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집 음식을 체계화하고 대중화한 사찰음식의 대가, 인사동 ‘산촌’ 32년째 운영 중
⊙ 화판에 매니큐어 칠하고 면도칼 꽂는 작품 프랑스와 미국 화단에서 큰 인기
⊙ 음악과 미술 결합한 누드 퍼포먼스 통해 인간의 욕망과 자유 표현
靜山 스님
⊙ 속명(俗名) 김연식(金演植), 속랍(俗臘) 67세.
⊙ 1961년 부산 범어사 입산, 해인사 강원(講院·現 승가대)에서 수학. 미술 개인전 6회, 초대전 2회 가짐.
⊙ 現 인사동 사찰음식전문점 ‘산촌(山村)’ 대표, 동산 불교대학 사찰음식문화학과 학과장.
⊙ 저서: 《산채요리》 《한국 사찰음식》 《눈으로 먹는 절 음식》 《북한 사찰음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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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에 있는 ‘산촌’은 사찰음식 전문점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집 입구에는 크고 작은 그림 예닐곱 점이 걸려 있는 미니 갤러리가 있고, 그랜드피아노 한 대가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다. 모두 이 집 주인의 열정과 예술혼이 깃들어 있는 소품들이다.
이 집 주인은 사찰음식 전문가이면서 화가이자 재즈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정산(靜山) 스님이다. 조계종 승려인 그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던 전국 24교구(현재는 25교구) 본산의 음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이다. 또한 개인전을 6회나 열었고, 프랑스와 미국 화단에서도 주목받을 정도로 자기 세계가 분명한 화가이며 출중한 연주 실력을 갖춘 재즈피아니스트이다. 음식, 미술, 음악을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인 셈이다. 벌써 30년 넘게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스님을 ‘산촌’ 건물 3층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출국 준비로 분주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초대전 형식의 개인전(1월 3~26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번 한국 전시에 출품했던 신작(新作) 28점을 선보이고 있죠. 안타깝게도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960×240cm)은 제외됐습니다. 작품이 워낙 커서 그곳 갤러리에 걸 만한 공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크기를 축소한 작품을 새로 작업해 보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은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4만 개의 면도날을 이용해 파노라마 형식으로 초대형 화면에 구현한 작품이다.
지난해 9월 인사동 아트센터에서 열린 그의 여섯 번째 개인전에는 이 작품 외에도 파격적인 소재와 형식의 작품들이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작은 성냥갑 하나하나에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린 후 수백 개를 도미노처럼 화면에 세운 <구스타프 말러의 연가곡-대지의 노래>(240×120cm), 3만 개의 면도날을 구(球) 형태로 공중에 매달아 설치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지름 150cm) 등은 스케일도 상당했다.
관람객들은 이들 작품의 규모와 소재에 놀라고, 작가가 스님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화승(畵僧)이 욕망의 상징인 매니큐어와 살생(殺生)의 도구인 칼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으니 충격을 받을 만했다. 그런 스님이 이번 미국 전시회에서는 누드 퍼포먼스까지 선보인다고 한다. 그는 “퍼포먼스 역시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선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알면 알수록 궁금해지는 그의 삶을 추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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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을 듣고 그 느낌을 화면에 담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960×240cm).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모티프로 면도칼로 작업했다. |
여수 부잣집 아들로 성장
정산 스님은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속랍(俗臘) 열여섯에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그가 출가 전까지 자란 고향 집은 돈 자랑 말라는 여수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다. 그 시절 집 안에 피아노가 있을 정도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가 출가하게 된 배경은 뭘까.
“저는 어머니가 셋이었어요. 저를 낳아준 어머니 외에 두 분이 더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중혼(重婚)이 가능해 아버지가 조강지처(糟糠之妻)인 어머니 외에 두 명의 여성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이죠. 모두 한집에서 살다 보니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의 한(恨)을 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풍류에 빠진 한량이었다. 현모양처(賢母良妻)였던 그의 어머니는 가슴에 쌓인 설움을 흥타령이나 육자배기 같은 민요 가락에 담아 풀어냈다. 부엌일을 하거나 바느질을 할 때면 끝도 없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어머니의 노랫가락이 흐느낌으로 들릴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한밤중 어머니가 바느질을 할 때면 무릎베개를 하고 누워 어머니의 노랫가락을 듣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 대목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우는 소리로 들려 ‘엄마 울지 마’라고 몇 번씩 말하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우는 게 아니라 노래 부르는 거란다’라며 저를 안심시키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쑥대머리’를 다시 들어보니 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춘향이가 낭군 이몽룡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담아 부르는 이별가더군요.”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했고 또래에 비해 조숙했던 그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는 내성적인 아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친구는 책과 음악이었다. 그는 “장르 구분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음악감상실이라든가 전축을 수리하는 소리사 등에서 클래식 선율이 흘러나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곡이 끝날 때까지 넋이 나간 듯 서 있곤 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테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의 소설과 철학 서적을 이해도 못하면서 무작위로 읽어댔지요. 방인근(方仁根)이나 정비석(鄭飛石)이 쓴 연애소설도 탐독했습니다. 그 과정에 천경자(千鏡子) 화백의 수필집 《유성이 가는 곳》을 읽고 감동해 출가할 결심으로 가출(家出)을 결행하게 되었지요.”
