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향하여 – 만나⑧ 출16:31-36
우리는 지난 주일 부활 주일에 3분의 장로님들을 세우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출애굽 여정에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믿음의 사람을 세워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광진구 부활절 연합 예배 때
살아계신 주를 부를 때 얼마나 얼마나 가슴이 메어지는지 그 감격,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잠시 ‘약속의 땅을 향하여’란 출애굽 여정을 멈췄지만, 다시 이 말씀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와 엘림을 거쳐 행진을 계속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다음 통과해야 할 지역은 소위 신 광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에서 다시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배고픔이었습니다. 별수 없이 그들은 다시 원망하기 시작했고
그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내리신 처방이 ‘만나’였습니다.
우선 이 만나라는 이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리라” 이 하늘의 양식을 31절에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섞는 과자 같더라” 만나는 히브리어로 “만후(man+hu)--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웬 은혜란 말인가? 소리치던 그들은
이 신기한 양식을 “이게 뭐냐?” 곧 ‘만나’로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몇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 너희들 때문에 광야로 와서 굶어죽게 되었다”,
“죽어도 애굽에서 고기 먹고 죽는 편이 훨씬 좋을 뻔했다”는 불평입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나고 15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라암셋을 발행한 지 45일 된 것입니다.
이때는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식량들이 다 떨어지게 된 때를 의미합니다. 이때 이
백성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이들의 주특기가 무엇입니까? 불평과 원망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은 상상도 못할 기적을 보이십니다.
그것이 만나입니다. 심판 받아야 마땅한 저들에게 만나를 주십니다. 200만 명이나 되는 많은사람들이
이 만나를 하루에 한 오멜씩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16). 오멜을 환산하면 2-3리터가
되는데, 이를 계산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에 먹은 만나의 양은 4,600톤이 됩니다. 1톤 트럭
4,600대가 공급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40년 동안이나 먹었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감사와 찬양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두신 것은 그들을 경솔하고 원망과 불평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인데 이 백성들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애굽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10가지 재앙과 기적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서 홍해를
건넜으며, 애굽의 군인들이 그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과정에서 우리는 당신의 택한 자녀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불기둥, 구름기둥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아무리 답답하고 내
이성에 동의되지 않는 이유가 있어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비하는 일은 오늘로 끝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원망과 불평입니다. 이게 안
고쳐집니다. 뭔가 달라지는 듯하다가 또 원망 불평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들으면서도 한번 택한 백성을 오히려 보호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바른 관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세상과 관계를 어떻게 맺을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시작하면 우리 마음은 세상으로 기울어 세상을
사랑하고 땅에 자꾸 무언가를 쌓으려 합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 마음이 향하고
땅에 쌓아 두려는 경향 못지않게 성도가 경계해야 하는 또 하나의 태도는 세상을 두려
워하며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을 두려워하는 두 가지
자세 모두 성도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오래도록 교회에 다녀도
믿음이 안 자랄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염려가 일어나고 불평이 나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불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신 그분의 보살핌과 우리를
향한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불평은 곧 불신앙의 소산이며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이야기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즘 봄의
계절에서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들에 있는 꽃들을 보십시오.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지만 그들의 일평생 충분히 입고 살아갑니다. 한 번 잠깐 피었다가 지는 꽃인
데도 그 안에 수술과 암술이 있어서 생명이 보존되게 한 구조와 모양과 색상을 생각해보십시오.
꽃들의 색깔을 어떤 염료로 누가어떻게 흉내 내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특출한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보다 그 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불평과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Ⅱ. 이 만나를 통해 순종의 훈련을 하십니다.
16장 4절 후반에 보면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만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시험을 하십니다. 여기서 시험은 나쁜 길로 이끌기 위한 ‘유혹’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그들을 훈련하시고자 함입니다. 시험은 왜 주어집니까?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 시험을 즐긴 분이 계실까요? 그렇다고 시험은 필요 없다고 감이 주장할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두 가지를 동의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시험은
즐거워할 수는 없지만 시험은 필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험을 치고 나면 우리는 우리의
부족했던 면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을 보충함으로 더욱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게
되지 않습니까? 내일 장로님으로 피택받은 3분이 노회에서 6과목 시험을 치룹니다. 이 시험은
앞으로 교회를 섬길 때, 자세를 새롭게 하는 시험입니다.
첫째는 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여기 ‘먹을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둘쩨는 18절에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더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9절입니다.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그 다음날 하나님이 주실지 안 주실지 어떻게 아느냐? 내가 비축을 해 두어야 하지 않느냐?’
해서 비축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안식일 전날에는 두 오멜씩 거두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27절에 보면 “제 칠일에 백성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그 만나에 벌레가 나고, 냄새나고, 집안 더러워지고, 믿음 없다고 모세에게 야단
맞고,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가지는 광야학교에서 자족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쪽지 시험도 치루고 중간 고사도 보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스테반은 광의 백성을
광야 학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시험을 통해 주님의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자족이 하루아침에,
어느 순간에 저절로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본성을 정말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절대 습득하고 알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 같지만 절대로
가슴이 같이 가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불쌍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작은 것들을
흘려보내서 그들의 아픔을 어떤 형태로든지 보듬어 주려고 하는 마음은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움켜 잡고 나누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 성도들을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 실패한 자리, 연약한 자리에 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낙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회의에 빠지고, 심지어 믿음에서 떠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럴 때는 배워야 합니다. 그배움은 순종을 통해서 다듬어집니다.
Ⅲ. 이 만나는 영적 축복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33-35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만나를 어디다 넣었습니까? 법궤입니다. 이 법궤 안에는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영적인 축복의 원리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만나는 영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요6장 48절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
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를 먹는 자는 먹고 죽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영생의 떡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죽어도 다시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만나는 성도의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일 먹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먹은 만나를 가지고도
지금까지 배부릅니다.” 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어제 먹었으니 오늘은 필요 없습니다.” 해도 안 됩
니다. 만나는 매일 먹는 것입니다. 매일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이 양식이 되어야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만나를 통해 우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
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분의 열심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 얼마나 섬세합니까? 날마다 베푸시는 광야의 잔치에서 불평과 불만을 갖고 살면 안됩니다. 여러분,
주일에 예배 안 드리고 일하시면 돈 더 버시겠습니까? 돈은 더 벌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번 돈이
나중에 남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 십일조 떼어놓고 모아놓고 적금 들어서 나중에 부자되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일 지키고 십일조 내면 나중에 굶어죽는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신앙의 기본이 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생활, 전도생활 이런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시비 거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일을 안 하면 어려울것 같고
사업이 안 될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주일에도 일한 사람과 결국은 같게 됩니다. 도리어 주일 쉬었는데
더 벌게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일 일해서 돈 더 벌면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보다 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광야의 연단이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세상을 바라
보았습니다. 바로를 바라보고 나일강의 젖줄기를 바라보면서 애굽을 위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광야
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사람도, 샘물도 아무것도 없어요.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있었고 밤에는 극심한
추위가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광야 40년동안
하나님께서 끈질기게 요구하신 삶은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