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군의 전설이 되다
[ 金擎天 ]
출생 - 사망
1888.6.5. ~ 1942.1.2. |
조선의 유지청년이 노령에 수천수만이 출입하였으나 김장군 같이 위대한 공적을 성취한 사람은 없나이다. 김군이 노령에 들어오면서 경천이라 개명하였으므로 노령에서는 김광서(金光瑞)라는 본명은 알지 못하고 경천 김장군이라면 내외국인이 별로 모르는 이가 없나이다.-나경석(羅景錫)이 1922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견문기’ 중에서-
어린 시절 나폴레옹을 꿈꾸다
김경천(金擎天, 1888.6.5~1942.1.2) 선생의 본관은 김해이며, 본명은 광서(光瑞)이다. 서울에서 1888년 6월 5일 출생하였으며, 본적은 서울 사직동 166번지이다.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현충(顯忠)이다. 부친은 김정우(金鼎禹, 1857-1908)이며 어머니는 윤옥연(尹玉蓮)으로, 5남 1녀 중 막내아들이었다.
선생의 아버지 김정우는 갑오개혁 발발 이후인 1894년 11월 경무청 총순서 판임관(警務廳 摠巡敍 判任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95년 5월 당시 35세의 만학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하여 경응의숙에 입학, 동년 11월 21일 경응의숙에 입사(入社)하였다. 부친은 군기(軍器)에 대한 전문가로서 구 한국육군의 최고위층의 인사였다.
선생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고자 하였던 것 같다. 특히 어려서부터 나폴레옹을 흠모하였다고 전한다.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존경하였던 점도 있지만 선생의 집안이 무인 가계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러한 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자녀들이 작성한 [김경천에 대한 회고]에서도,
그런데 그의 경우 이를 위해서는 멀리 나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증조부, 부친, 숙부가 병조판서를 지낸 무인의 가계였기 때문이다. 그의 형들 역시 모두 장군이었다. 정말 한 가족에 있어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김경천은 집안의 다섯 번째 장군이었다고 했다. 바로 이러한 생의 열망으로부터 김경천은 일본어를 철저하게 익히면서 지원자들에 대한 면밀한 심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육사에 입학하였다. 정말 당시의 경쟁률은 100:1이었다.
라고 했듯이 선생은 결국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꿈을 이루었다.
선생은 1909년 12월 한국인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사 제23기생으로 입학하여 1911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육사에 진학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부친 김정우가 일본에서 유학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 군사교육뿐만 아니라 중국어, 러시아어 등 어학도 교과과정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육은 훗날 선생이 일본의 전략, 전술, 일본인의 심리상태 등을 이용하여 보다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키워내다
1911년 5월 육사를 졸업한 선생은 동경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때문에 육사 26ㆍ27기 후배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1916년 12월 26ㆍ27기생 가운데 홍사익(洪思翊), 이응준(李應俊) 등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발기인이 되어 친목단체인 전의회(全誼會)를 만들었을 때 선생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까지 회지를 발간하여 동창 상호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는 한편, 회원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선생에게 결정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준 것은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2·8독립선언이었다. 시베리아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 온 <동아일보>(1923년 7월 29일자) 기자와의 면담에서 선생은,
일천구백십구년에 전무후무한 세계적 회의가 열리고 각 약소민족에게도 권리를 준다 함에 우리 동경유학생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발하였소. 이때 나는 동경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육군기병 제1연대 사관으로 있을 때이라. 꿈속같이 기쁜 중에도 불 보듯 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소. 그리하여 병으로 수유를 얻어가지고 이월 이십일에 경성에 도착하니 도처에 공기가 이상스러웠소.
라고 하여, 2·8독립선언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병을 칭하고 서울에 돌아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때 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과 이응준도 귀국하였다. 이들은 매일같이 사직동에 있는 선생의 집에 모여 나라의 일에 통분을 나누기도 하고, 자신들의 갈 길에 대하여 토론도 하였다. 그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
김경천 선생 보도기사,<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빙설(氷雪) 쌓인 시베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 한 실지 경험담(實地 經驗談)”이라는 제목으로 선생의 간단한 이력과 러시아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일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선생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당구를 치고 밤에는 술집을 드나들면서 헌병대의 눈을 속였다.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만주로 탈출하기 위한 시나리오에 따르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1919년 6월 초 만주로의 망명 기회를 잡은 선생은 평양에 있던 이응준에게 연락하였다. 그러나 이응준은 일정 및 코스의 변경으로 함께 가지 못하였다. 1919년 6월 6일 선생은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와의 면담에서 보면,
그러더니 삼월 삼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 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 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 하고 동지 이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넘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라고 하여, 장래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이들의 망명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3·1운동 후 많은 한인청년들이 만주로 망명하게 한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현역군인이었으므로 피체될 경우 군법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해졌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이들의 체포에 혈안이 되어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일단 신의주 맞은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의 연서로 ‘중화민국 관상보(官商報)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는 민족의 요구가 국제연맹 회의에서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면 혈전을 도모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한중연합을 강조하며 한중공수동맹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청년단의 활동도 동년 8월 총재 안병찬의 체포 이후 세력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선생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며 시기를 엿보았다. 이 학교에는 구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도 있었다.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맹세의 뜻으로 다 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 신팔균, 경천 김광서, 청천 지석규(池錫奎)라고 했으며, 이들을 남만주 3천이라고 하였다. 그때 장길상이 배천택을 시켜 5만원이라는 거금을 군자금으로 보내오자 이 돈을 3인이 공동관리하며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인 자성, 후창, 또는 혜산진 중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국내에 3·1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자극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동천은 남만주 한인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청천은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그리고 선생은 노령으로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였다.