《유성이 가는 곳》은 1950년대 말 천경자 화백이 고흥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당시 발표한 스케치 기행 산문집이다. 그는 “‘해남 대흥사 동백나무 숲에 꽃이 피었는데, 붉은 동백꽃 사이로 빡빡머리 스님들이 지나간다’는 대목과 ‘칸나가 핀 정방폭포를 그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저녁 예불소리에 홀려 그 소리가 이끄는 데로 가보니 정방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대목에 매료돼 출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저는 아버지에겐 배울 것도 본받을 것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집에 있다가는 아버지처럼 한량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여서 그 책을 읽곤 대흥사와 정방사를 찾아가 보기로 했지요. 두 절 중 한 곳을 택해 출가할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싫어 家出 후 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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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은 갖가지 나물과 해초로 요리한 음식으로 상을 차려낸다. 인사동을 찾는 외국인들이 들르는 명소다. |
색채 감각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여비 마련을 위해 동네 아이들에게 연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곤 어느 봄날 간단하게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그는 우선 집에서 멀지 않은 해남 대흥사를 둘러봤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인 제주도로 가기 위해 목포에 도착했다. 그런데 때 이른 태풍에 배가 뜨지 않아 발이 묶이고 말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갑자기 그곳으로 가는 길이 막혀 당황스러웠습니다. 바람 부는 부두에 망연자실 서 있으니 어떤 아저씨가 ‘학생 어디서 왔느냐’며 말을 걸더군요. 제가 ‘나는 고아다’라고 답했더니 일행이 묵는 곳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하더군요. 규모가 꽤 큰 여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3일 동안 머물며 집으로 편지 한 통을 써서 부쳤습니다. ‘집에 있으면 아버지를 닮을까 걱정이다. 아버지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나를 찾지 마라. 내가 떠난 후 누나나 동생들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되었으면 한다’는 내용의 짧은 편지였지요.”
며칠 후 제주도 정방사에 도착했다. 정방사는 뜰에 종려나무가 많고, 지붕이 양철로 된 아담한 암자였다. 이곳에서 주지승 잔심부름을 하며 1년 정도 생활할 무렵 타관에서 객승이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 들렀다. 객승은 그를 보고 “행자는 여기 왜 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공부하러 왔다”고 답하자 객승은 야단을 치듯 “여기는 말이나 훈련하는 곳이지 사람이 공부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나를 따라오면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 객승을 따라 도착한 곳은 한국 3대 사찰 중 한 곳인 부산 범어사였다. 객승은 그를 당시 주지인 달산 스님에게 데려가 “쓸 만한 아이이니 상좌(上座)로 삼으라”고 전한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후 범어사에서 3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다. 채공(나물 무치는 행자), 갱두(국 끓이는 행자), 공양주(밥 짓는 행자)를 차례로 거쳐 달산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해인사 강원에서 수행 중 병좌(음식을 만드는 곳의 책임자)와 원주(절의 살림을 총괄하는 직책)의 자리를 넘나들며 절집 살림을 도맡아 했다. 이때부터 전국 사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독특한 절 음식들을 채록하기 시작했는데, 그 계기는 범어사의 명허(明虛) 큰스님 때문이었다고 한다.
“불가(佛家)에서 음식은 버려야 할 오욕(五慾) 중 하나입니다. 음식의 맛을 추구하거나 음식을 맛으로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 때문에 절 음식은 입과 손끝으로 전해져 왔을 뿐 기록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맥이 끊긴 음식이 많았지요.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부엌에서 일하는 저를 불러놓고 ‘옛날에는 이런 음식, 저런 음식이 있었는데 요새는 통 먹을 수가 없다’며 타박하시곤 했습니다. 큰스님은 옛날 절 음식을 많이 기억하고 계셨어요. 덕분에 큰스님의 기억에 의존해 맥이 끊길 뻔한 절 음식을 재현할 수 있었지요.”
이를 계기로 그는 10년 동안 전국 24교구 본산 부엌을 돌며 지방 특유의 절 음식을 채록했다. 음식에 사용되는 나물과 채소 등 갖가지 재료를 일일이 그림으로 그려 기록할 정도로 열심히 작업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대중에게 알리고자 신문과 잡지 등에 음식 칼럼을 연재했고, 강좌도 열었다. ‘사찰음식’이라는 용어는 이때 탄생했다.
