악마가 뱀에 들어가 여자를 유혹했듯이 동물에게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또 클론, 복제인간들을 만들어서 그 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열심히 과학 공부해서 30살 40살이 되면 과학자가 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몇백 년을 살았잖습니까?
한 사람이 몇백 년을 사니까, 얼마나 과학과 기술 경험이 많겠습니까? 그들이 복제인간을 만들었고 그 복제인간 속에 타락 천사들이 들어가고, 유전자 변형해 크게 만든 복제인간 속에 타락 천사들이 들어간 존재들을 저는 그 당시에 땅에 있었던 “네피림”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창 6:4).
타락 천사들이 몸을 가지고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가 자식을 낳았고, 그들은 그 덩치가 컸기 때문에 용사들이었고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셋의 자손들과 카인의 자손들이 결혼해서는 이런 자들이 나지 못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다 백신 맞고 나서 유전자 변형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6개월 되어 아이가 80cm, 1m 되니까 ‘우리 아이 대개 커’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아이들이 크면 거인들이 되고 거인들과 살아가는 세상이 됩니다.
유전자 변형 즉, 노아 시대에 이미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한 것입니다. 타락 천사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해 사람들의 유전자가 바뀐 것입니다. 사람들이 악해지고 거인들이 사람들 괴롭히는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물로,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마음먹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상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 은혜를 발견합니다.
창세기 6장 8절에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 은혜를 발견하였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은혜를 발견하다”라는 말이 우리말로 매우 낯선 표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은혜를 입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어에 보면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눈 안에서 은혜를 발견하려면 전제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눈 안에 은혜가 있었기에, 노아는 그 은혜를 발견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노아를 향한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하나님의 눈 안에 존재하는 은혜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공로를 세워 하나님께서 주시면 그것은 은혜가 아닌 보상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무조건으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런 은혜의 마음이 있었기에 노아가 은혜를 발견한 것입니다. 은혜는 아무 값없이 발견되는 것이지 선행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1. 마리아는 하나님과 함께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루카복음 1장 30~33절에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라, 이는 너는 하나님과 함께(with) 은혜를 발견하였기(find) 때문이고. 보라 너는 자궁(womb)에 붙잡고(conceive) 아들을 해산하겠으며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겠으니(shall call). 이가 큰 자가 되겠으며 그가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고 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throne)를 주실 것이고. 그가 그 영원들 안으로 야곱의 그 집 위에 지배하실 것이고(reign), 그의 왕국(kingdom)은 끝이 있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하나님과 함께 은혜를 발견한 까닭입니다(룩 1:30). 그녀는 하나님과 함께 은혜를 발견한(have found)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눈 안에”의 대신에 “함께”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녀는 13살 정도 되었을 것인데, 당시 결혼을 일찍 했기 때문입니다. 13살 소녀가 살며 이 세상에 자선을 얼마나 많이 베풀 수 있었겠습니까? 어린 소녀일 뿐인 이런 마리아도 하나님과 함께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마리아처럼 큰 은혜를 받은 여자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 것입니까? 이 세상에 지금까지 수백억 명의 여자들이 태어나 살다가 죽었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들보다 마리아가 더 은혜를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어머니가 된 그녀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자가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체가 되셨고 우리 안에 거주하셨으며 그 영광을 관찰하니 아버지로부터 유일하게 생겨난 자와 같은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의 충만한지라(full of).”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창조 사건에 하나님의 영(Spirit)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 뿐만 아니라, 아들 하나님께서 말씀 하나님으로 모든 창조의 일에 관여하신 것입니다. 창조는 성부 하나님만의 일이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천지창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계셨는데 예수님은 말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고 이것을 한자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말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그 당시 사람들 안에 거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사람들과 함께하시려고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성막”은 “신성한 천막”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황야에서 늘 이동하여야 하여 천막 안에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함께 늘 이동하셔야 하셔서 천막 안에 거주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집에 거주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천막에 계심이 마음에 걸린 다윗은 성전 건축을 계획합니다. “전(殿)”이라는 말은 “큰 집 전(殿)”인데, 하나님의 집이니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주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육신이 되신 것인데, 예수님의 육신, 몸 안에 누가 계셨습니까?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인데 왜 예수님의 몸이 성전입니까?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거주하셨으므로 그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 안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이 그 제자들 안에 함께 거주하셨고 그 제자들이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독생자의 특징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사람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신 때가 있었고 날이 서늘할 즈음이면 하나님의 음성이 에덴의 정원 안에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아담과 함께 거주하시며 친교를 나누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를 망쳐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를 범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함께 계시기 위해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셔서 우리와 친교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 거주하시면서 사람들과 교제하기 원하셨으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바로 이것을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와의 친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풍부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구약성경의 “자비와 진리”와 똑같습니다(출 34:6).
출애굽기 34장 6절에 “자비와 진리가 많은 신(God)”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하심을 뜻합니다.
“은혜”는 ‘사람에게 값없이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총애’를 뜻하며,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일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의 것을 받을 만한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입니다.