한편 노령지역으로 이동하던 선생은 우선 중간 기착지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북간도를 택하였다. 단신으로 북간도로 간 선생은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방파벌간의 갈등으로 정착하지 못한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재차 이동하였다.
러시아를 누비며 ‘김장군’으로 활약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선생은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가 심해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선생은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 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수청지역의 창해청년단에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수청지역의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선생은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경천아일록] 중 일부. 김경천 선생이 회고록과 일기형식으로 선생의 생애를 기록한 글이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백여 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선생이 지도자가 되었다. 선생은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 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1921년 초 수청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선생은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 보도되고 있듯이, 수청의병대는 1921년 여름 러시아 적군 사령관의 도움으로 의복을 지원받고 수청지역에서 횡행하는 마적들을 소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적군과 무장연합을 추진하였다. 당시 러시아 적군과 한인독립군간에 공동의 적은 일본군대였다. 수청의병대에서는 부대장 이철남을 아누치노로 파견하여 연해주 무력혁명위원회 위원장 월스키와 부위원장 룹쪼브를 만나 무장부대 연합회담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상호간에 연합할 것을 합의하였다.
1921년 10월 선생의 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수청 신영동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선생은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피눈물 나는 이만으로의 이동상황을 선생은 <동아일보>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으므로 백군이 조선군이라고 만나기만 하면 죽일 때이오. 이때 연해주에 적군이 전멸함에 다시 쫓기어 돌아가는데 강낸이죽을 먹어가며 겨울에 박착을 하고 이만 강가으로 이백리를 행군하여 가쏘. 그래서 필경 어떤 산에 가서 얼음과 눈으로 요새를 만들고 지키고 있으니 만일 이때 일본군이나 백군이 들이치면 배산일전하려 하였소.
이만으로 이동한 선생의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말을 타고 비 오는 듯한 포탄을 무릅쓰고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다. 선생의 지휘 아래 2백여 명의 군사로 백군 7백 명이 지키는 이만을 점령한 것은 러시아 지역에서 전개된 한인 민족운동사상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숫적 열세와 배후의 일본군 때문에 이만에서는 전략상 퇴각하고 말았다.
이어 선생은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겨났다. 백군이 한반도 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선생은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 지역으로 돌격하였다.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서 “이것은 범의 허리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장쾌한 모험이었소”라고 하고 이어 당시의 상황을 “불빛에 뻔히 비치는 일본 보초병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흰말을 포장으로 덮어서 데리고 강을 건너는데 강에 배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었소. 마침 19세 먹은 소년 기병 1인이 자원하고 강 위에 가로 질린 철사에 매어 달리어 십여 간이나 되는 강을 건너가서 배를 가지고 와서 전 군대를 건너게 하니 이 때 발각만 되면 몰살이라. 더욱 소년을 구사일생의 경우에 보내고 매우 염려되었었소. 건너간 후 그 날 밤으로 취풍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소”라고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선생이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선생을 포시에트 군사구역 조선 빨치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9월 경에는 포시에트로 이동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선생의 지휘 아래 기마 공격을 강행하였고, 승리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922년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이었고,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선생이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922년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려졌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선생은 실의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상해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선생은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나, 이 회의는 선생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였다. 결국 1923년 4월경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고 계획하였으며, 사관생도의 교재용으로 일본 육사의 교과서와 전범령(典範令)을 번역한 것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조선군 참모부는 1923년 7월 5일자 ‘조선내외일반의 정황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근래 러시아령 연해부 및 우수리 지방에서의 김광서(김경천) 세력은 점차 문창범, 이동휘의 세력을 능가하리라고 한다. 그는 지금 이만 부근에 1천여명의 일단을 편성하여 둔전조직에 의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대가 과연 적군의 일부인지, 아니면 적군 양해하에 성립된 순수한 불령선인단체인지 미심스럽다.
또한 선생은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부는 니콜스크에 두는 등 자못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 당국의 대한인정책과 노령 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김경천 선생의 사진<출처: 국가보훈처>
1926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해ㆍ김규식 등과 함께 민족당 준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한족군인구락부를 통해 산산이 흩어진 조선항일역량을 다시 수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선생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앞두고 간첩죄로 체포되어 1936년 9월 29일 원동지방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반의 형을 복역한 후 1939년 2월 4일 카르라가에서 석방되었고, 가족을 찾아 카자흐공화국 카라간다주 텔만스키 구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코민테른 집단농장에서 채소작업원으로 1달여 동안 일하였다. 그러던 중 1939년 4월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러시아편에 섰던 한인들에 의하여 다시 체포된 후 동년 12월 17일자로 간첩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교정강제노동수용소 8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에 있는 교정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선생은 부인 유정화와 편지 왕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시베리아로 이감되었으며, 편지 왕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선생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꼬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유배되어 아르항겔스코에주 금고지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지배하던 시기라 정확한 사망일시나 장소, 사망원인 등은 알 수 없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9년 2월 16일 선생은 모스크바 군관구(軍管區) 군법회의에서 심리되어 동년 2월 19일 사후에 복권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발행일
발행일 : 2012. 11. 13.
출처
공식 카페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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