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 4월호, 5월호, 6월호, 7월호에 이어 이번이 9월호이며 열세 번째 연재기고이다. 8월호는 쉬었다.
(편집자 주)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관점에 '문학지리학도 있다. 문학작품에 나타나는공간과 장소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특정작가와 특정 작품세계에 접근하는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백광훈과 이청준
장흥 출신으로 '남도(南道)성' 관점에서 맥락이 닿는 작가로 옥봉 백광훈(1537~1582)과 미백 이청준(1939~2008)을 거론할 수 있다. 400년 시차의 중간에 존재 위백규(1727~1798)를 넣을 수도 있겠다. 옥봉은 장흥 태생이어도 외지생활이 훨씬 길었다. 그럼에도 고향 '예양강(예수)'와 장흥풍광과 사람들에 관한 시를 꽤 남겼다. 그 시절 강남사(詞) 노래에 늘 목이 멜 정도라고나 할까?
어린 나이에 스승을 찾아 외지로 벗어나고, 서울에 상경하여 공부했으며, 혼인과 거처는 해남(족에서 이루어졌으니. 장흥 땅과 멀어질 법한데도 예양강과 보림사, 형 기봉 백광홍의 죽음, 장흥의 부친과 친지들, 장흥부사들이 등장하는 여러 시를 남겼다. 하긴 옥봉은 체질적으로 유랑의 시인이었다. 경강(京江)을 오르내리며 이곳저곳 강변 풍경들을 남겨 놓았다. 바닷길 해로도 이용했다. 그런데 최근 장흥 일각에서 일방적 오해가 생겼다. 옥봉이 남긴 '용호(龍湖)' 관련시를 두고 급기야 장흥 예양강과 부춘정에 관련된 '장흥 용호'로 속단하는 의견이 등장하였다.
무릇 '용호(龍湖)'는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지명인데, 그 시절 서울 경강 본류에 옛 용산강이 합류하 는 일대를 '용호'라 칭하였다. '용산강 조운창이 있었으며, 연산군 시절에는 '용호 독서당'도 있었 다가 나중에는 '동호 독서당'으로 옮겨갔다. 원래 있던 용산강 조운창이 나중에 막히면서 마포서강 쪽으로 내려가긴 했으나, 큰 배들도 오가는 용산강 용호풍광이 퍽 훌륭했던 모양이다. 용산강 풍경에 대해 백곡 김득신(1604~1684)은 '용호' 시를, 훗날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하일(夏日) 용산잡시'를 남겼다.
옥봉은 젊은 날 한양 유학시절에 '용호'를 경험할 수 있었으며, 나중에 동호(東湖)의 건너편 봉은사 호사(湖寺)체험도 있었고, 남한강 상류에 있는' 용문'에도 가보았다. 옥봉이 남긴 <용호잡영(龍湖雜詠)> 등을 '장흥 용호'로 단정하는 태도는 재고를 요한다. 요컨대 '한시'의 맥락은 그 제목으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상황, 공간적 배경, 시문시어 내용, 교류의 상대방 등을 종합 할 수 있어야 한다. 옥봉이 남긴 '용호' 등장시의 배경과 상황은 '장흥 부춘정 풍광과 역사적 현실에 영 딴판이다.
그간에 장흥 선비들 누구도 예양강과 부춘정을 '용호'에 빗대어 노래한 사례는 없다. 부춘정 앞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호바위'는 옥봉 사후에 추각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의문 하나. 옥봉은 그 시절 용호(龍湖)를 왜 그리 찬미하였을까? 옥봉은 소과 입격은 하였어도 대과 등용에 실패하였다. 큰형 기봉(1522~1556)이 소과시 입격에 대과급제로 홍문관에 진출하였음에도, 또한 가까운 친구 송강 정철(1536~1593)은 대과장원을 하였음에도 옥봉은 소과에서 끝나고 말았다. 승승장구하던 형 기봉의 때 이른 죽음이 첫 원인이 되었을 것이지만, 옥봉에게 '용호등룡'의 좌절은 평생 회한이 요, 슬픈 기억이 되고 말았을 일. 나중엔 참봉 음직 벼슬을 오가다가 서울객지에서 타계하였다.