사찰음식으로 布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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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사찰음식 전문점 ‘산촌’은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아시아 10대 식당’에 선정되는가 하면 《뉴욕타임스》에 ‘몸을 따뜻하게 하고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
인사동에 ‘산촌’을 오픈한 것은 그의 음식 칼럼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1980년이다. 그는 “출가 후 줄곧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수행을 했으니 나는 음식으로 포교(布敎)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산촌’을 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을 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중이 무슨 음식 장사냐, 그러려면 승복을 벗어라” 등 교계 안팎에서 말이 많았다. 총무원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에 호(號)를 하나 주면 사찰음식을 통해 포교를 해보겠다고 간곡히 부탁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음식은 오욕 중 하나로 승려로서 버려야 할 것이지 붙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이유였죠. 저는 ‘나는 지금껏 음식으로 수행해 왔고, 다른 공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종단에서는 살림을 맡아달라며 나를 주방에 붙들어 놓지 않았느냐’고 항변했지요. 그러곤 ‘종단에서 지원해 주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해보겠다’고 선언하고 지인의 도움을 받아 ‘산촌’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후 ‘산촌’은 인사동을 찾는 외국인들이 들러야 할 명소가 되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아시아 톱10 음식점’ 중 한 곳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음식을 통해 한국 불교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온 셈이다. 그 때문인지 지금은 종단에서도 사찰음식전문점을 운영할 정도로 음식을 통한 포교가 일반화되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길 아닌 길을 걸은 선구자였다”며 웃었다.
요리하는 틈틈이 그림 그려
정산 스님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전국 사찰을 돌며 접한 자연이 그에게 끊임없이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미술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재미삼아 그렸을 뿐인데 전문가의 눈에 띄어 화가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한 공중파 방송의 오디션 프로를 보니까 한 번도 노래를 배워본 적 없는 청년 참가자가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더군요. 이 청년 참가자의 노래를 들은 심사위원들이 ‘저 사람은 본인이 노래를 잘하는 것도 모르고 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저런 컬러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 청년 참가자나 자신이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하면서 신선하고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는 얘기로 들렸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타고났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화가로서 그를 발굴한 이는 미술평론가 김광명(金光明) 교수(숭실대)였다. 김 교수는 ‘산촌’을 찾는 많은 손님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저는 산촌을 운영하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어요. 김광명 교수가 산촌을 찾은 날은 유난히 손님이 많아 분주한 날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저는 식당 구석진 자리에서 그림을 그렸지요. 이걸 김 교수가 우연히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스님, 전시 경험이 있습니까’라고 묻기에 ‘그냥 혼자 재미삼아 끼적거려 보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작품이 이렇게 좋은데 왜 전시회를 하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식당 주인이 그림을 그리니까 그냥 격려 차원에서 하는 칭찬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여러 번 들러 같은 말을 반복하더군요. 전시회를 하면 평도 써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7년 가을 인사동 공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도자기 접시, 타일, 나무그릇, 종이 등에 그린 꽃과 나무 그림 54점을 출품했다. 색감이 독특한 매니큐어를 안료로 사용한 그의 작품은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매니큐어를 안료로 사용한 작가는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고 한다. 그는 “2000년 초 어느 날 아끼던 도자기가 깨져 금간 곳을 가리기 위해 누군가 쓰다 버린 매니큐어로 무늬를 그려보니 색감도 세련되고 접착력도 좋아 이후 애용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첫 개인전 이후 그는 매년 작품 전시회를 열며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2010년에는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 담’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때 한국에 온 프랑스 평론가가 그의 작품에 매료돼 그를 이듬해 프랑스 사랑통시(市)에서 열리는 제58회 살롱전에 초청했다. 그것도 한두 점을 출품하는 그룹전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전시공간을 주는 특별전 형식의 초대였다. 그는 총 22점의 작품을 선보였고, 성별·국적·장르를 초월한 전 세계 150여 명의 초대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회에서 공로상 성격의 ‘사랑통 시장상’을 수상했다.