내가 어떤 공로를 쌓아서 주어지는 것은 상이고 보상이고 대가입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호의가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을 만한 자격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의 것, 곧 심판을 받을 만한 자에게 베푸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하여 나타난 “은혜”는 “구원하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두었다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으며 살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 언약에 있어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을만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최초의 복음을 원시복음(原始福音, Original Gospel)이라고 말하는데 이 한자어에는 “근원 원(原)”과 “처음 시(始)” 자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말씀하신 원시복음이 창세기 3장에 기록되었습니다. 뱀과 여자 사이와 뱀의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증오(憎惡)가 두어졌으며 여자의 씨는 뱀을 머리를, 뱀은 그를 뒤꿈치를 상하게 합니다(창 3:15). “여자의 씨”이신 메시아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예언입니다.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밟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권을 영원히 이르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인데, 자격이 없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언약을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과 그 이후에 다윗의 자손들은 이 말씀을 오해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유다의 왕들에는 선한 왕들보다 악한 왕들이 많았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자들이 이렇게 살면 멸망할 것이라고 했지만, 거짓 예언자들은 다윗 언약이 있어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고 거짓말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평화를 외쳤으며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유대인은 70년 후에 돌아왔으나 이후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세상의 약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후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게 만드셨는데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의 왕권은 영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상에 왕이 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땅이 눈처럼 녹겠고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날아갈 것입니다. 곧 옵니다. 몇십 년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오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가겠고 거기서 예수님께서 왕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왕좌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우주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때 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왕권이 영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대로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렇게 되게 하실 것인데, 우리의 주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진실하시고 진리의 하나님이시기에 약속하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에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들과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통하여 그 신실하심이 표현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작사한 찬송가입니다. 존 뉴턴은 아이작 뉴턴하고는 다른 사람입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은 “만유인력”과 관련됩니다.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그로부터 82년 뒤의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고 뉴턴의 교육을 위해 힘쓴 여자입니다. 뉴턴이 4살이 되었고 평범한 책들은 대부분 바르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뉴턴은 기억력이 좋아 성경 구절과 찬송가와 시들을 외울 수 있었고 또래 아이들과 놀기보다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뉴턴의 어머니는 뉴턴을 목사로 기르기 위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나, 그녀는 뉴턴이 일곱 살이 되지 않았을 때 폐병으로 죽고 만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의 어머니가 죽고 나서 그의 아버지는 곧바로 재혼하였고, 뉴턴은 부주의하고 천한 아이들과 섞여 못된 행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숙 학교에 보내졌으나 규율에서 벗어나 선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린 뉴턴은 선원들의 언행을 배우며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그는 아버지의 추천장으로 해군 소위 후보생의 자리에 배치되게 되지만, 탈영하였다가 체포된 후 면직되어 아프리카로 가는 노예 상선에 팔렸고, 뉴턴을 구해준 상선의 선장이 뉴턴에게 호의를 베풀어 선원으로 살았고, 돌아온 뉴턴은 선원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으나 마침내는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놀랄 정도의 은혜(Amazing grace) 그 소리가 얼마나 달콤한지요
저것이 나처럼 가엾은 사람(wretch)을 구원하였노라!
나는 한때 잃어졌으나, 지금 발견되도다(now am found),
나는 한때 눈멀었으나, 지금 내가 보노라(now I see).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영어 가사 1절 직접 번역)
죄인이던 존 뉴턴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Amazing Grace”(놀랄 정도의 은혜)는 철저히 성경적 가사며 이런 찬송을 단순히 감정을 위로하는 노래로 부르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찬송이 포함하는 메시지를 새기면서 불러야만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가장 최고로 많이 알려진 찬송가의 하나인데 이 찬송의 시는 인류에게 위로와 희망의 노래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존 뉴턴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회심 후 영국 목사가 된 자입니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주일학교와 성인들을 위한 주 중 모임을 시작해 여러 기도회나 모임에서 찬송가 부르기(hymn singing)를 장려하였는데 결국 자신이 직접 여러 편의 찬송의 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저항하지 못하는 은혜에 의해 구원받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두려워하게(to fear) 가르친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나의 두려움(fear)을 덜어 가볍게 하였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믿은 그 시간 은혜가 나타난 것이 얼마나 귀중한가요!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영어 가사 2절 직접 번역)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 두려움이 사람을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삽니다.
많은 위험, 수고(toil)들과 덫들을 통하여 내가 이미 왔습니다:
그것은 나를 이렇게 멀리 안전하게 데려온 은혜고(It is grace),
은혜가 나를 집으로 이끌 것입니다(will lead).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영어 가사 3절 직접 번역)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 늘어나서 많은 내용을 생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뉴턴이 기록한 원래의 내용을 온전히 음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크리스천이 각자 삶을 통하여 겪는 여러 험난한 시련들을 뉴턴은 위험(dangers), 수고, 덫(snares)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이 한국어 번역 가사에는 음률을 맞추기 위해 생략되었습니다.
