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 황인필
도장장이였던 아버지
흑감나무 벼락맞은 대추나무를 만나고
도토리가 슬쩍 지나 가는 날도 있었지만
그날은 뜬금 없이 코끼리를 만났던 것이다
눈에는 숨막히는 긴장이 역력하면서도
혈액이 검푸른 그것을 다듬잇돌 위에 얹어 놓곤
연장을 갈기 시작했다
연장은 손가락 길이만 하게 부러뜨린 실톱 동가리
넌닝구 쪼가리로 한 끝을 쪼으게 감아 손잡이를 표시하고
다른 한 끝을 지금 상아의 혈액보다 더 검푸르게 갈고 있다
돋보기를 쓰고 바짝 오그려 세운 오른쪽 무릎에 놓인
손톱만한 면적 아버지는
그가 돌아 갈 수 있는 길을 파기 시작 했다
풍랑이 온 몸에 전해지면서 시작되는 극한 노동
사막 지나 적도 부근에 별이 부서진다
수천 년 만에 빛을 보는 미라의 치아처럼 칼 끝이 희다
칼끝만큼 좁은 길 위에 우거지는 획들
획이 부드러워야 운이 잘 풀린다 했든가
쭉쭉 뻗힌 삐침이 돌바기 옷고름 같다
어디선가 한 무리의 발소리가 흔들리고
지구의 진동이 아버지몸을 벼락처럼 뚫고 간 그 시각
코끼리는 하얀 백지위에 제몸을 붉게 복사해 놓고
초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