프랑스를 통한 성공적인 해외 화단 데뷔는 미국 무대로 이어졌다. 사랑통시의 살롱전을 관람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갤러리 주인이 그의 가능성을 보고 이듬해 초대전 형식의 개인전을 열어준 것이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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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응축된 매니큐어로 무욕의 상징인 관음상을 표현한 <관조+명상>(270×840cm). 매니큐어는 휘발성이 강해 물감보다 빨리 마르고 색깔이 600여 종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다는 게 장점이라고 한다. |
<드뷔시의 달빛>이라는 제목의 이 초대전을 통해 미술과 음악의 결합을 시도했고,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며 부산 범어사에서 행자로 있던 시절의 일화를 한 토막 들려줬다.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를 소나티네 하권까지 마칠 정도로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어요. 불가에서는 사미계를 받으면 북 치고 장구 치는 데 가는 것을 금물로 여기지만 저는 벽장 속에 포터블 전축을 숨겨놓고 몰래몰래 들을 정도로 음악과 연을 끊지 못했지요. 전국의 이름난 암자는 몰라도 클래식 음악감상실은 모두 꿰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노스님께 혼난 적도 있지요.”
범어사 행자 시절 이야기다. 당시 큰스님이 대구의 한 암자에서 스승의 제사를 지내러 가는데, 그가 시봉(侍奉)으로 따라나섰다. 저녁이 되어 둘은 대구 시내 포교당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포교당 멀지 않은 곳에 음악감상실이 있다는 걸 아는 그는 큰스님에게 “칫솔 사러 잠시 상점에 다녀오겠다”고 둘러대고 음악감상실에 갔다. 그러곤 클래식 선율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2시간이 지나 정신이 번쩍 든 그가 포교당으로 달려갔을 때 큰스님은 없고, 시봉을 기다리다 화가 나서 이웃의 다른 절로 잠자리를 옮겼다는 소식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랴부랴 이웃한 절로 찾아갔더니 화가 난 큰스님께서 면벽수도를 하고 계시더군요. 큰스님에게 저같이 무례한 시봉은 아마 그전에는 물론 이후에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혼쭐이 나면서도 그는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드뷔시의 달빛>을 넘어 <구스타프 말러의 몽유도원도> 같은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음악과 미술의 접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음악과 미술은 물론 음식까지도 한 뿌리고 한 줄기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볼륨이라든가, 콘트라스트라든가, 미디엄이라는 용어가 이 세 분야에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 그런데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화가들의 작품을 보니 오선지를 삽입한다든가 악기를 형상화하는 직접적인 표현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더군요. 저는 밝고 어두운 것, 짧고 긴 것, 두껍고 얇은 것 등의 대비만으로도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망 끊는 누드퍼포먼스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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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스님이 ‘환경과 일상’을 주제로 열린 울산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에서 누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
2011년 가진 샌프란시스코 초대전에서는 음악과 미술을 몸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갤러리 주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을 때 그는 “시간과 공간을 준다면 아주 특별한 퍼포먼스를 하고 싶다”며 밤새워 구상한 장면을 말로 설명해 보였다고 한다.
“무대 중앙에 가사까지 갖춘 승복 차림의 제가 앉아 있고, 제 오른편에 서예와 거문고 연주에 능한 제자가 갓에 도포를 걸친 양반 복장으로 서 있습니다. 제 앞의 제단에는 온갖 음식과 꽃, 촛대, 목탁, 요령 등이 놓여 있고요. 제가 목탁을 두드리며 낮은 음성으로 염불을 외면 제자는 붓글씨를 씁니다. 이어서 제자가 거문고를 타면 제가 입었던 승복을 하나하나 벗어 나신(裸身)이 된 후 벌떡 일어섭니다. 그 순간 제단의 음식과 소품들이 온통 제 몸으로 달라붙습니다. 그것들은 실로 연결돼 제 성기의 귀두(龜頭) 부분에 묶여 있는 상태지요. 무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저는 실로 연결된 물품들을 끌고 뒷걸음질칩니다. 그리고 면도날을 이용해 작업한 제 그림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습니다. 얼마 후 제자가 촛불을 들고 와 성기 끝에 매어 있는 실 뭉치를 태워 잘라내는 것으로 퍼포먼스는 막을 내립니다.”
욕망을 잘라내고 무(無)가 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의미를 담았다. 갤러리 주인은 어린아이와 노약자는 입장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퍼포먼스 공연을 허락했다. 그는 구상대로 퍼포먼스를 펼쳤고,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받은 관객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갤러리 주인은 그 자리에서 내년에도 전시와 더불어 퍼포먼스를 했으면 한다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퍼포먼스를 펼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각만으로도 흥분된다는 듯 퍼포먼스 내용을 신나게 설명해 주었다. 또한 준비 중인 7번째 개인전 계획도 밝혔다.
“올해 11월쯤 개인전을 가질까 합니다. 이번에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감동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동명(同名)의 교향곡을 그림으로 표현해 볼 생각이에요.”
그는 이 역시 신명나는 일이라는 듯 작업실 한편의 진공관 앰프가 장착된 오디오를 켰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웅장하면서 풍부한 음색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흘러나왔다. 그는 공연 준비가 끝났다는 듯 화려한 색감의 매니큐어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