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첨(富籤:경품권)의 매매는 한국 형법상에 금하는 것인데 근래 한일 간에 청국 채표(彩票) 매매가 성행암으로 당국에서 자금(自今) 위시하여 엄중히 단속한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10. 3. 4)
채표는 중국 지방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발행한 복권이었다. 중국 채표의 효시는 스페인이 식민지 필리핀에서 발행한 여송표였다.(1882) 1850년대 중국에 유입돼 선풍적인 인기를 끈 여송표는 1898년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획득한 후 발행이 중지됐다.
여송표의 수입이 중단되자, 1899년 이후 중국의 각 성은 앞 다투어 공사를 설립하고 채표시장에 뛰어들었다. 1899년 광제공사에서 발행한 ‘강남채표’는 60만원이던 연간 판매량이 2년 만에 180만원으로 확대될 정도로 쾌속 성장했다.
중국에서 채표가 발행된 지 채 1년도 안 돼, 안창호·동순태·행화춘 등 한국에 진출한 중국 상사들은 ‘강남채표’ ‘교주채표’ ‘호북채표’ 등을 수입·판매했다. 채표열풍의 정점이었던 1902년 ‘황성신문’ 광고의 절반이 채표 광고일 정도로 ‘복권열기’는 뜨거웠다.
채표는 1매당 가격이 당시 중국 노동자 한 달치 생활비와 맞먹는 5원으로 매우 비쌌다. 부유층을 상대로 한 판매가 한계에 이르자, 호북채표는 한 장을 10매로 분할 판매해 서민층까지 유혹했다. 한국에서 중국 채표의 판매가 늘어나자, 한국인 당첨자도 생겨났다.
“알립니다. 저희 상점에서 23일 저녁 전보를 받았는데, 저희가 판매한 9월분 강남채표 제22381호가 1등에 당첨되어, 상금 은화 4만원을 타게 되었습니다. 저희상점에서 판매한 채표는 예전부터 당첨이 많았습니다만, 이번에 드디어 대채에 당첨되었습니다. 채표를 구매해 부자가 되고 싶은 분은 어서 저희 상점에 오셔서 구매하시기 바랍니다. 동순태 고백” (황성신문 1901년 11월 30일자 광고)
동순태의 채표 광고
당시 한국에서 중국돈 1원은 한국 돈 1원과 동가로 통용되었다.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의 초기 자본금이 4만5천원이었으니, 채표 1등 당첨금은 은행 하나를 설립할 수 있는 어어마한 금액이었다. 동순태는 이듬해 “저희 상점에서 판매한 3월분 채표가 4등에 당첨되어 ‘대한인’이 은화 1000원을 타게 되었다” (황성신문, 1902. 5. 16)는 광고도 냈다.
1907년 이후 중국에서 채표의폐해가 크다는 여론이 들끓고 1909년 채표 발행을 금지하는 성들이 늘어나자, 1911년 신해 혁명직전 중국 전역에서 채표 발행이 금지되었다. 1909년 한국에서도 채표 구매를 금지하는 법령이 공표되었지만, 강제병합 직전까지 채표는 암암리에 매매되었다.
“북부 화개동 등지에 사는 홍모가 삼작일 강남채표를 청인 덕흥호 상점에서 사다가 구리개 경찰서로 잡혀갔다더라” (신보, 1910. 7. 8) 오늘날 인생역전을 꿈꾸며 ‘로또’를 사듯이, 100년 전 한국인들도 같은 꿈을 꾸며 중국 채표를 샀다.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