뉴턴에게 이런 환난들은 실제로 그의 삶에서 경험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들은 더욱 확고한 진정성과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또한 주어지게 될 것이며, 이제껏 살아온 은혜의 경험이 앞으로도 은혜를 기대하는 근거입니다. 이제껏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하늘의 집으로 이끌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하늘의 집으로 이끌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니 은혜가 나를 이제껏 안전하게 데려왔음을 생각하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근거로 “장래의 은혜”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 가사 4절부터,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관점을 미래로 돌려 시인은 앞으로의 삶과 죽음과 마지막 소멸의 과정이라는 시간 흐름 속에 끝까지 경험하는 ‘장래의 은혜’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좋은 것을 나에게 약속하셨으니, 그 말이 안전한 소망입니다;
생명이 지속하는 동안 그는 나의 방패와 몫이 되실 것입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4절 번역, 한국어로 번역 안 됨)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보존하신다는 다윗 언약이 그 배경입니다. 역대상 17장에 근거한 가사입니다.
예, 이 육체와 마음이 약해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이 멈출 때:
나는 그 휘장의 안쪽에서, 기쁨과 평화의 삶을 소유할 것입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5절 번역, 한국어로 번역 안 됨)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의 예표로, 히브리서 6:19을 연상시킵니다.
그가 휘장을 여신 사건은 복음의 사건에 깃든 과거의 “은혜”입니다. 시인은 과거의 은혜에 근거하여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노래합니다.
하늘의 성소 안에 성별된 기쁨과 평화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믿음을 찬송 저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곧 눈처럼 녹고, 그 태양이 빛나기에 억제할 것이나;
나를 여기에 아래에서 부르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나의 것이 되십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6절 번역, 한국어로 번역 안 됨)
6절은 말세에 드러나는 이 땅과 하늘의 최종적 소멸을 묘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삶으로 이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뉴턴은 하나님의 구원 과정 중에 시작과 마지막을 언급하였습니다.
나를 여기 아래에 “부르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나의 것이 되실 것이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의 삶에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 모든 구원 사역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부터 우리의 영화까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소멸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우리의 남은 삶도 확실한 믿음의 토대가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천국의 소망을 지니고서 한 해를 살아갈 것을 신자들에게 권면하기 위해 뉴턴은 이 찬송의 시를 작사하였습니다. 이렇게 이 찬송 시는 철저히 성경 신학적 바탕 위에 쓰인 것입니다.
Amazing Grace에는 죄, 회개, 믿음, 영생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섭리의 개입이라는 은혜 교리에 바탕을 둔 칼뱅주의적 신학 관을 확고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소망을 지니고 “믿음의 불을 밝히며” 살게 하려는 의도를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서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부를 때에 복음의 진리나 신학적인 교리 내용까지 습득하게 하는 것은 예배 찬송의 주요 기능 중 하나입니다.
“Amazing Grace”는 “놀라운 은혜”를 전달할 목적으로 만든 찬송인데 이 찬송은 장래의 은혜를 기대하며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이 찬송에 설교자와 목회자인 뉴턴의 마음이 어김없이 드러났습니다.
이 찬송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따르는 하나님의 주관적 개입이라는 개혁주의 구원론의 태도를 보이는 뉴턴의 신학적 관점도 보여줍니다.
1) C. H. Spurgeon, 『요한복음Ⅰ』, 스펄전 설교전집, 이광식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20), 29.
2) G. R.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36, 이덕신 역 (서울: 솔로몬, 2001), 140.
3) J. Ramsey Michaels, 『NICNT 요한복음』, 권대영·조호영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22), 122.
4) James Boice, 『요한복음 강해 Ⅰ』, 서문강 옮김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143.
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Ⅰ』, 145.
6) G. K. Beale·D. A. Carson 편집, 『누가·요한복음』,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 2권, 우성훈·배성진 옮김 (서울: CLC, 2012), 506.
7) Andreas J.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BECNT 성경주석, 신지철·전광규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74.
8)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agraphe&logNo=221025857082
9) 위 사이트.
10) 위 사이트.
11) Boice, 『요한복음 강해 Ⅰ』, 147.
12)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성경과 신학』 제101호 (2022): 100-101.
13)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02-103.
14)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07.
15)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09.
16) Boice, 『요한복음 강해 Ⅰ』, 110.
17) An Annotated Anthology of Hymns, ed. J. R. Wats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216.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1에서 재인용.
18)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1.
19) Hindmarsh, “‘Amazing Grace’: The History of a Hymn and a Cultural Icon,” 7.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1에서 재인용.
20)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2.
21)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3.
22) John Piper, 『장래의 은혜』, 차성구 옮김 (서울: 좋은씨앗, 2021), 46.
23)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3.
24)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3.
25)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3.
26) Piper, 『장래의 은혜』, 573.
27)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4.
28) Steve Turner, Amazing Grace: The Story of America’s Most Beloved Song (New York: HarperCollins, 2002), 82.
29)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5.
30)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5.
31) 김대권, 『예배와 음악』 (서울: 그리심, 2006), 161.
32)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8.
33) 이선령, “Amazing Grace에 대한 찬송 해석학적 연구”,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