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차 ‘티베트 사자의 서’ 강의를 듣고/안성환
장소; 청소년차오름센터
일시: 2024. 6. 18(화) 18:50~20:50
강사: 이범교교수 (사)울산문화아카데미 전임교수)
주관: 사단법인 울산문화아카데미
‘티베트 사자의 서’에 대하여 교수님은 시종 ‘산자를 위해 쓴 책’이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인생의 마무리를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아무리 찾은들 익숙해진 두려움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강의 서두부터 긴장시킨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티베트인은 죽음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생각할까? 티베트어로 ‘몸’을 ‘뤼’라고 부른다고 한다. 수화물처럼 사람이 떠난 뒤에 남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뤼(몸)’라고 말할 때마다 티베트인들은 ‘인간이란 삶과 육신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외적인 환경을 좀 더 편안하게 하려고 시간을 소모하는 번거로움을 벌리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그들은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먹을 것과 등을 덮을 정도의 의복, 그리고 머리를 덮을 정도의 지붕만 갖춰져 있으면 만족하다고 한다. 참 희한한 일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풍족하면 그 순간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행복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 만 가지 근심을 이들은 일찍 깨달은 것 같다.
오늘 강의에는 밀교와 분별만 머릿속에 남는다. 밀교는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붓다가 깨우친 진리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은밀하게 전하는 비밀 불교를 말한다. 좌우지간 몰래 비밀스럽게 경전을 다루는 것을 밀교라고 하면 될 것 같다. 티베트인들은 제2의 붓다를 ‘파트마삼바바’라고 한다. 그는 8세기에 인도 우디야국의 왕자로 태어나 어린나이에 출가한 인물이다. 티베트는 밀교 역사상 최고의 대 성취자로서 티베트 사람들은 그를 문수보살, 금강수보살, 관음보살 삼존자의 화신으로 믿고 있다. 특히 그는 뛰어난 비밀 교법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주로 바위틈이나 동굴 등에 숨겨 놓았는데 이러한 경전들이 1200년 만에 발굴되어 서구의 기독교적 영혼관에 엄청나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이 비밀의 경전을 접한 정신 심리학자 쿠스타프 칼 융(1875~1961)은 “가장 차원 높은 정신의 과학”이라고 극찬하며 장문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 책은 칼 융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인류 최고의 책이었다. 깨닫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드문 것 같다. 그래서 관념적이 말 보다 직접적인 말이 좋다는 뜻이다.
불교를 크게 나누어 현교와 밀교로 구분한다고 하면 될는지 모르겠다. 현교는 금욕적 생활을 하며 말이나 글로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밀교는 현교보다 쉬운 그림이나 어떤 행위를 통해 무아지경에 빠져 깨달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치를 깨달는다든지 해골바가지에 물을 마시고 이치를 깨달는 것처럼. 그렇다면 현교와 밀교 중 어느 것이 좋으냐 하면 그것은 답이 없다. 저울에 달면 비슷할 것 같다.
그래서 밀교의 깨달음에 가기 위해서는 무아의 경지로 가면 되는데 무아지경의 쉬운 예는 묻지마관광 이라든지 성행위라고 했다. 생각건대 그럴만한 이유가 되는 것은 혼을 놓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있기 때문인 것 같다. 밀교는 그야말로 비밀스럽게 교리를 전해야 한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밀교가 전성기를 맞은 시기는 신라에서 출발하여 고려 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조선으로 접어들면서 ‘숭불억제’ 정책으로 불교가 쇠퇴하면서 밀교는 사라졌다고 한다. 겨우 명맥을 유지 하는 것이 진각종 정도라고 한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위덕대학교 설립자 손재석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는 대부분 ‘현교’라고 한다. 일본은 90%라 ‘밀교’라고 하니 일본의 개방된 성문화가 이제야 조금 이해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밀교를 알 수 있는 문이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 밀교를 이해하기에는 좀 더 공부를 해야 될 것 같다.
이어 분별(分別)이다. 분별은 사물의 종류에 따라 구분한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구분해야 잘한다는 뜻일까? 예를 들어 피는 같은 피인데 몸속에 있으면 깨끗하고 신비한 액체이지만 몸 밖으로 나오면 혐오스러운 액체로 둔갑한다. 원효의 해골바가지 물이 그렇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의 해골바가지 마신 물과 날이 밝은 물은 같은 물인데 완전히 달랐다. 같은 물인데도 그 물은 단 몇 초 사이에 원효를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시키고 당대의 최고 유명한 사상가로 만들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추악함과 더러움, 잘 생김과 못생김 모두 분별에서 오는 것이다. 분별을 없애는 것도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분별을 압축하면 삶의 대표적 가르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 같다.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라는 것, 정리하면, 세상에 버려야 될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는 것 같다. 잘못된것을 보면 저렇게 안 해야지 하며 반면교사로 삼고, 좋은 것을 보면 본받아야지 하며 정면교사로 삼으면 되니까.
2024년 6월 18일 이범교교수님 강의들 듣고 성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