당대 남도의 대표적 문사 석천 임억령(1496~1598)은 옥봉을 가리켜 '호해비가사(湖海悲歌士)라 호칭했다.(옥봉 백광훈의 '용산강호' 이야기는 나중에 상술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2, 이청준의 선택
앞서 옥봉 백광훈의 '용호' 이야기가 길어졌음은 미백 이청준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돌이켜 이청준은 어린 시절에 겪은 좌우대립의 가족적 참사 때문에 '용호등룡'의 길을 스스로 피했다고 볼 수 있다. 나름 서울 입성은 했으나, 이미 '등룡문'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비록 문단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였지만 서울사수의 고초 속에서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는 식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이청준이 포기하지 않은 근원적 지향성은 '남도성, 남도의식, 남도사람 양식'이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서울의 남쪽에 사는 예인광대들이 겪던 고난의 삶, 도회지 '잔인한 도시'를 벗어난 남쪽에 우거진 유자나무 탱자나무와 푸른 대숲을 찾아가는 길, 군영(軍營) 울타리의 남쪽으로 불어 대는 '이상한 나팔수', 남쪽바다로 막힌 고흥 소록도를 둘러싼 '당신들의 천국', 남쪽의 마지막 왕조 의자왕 축제를 둘러싼 '춤추는 사제', 남쪽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에 관한 서글픈 이야기 굴레'와 '안질주의보', 남쪽바다에 출구가 있는 목포로 가는 호남선 기차 '목포행', '보성, 장흥, 강진, 해남에 두루 거쳐있는 '남도사람'의 서편제 남도소리 소리판, 우렁이 막창자 끝자락 같은 오지에 있는 '무소작'의 남쪽 고향 진목리, 이청준의 소설에 등장하는 '남석'이란 이름의 남자들.
남쪽 지방에 위치한 제왕산 정상에서 이루어진 '비화밀교' 축제현장. 그 큰산 남쪽에는 '키작은 자유인'들이 모여 살던 '동백나무 숲'도 있었다. 필자는 그간에 이런 남쪽 이야기들을 따로 묶어 꺼내는 것이 싫었다. 이청준 세계의 지평을 결국에는 좁히고 마는, 편견을 조장한다는 식의 비판을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가 이청준에게 '남(南)쪽'은 분명 남달랐다. 특정 출신지역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보다는, 예컨대 '천관산 큰 산'을 받들며 사는 사람들로 '도회지에서 멀리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 이념의 테러에 크나 큰 내상을 입고만 사람들, 늘 표현이 어눌하고 서투른 사람이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곳'을 지칭할 뿐이다. 그는 그 남쪽 고향의 치부를 굳이 감추려하지 아니하였다. 그 남쪽 기억에 뻗어있던 길들 '눈길'과 '살아있는 길'이 어찌 윤색 각색의 결과이겠는가? 이청준은 현자(賢者)이다.
그 세속의 '용문등룡(龍門登龍)'은 진작 포기하였지만, 그 남쪽 고향으로 인도하는 하늘의 별에 대한 꿈은 계속 간직하였다. 서방 극락을 찾듯, 평생 고향으로 가는 남쪽세상을 찾아 외롭게 걸으셨던 독행자이셨다. 떠나있던 날이 머물렀던 날보다 훨씬 많았던 남쪽 고향에 결국 귀향하였다. 언젠가 선생님은 당신의 49재를 모시게 될 장흥 보림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해탈문 '용'을 말씀하신 적도 있다.
<참고자료>
1. '장흥부춘정 용호'와 '서울용호'의 문학지리학적 고찰, 인자의 즐거움, 2010, 박형상
2. 이청준 선생님이 언급한 '탐진강' 강명은 일제시기에 부여된 명칭에 해당하지만, 돌이켜 조선시대와 동학혁명 당시 명칭은 '예양강'이었다. 식민지 시대, 장흥 팔정자 시대에도 '예양강' 명칭이 곧잘 사용되었다.
3. 같은 무렵의 전라도 동향에 서울대 출신들이라지만, '이청준'은 '김현, 김승옥, 김지하' 등과는 그 '출신성분'이 크게 구별된다 할 만큼 '시골출신의 '독행자'이었다.
박형상 변호사(前 서울중구청장)
첫댓글 응원합니다.